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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엄마라는 이름

엄마라서 가진 소원, 엄마라서 해주고 싶은 것들

희귀병 투병 중인 변혜정 작가가 두 아들에게 띄우는 편지

글·임지영 사진·문형일 기자

2011. 09. 07

얼마 전 SBS ‘스타킹’에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한 엄마가 두 아들과 출연해 전 국민의 눈시울을 적셨다. 잘나가는 카피라이터로 돈과 명예를 거머쥘 무렵, 중증천식과 중증근무력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은 변혜정 작가가 그 주인공. 어린 시절부터 일분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았을 만큼 악바리였던 그는 잔인한 운명 앞에 무릎을 꿇는 대신, 담담하게 그 속을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두 아이에게 하고픈 말을 편지로 써 내려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을 힘겹게 붙잡고 있는 그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시간이 절실하다.

엄마라서 가진 소원, 엄마라서 해주고 싶은 것들


세 평 남짓한 그의 방. 한쪽엔 볕 잘 드는 창문이, 그 창 아래에는 그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갖다놓은 침대와 쿠션들이, 침대 옆 벽면에는 하고픈 일들을 연습장 노트에 적은 소원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유난희 글쓰기를 좋아했고, 남다른 필력을 바탕으로 한때는 카피라이터와 방송작가로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았으며, 97년에는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대 곁에 머물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펴냈기도 했던 변혜정씨(41). 재원(14)과 승원(12), 두 아이의 엄마이자 천상의 아이들을 지상에 선물해준 사랑하는 남편의 아내이기에 더욱 열심히 살고 싶었던 그에게,일과 육아와 투병을 전쟁처럼 치러온 지난 8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고통스럽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소원들을 이룬 듯, 벽면 노트 위의 소원을 넘버링한 숫자에 수많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가운데 유독 동그라미 없이 휑하니 남아 있는 ‘부모님께 편지 쓰기’라는 소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부모가 된 후, 그리고 이런 운명을 대면하고 난 후 더욱 가슴 절절히 깨달은 그 크나큰 사랑에 그의 눈가에는 어느새 커다란 이슬이 맺힌다.

넉넉지 않아 더 소중한 생명의 시간
“부모님은 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셨어요. 특히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던 저를 끔찍이도 위해주셨죠. 한번은 제가 절벽에 핀 꽃을 갖고 싶다고 했더니 그 꽃을 따러 절벽 끝까지 가셨다가 그만 강물에 풍덩 빠진 적도 있었어요. 그 정도로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어요.”
어릴 적 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해준다며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로 시작하는 ‘메기의 추억’을 들려줬을 때, 바나나와 과일 통조림이 먹고 싶어 꾀병을 부리면 기꺼이 속아주며 사다주셨을 때를 변 작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꼽는다. 그는 유난히 정이 많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아버지에게서 모성도 물려받았다. 작가로서뿐 아니라 고등학교 교사, 동기 부여 강사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살아온 그가 지금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이름은 ‘재원이와 승원이의 엄마’다. 카피라이터로 밤을 지새우며 머리를 쥐어짜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해본 천국을 선사한 천사들이 바로 두 아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인 두 아이의 엄마이기에 남보다 열심히 살고 싶었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선고가 떨어진 것은 8년 전. 당시 이유 없이 자꾸 쓰러지고 넘어지는 데다 숨이 차서 강의하는 일이 점점 버거워지자 병원을 찾았다가 ‘중증천식’에 정체 모를 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상심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희귀 질환이긴 하지만 약으로 조절이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치료만 잘 받으면 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그 기대는 1년 만에 크나큰 절망으로 돌아왔다. 뒤늦게 ‘중증근무력증 면역질환’ 진단을 받은 것. 늦게나마 병명을 알아내 다행이라 여겼고, 이제 병을 이기는 길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폐를 비롯한 몸이 너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근무력증을 치료하려고 복용하는 약이 천식을 악화시켰고, 설상가상으로 뇌하수체 선종에 위장병 등 합병증까지 생겼다. 호흡곤란은 급기야 호흡마비로 이어졌고 그는 매 순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먹지도 못하고 그나마 먹은 것도 토하는 증상이 계속됐다.
그 무렵, 자신과 똑같은 질환으로 치료를 받던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절망은 배가됐다. 희망이 엷어지면 엷어질수록 삶에 대한 의지도 얄팍해지기 마련이던가. 하지만 그에게는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너무도 절실히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너 때문에 더 살고 싶다는 부모님, 반려자인 동시에 친구이자 아버지인 남편, 무엇보다 병상의 엄마에게 커피를 갖다주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또래에 비해 키도 마음도 한 뼘씩 더 크게 자란 두 아들이 그가 두 손을 쥐고 꼭 붙든 희망의 끈이었다.
“위가 움직여야 밥도 먹고 소화도 시킬 텐데 제 경우에는 그게 잘 안 돼요. 음식물을 섭취하는 대신 영양제를 맞는 거죠. 하지만 제가 아예 먹질 않으면 아이들이 엄마 걱정을 하니까 아이들과는 가급적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려고 해요. 먹어봐야 소화도 안 되고 7~8시간이 지난 후에도 위에 음식물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최소한 아이들에게 엄마와 함께 즐겁게 밥을 먹었다는 기억은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가슴을 후비는 이 아픈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자신도 알 수 없기에 투병 기간인 지난 8년 동안은 어제를, 그리고 오늘을, 세상에 다시 없을 날들로 여기며 주어진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살았다. 그럼에도 아직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쩌면 시간이 부족해 못다 해줄 말들을 들려주기 위해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편지를 썼고, 아이들이 물 먹은 화초처럼 쑥쑥 자라는 사이 어느덧 그 편지들은 50통으로 불어났다. 만질 수는 없어도 느낄 수는 있는 바람처럼, 언젠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엄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편지들을 묶어 ‘소원; 해주고 싶은 것들’(영진미디어)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고맙고도 미안한 두 아들에게
편지 형식을 빌린 책을 통해 그는 사랑은 소유가 아닌,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과정이라 말한다. 외모는 단정히, 항상 웃으며 자신감 있는 표정을 유지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라는 내용에서부터 승승할수록 자중하고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는 내용, 어른이 되거든 백해무익한 술과 담배를 멀리하라는 내용까지, 어느 것 하나 아이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애정이 담기지 않은 내용이 없다.

엄마라서 가진 소원, 엄마라서 해주고 싶은 것들

그 어떤 이름보다 ‘재원·승원이 엄마’라는 이름을 좋아한다는 변혜정 작가. 그의 집 문과 벽에는 아이들 사진과 버킷리스트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서로의 노력에도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너무 오래 아파하거나 상실감에 우는 대신, 그냥 감기를 앓듯 자연스럽게 그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가지라고 부탁하는 대목에서는 자연스레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걱정하는 그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엄마한테 듣게 될 말들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는 이 책은 어쩌면 변 작가가 지상에서 아이들에게 남기는 가장 의미 있는 선물인 한편, ‘무엇을 좋아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한 번도 이를 선물하지 못한’ 못난 딸이 아낌없이 주기만 한 부모님에게 바치는 글이기도 하다. 애교와 악바리 근성을 동시에 갖추어 어릴 적부터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둘째 딸이 중병 진단으로 무너진 후 그의 부모는 내색도 못 하고 심장이 옥죄는 나날을 하루하루 견디어왔다. 자식이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만 까져도 부모는 심장이 아린 법인데, 그런 부모님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이 이제 와 생각하니 가슴에 송곳처럼 박힌다.
“처음부터 어떤 의도를 갖고 이 편지들을 쓴 건 아니에요. 아이들이 저를 기억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냥 잊어버리는 게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요. 차라리 잊는 게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엄마라는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품고 산다면, 저를 매사에 열정적이었던 사람, 뭐든지 많이 나누었던 사람, 그리고 자신들을 끔찍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당신이 함부로 사는 오늘은 어제 생을 마감했던 이가 그토록 바랐던 내일이다’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며 살게 된 변혜정 작가. 음료수 병뚜껑 열어주기, 손톱과 발톱 깎아주기, 학교급식 지도해주기, 손잡고 산책하기, 수영 가르쳐주기, 테니스 치기, 등산하기, 언제든 힘들고 지치는 일이 있을 때 엄마 무릎 베고 쉬어갈 수 있게 해주기…. 다른 엄마들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이 일들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한 소원이다.

엄마라서 가진 소원, 엄마라서 해주고 싶은 것들


부르는 것만으로도 서글프고 죄송해지는 이름, 부모님…
아이들에게는 이런 소소한 일상의 소원들을 다 이루어줄 수 없어 너무나 미안하고, 부모님께는 한 번도 마음을 보여드리지 못한 일이 너무나 죄송스러운 변 작가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주 짧다. 인터뷰 내내 그는 아이들 얘기를 하는 동안에는 웃음을, 부모님 얘기를 하면서는 눈물을 번갈아 내비쳤다.
“열심히 살아왔고, 어쩌면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였을지 모르겠지만 부모님께는 결코 좋은 딸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늘 좋은 걸 해드려야지’ ‘내가 받은 걸 조금은 되돌려드려야지’라는 마음만 먹었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아프다는 핑계로, 아이들한테 쏟을 힘도 부족하다는 핑계로 부모님은 늘 뒤로 미뤄두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미루고 싶어도 더 미룰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마음이 굉장히 아파요. 부모님이나 저나 바다를 참 좋아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그 기회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더 늦기 전에 부모님 손을 잡고 바다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그는 자기 나이만큼은 꼭 건강한 몸으로 살아줘야 한다는 아버지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더 깊은 상처를 남길까 두려워 소원인 편지 쓰기조차 미루고 있다고 했다. 어느새 아빠보다 더 훌쩍 커버린 재원이와 애교 많은 딸 노릇을 하느라 가끔 코맹맹이 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는 승원이는 그런 엄마의 소원을 아직은 모른다. 늘 조용히 작별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 엄마가 왜 바람 같은 존재로 남고 싶어하는지, 소원이라고 벽에 적어놓고는 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는 여태 편지를 쓰지 못하는지 아직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장성해 언젠가 부모가 되어 각자의 삶을 꾸리게 되면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한없는 부정을 가슴에 품고 있듯, 그의 아이들도 어머니의 모정으로 인해 온실처럼 훈훈해진 가슴을 안고 앞날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가 책의 서두에 썼듯, 멈춰지는 것은 육체일 뿐, 그의 정신과 사랑은 소중한 보물인 아이들과 함께 쉼 없이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게 될 테니까.

자료제공·소원; 해주고 싶은 것들(영진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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