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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거장의 눈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들려주는 Memory of my mother

글·김명희 기자 사진·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1. 07. 15

무대 위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로 청중을 휘어잡는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도 어머니 앞에서는 한없이 여린 딸이었다. 6월 초 호암상 시상식에서 보름 전 타계한 어머니 이원숙 여사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정경화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과 가르침을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을 다짐했다. 명화·경화·명훈 남매를 세계적인 음악인으로 키워낸 고 이원숙씨의 특별한 교육법을 전한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들려주는 Memory of my mother

1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한 삼성가 이서현·이부진 자매. 2 3 호암상 예술상 수상 후 소감을 말하는 정경화씨와 시상식 후 기념 촬영.



“제게 영감을 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6월1일 호암상 시상식에서 거의 모든 수상자들은 어머니께 수상의 영광을 돌렸다. 그들 중 수상자석에 앉아 조용히 소감을 듣고 있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3·줄리어드 음대 교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옆에 앉아 있던 곽배희 가정법률 상담소장이 손수건을 건넸지만,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이날 정경화는 40여 년 동안 명연주로 한국인의 문화적 자긍심을 일깨우고, 세계에 한국인의 예술적 잠재력을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예술상을 수상했다.
정경화는 2005년 러시아 지휘자 기르기예프와 협연을 준비하던 중 왼손 넷째 손가락 부상으로 연주회를 취소한 이후 지난해 특유의 카리스마와 흡인력을 보여주며 성공적으로 컴백해 ‘여제의 귀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호암상도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1997년에는 동생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호암상을 남매가 받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만한 경사스러운 날, 정 교수가 눈물을 보인 이유는 여느 때 같으면 그의 옆에 앉아 수상의 기쁨을 함께했을 어머니가 안 계시기 때문이었다. 정명화·경화·명훈 3남매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워낸 이원숙 여사는 시상식이 있기 보름 전인 5월15일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수상 차례가 돼 연단에 오른 정 교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바이올린 하나 들고 한국을 떠났던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세계 최고의 매니저인 어머니가 계셨기에 가능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고 이원숙 여사는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지휘자 정명훈과 사업가로 활동 중인 맏아들 명근, 의사인 막내아들 명규, 이미 세상을 떠난 명소, 명철 등 일곱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이 여사는 생전 ‘통 큰 부모가 아이를 크게 키운다’(동아일보사)에서 자신의 자녀교육 비결을 털어놓은 바 있다.

“제가 죽더라도 우리 경화 재능 살려 잘 키워주세요”
이씨는 191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 가사과를 거쳐 일본에 유학한 엘리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공무원이던 정준채씨(1980년 작고)와 결혼했는데 이후 ‘현모양처가 돼 남편과 자식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남편의 월급만으로 집안을 꾸리기 어렵자 시장에서 음식 장사를 해서 아이들 뒷바라지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도 반듯하게 썬 음식만 먹고 과일도 예쁜 것만 골라먹는 등 가사과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또 무엇보다 엄마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 덕분인지 아이들 모두 정직한 성품을 타고났다. 생전 이씨는 7명의 자녀 중 특히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이로 정경화를 꼽았다. 두어 살 때부터 한 번 들은 노래는 음정 박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해 6·25전쟁 때 총알이 빗발치는 피란길을 내려오면서도 “이 아이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니 내가 죽더라도 누구든 이 아이를 데려다 잘 키워달라”고 당부했을 정도다.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1940~50년대, 이씨는 아이들이 서너 살 무렵부터 조기 음악교육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음악인으로 키우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한 건 아니었다. 광복 직후 그의 가족은 개성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면서 시장에서 장국밥 장사를 했는데 그 와중에 아이들 성품이 거칠어지지 않을까 걱정돼 정서교육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외상으로 피아노를 사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레슨 시간만큼은 꼭 옆에 붙어 앉아 지켜볼 만큼 정성을 쏟았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가면서 피아노를 싣고 간 일화는 유명하다. 피아노를 들여놓을 집 한 칸 구할 수 없어 남의 집 처마 밑에 놓아야 할 정도였지만, 그는 자녀들에게 계속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이씨를 극성 엄마라고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에게 음악교육을 하면서 남보다 일찍 시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한다. 기능을 익혀서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음악을 통해 성실성과 바른 습관을 몸에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훗날 방학이나 휴가 중에도 아이들이 레슨을 빼먹지 않도록 스케줄을 짜고 독려하느라 늘 연구해야 했노라고 고백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들려주는 Memory of my mother


아이들 모두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각자 재능은 달랐다. 큰딸 명소는 손가락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피아노 연습에 매달린 반면, 명화·경화는 피아노에 영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명화는 바이올린에도 관심을 두지 않더니 중학교 입학 무렵 악기점에서 첼로를 발견하곤 거기에 푹 빠졌다고 한다. 비록 다른 사람에 비해 출발은 조금 늦었지만 자신과 잘 맞는 악기를 찾은 덕분에 명화는 순식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경화는 바이올린을 딱 두 번 배우곤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연주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8개월 만에 콩쿠르에 나가 3년간 배운 사람을 제치고 입상을 했다. 당시 선생님들은 모두 경화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유난히 맑고 곱다고 칭찬했다. 경화가 1960년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께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엄마, 7년 후를 보세요.”
그로부터 꼭 7년 후인 1967년 경화는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인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너무 기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에게 경화가 말했다.
“엄마,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보낸 편지 기억하세요? 그때 약속했었죠. 7년 후를 보라고. 전 7년 동안 그 약속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재능과 적성에 자신이 있었기에 경화는 열두 살에 이미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1960년 당시 16세, 12세에 불과하던 명화, 경화를 줄리어드 예비학교로 유학 보낸 이씨는 2년 뒤 다른 자녀들까지 모두 데리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음악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애틀 워싱턴대 앞에서 ‘코리아하우스’라는 한식당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뒷바라지했다. 아이들 레슨비를 대기도 빠듯하던 시절, 악기 한 대 값이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었으니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이씨는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먼저 집안 형편을 솔직하게 알리고 어려움도 같이 겪게 했다. 그래야 책임감이 생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레슨이 없는 시간이나 방학 때면 식당에서 서빙과 설거지를 돕곤 했다. 여기에는 “집안이 넉넉한 것 같으면 아이들이 거기에 의지하려 들어 노력을 게을리하는 수가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에는 너무 여유를 부리지 않도록 유념하라”고 했던 아버지의 가르침도 큰 몫을 차지했다. 이씨는 악기를 구입할 때도 현재 가진 돈의 액수를 알려주고 나머지 돈을 어떻게 갚아나갈지 함께 의논했다. 생전 이씨는 악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62년 경화에게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줄 때라고 말하곤 했다. 모녀가 점찍어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당시 돈으로 4만5천 달러나 됐다. 경화는 악기가 마음에 들었지만, 선뜻 사달라고 하지 못했다. 이씨는 ‘벌써 사줬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아팠다. 미국에 이민 오면서 서울에 남겨두었던 식당 ‘고려정’을 팔기로 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결코 손을 대지 않았던 식당이었지만 딸의 재능을 생각하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주문한 바이올린이 나올 때까지 식당이 팔리지 않은 것이다. 지인에게 부탁해 5천만원짜리 보증수표를 구한 뒤 악기상을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지금 5천 달러를 먼저 드리고 앞으로 석 달마다 5천 달러씩 갚아나가면 안 될까요?”
악기상은 “수십 년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지만 왠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며 흔쾌히 받아주었다. 할부금은 이 여사가 갚다가 나중에는 경화가 연주를 해서 갚았다.
“엄마,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했더니 내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 있죠?”
이씨는 딸의 이 한마디로 모든 고생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73년 경화는 다시 빚을 안고 25만 달러짜리 악기를 샀다. 이씨는 ‘저 악기를 들고 다니는 딸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경화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빚을 갚느라 연주 여행을 다닐 때도 일류 호텔을 마다하고 싸구려 호텔을 전전했다.



재능에 투자한 엄마, 노력으로 보답한 아이들
‘천재적 음악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 ‘정트리오’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뒤에 늘 따라붙던 찬사다. 하지만 이씨가 보기에 자녀들의 음악적 성취는 재능보다 노력의 산물이었다. 정경화 역시 호암상 시상식에서 “60년 한국을 떠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세계적인 음악가로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연주를 하면서 한 음이라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10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연습했다”고 고백했다. 바이올린이라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악기를 다루는 만큼, 그 자신이 완벽주의자가 된 것이다. 이씨는 이런 딸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열두 살에 유학을 가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빌려 두 언니와 함께 산 경화는 정말 단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경화의 집에 묵을 때면 밤중에 혼자 일어나 연습하는 그 아이를 자주 본다. 경화는 집 안과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놓고 머리를 가뿐하게 틀어 올리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한다. 새벽까지 연습하던 소리가 끊겨 이젠 그만 자나 보다 하면 잠시 후 다시 바이올린 소리가 나고 한참 있다가 다시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이러기를 몇 번 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곤 했다’고.
그 덕분에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여자라 악기 소리가 작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정경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피나는 노력으로 소리를 키운 것이다.
정경화의 음악 인생에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벤트리트 콩쿠르 수상 이후 세계 정상의 음악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던 무렵, 그는 영국 런던에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다 말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화려해 보이지만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 정상의 자리가 힘겨웠던 것이다. 딸의 눈물을 본 어머니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지금 당장 그만두자. 너를 위해 바이올린을 해야지, 바이올린을 위해 바이올린을 해서야 되겠니? 너는 너무 넘치도록 이룬 거야.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그러니 이제 그만두자.”
정경화는 훗날 “그 말을 듣고 다시는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사실은 그 일을 계기로 내가 얼마나 바이올린을 사랑하는지 깊이 깨닫게 됐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마음을 꿰뚫어 움직이게 하는 남다른 재주가 있으셨다”고 말했다.
이 일은 결과적으로는 정경화가 바이올린에 더 몰입하는 계기가 됐지만 당시 이씨가 딸에게 음악을 그만둬도 좋다고 말한 건 진심이었다. 예술은 의무감이나 강요로만 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마지막 선택은 항상 자녀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명근·명철·명규 등 다른 자녀들 역시 음악을 배웠고 재능이 있었지만 그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은 것도 본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후학 가르치며 어머니의 마음, 사랑 알게 돼
이씨는 교육 비결을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가장 좋은 교육법은 부모도 함께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늘 아이들과 함께 연주회에 다니고 음악을 들으며 그 자신이 아이의 가장 훌륭한 비평가가 되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계발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이씨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을 때 나이가 44세였지만 “지금 영어를 배우면 40년은 더 쓸 수 있다”며 밤을 새워 영어 단어를 외웠다. 84년 경화가 형제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결혼한 뒤에는 67세 나이로 신학대학에 입학해 목사 안수를 받았고, 90년 음악장학재단을 설립해 음악계 후진 양성을 위해 힘썼다.
손가락 부상으로 연주를 접었던 정경화는 2008년부터 줄리어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줄리어드에서도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제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 하면 어딘지도 모르거나, 전쟁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얕잡혀 보이지 않으려 더 악착같이 연습을 하곤 했었죠. 한데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한국 유학생의 수도 늘었고, 재능이 있는 학생들도 많지요.”
그는 무엇보다 음악은 그 시기에 맞는 적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그 시기에 맞게 교육하고 지속적으로 커리어 관리를 해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해주었듯 자신도 특별한 재능을 지닌 한국 아이들을 위한 조력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정경화재단’이라는 비영리 재단을 설립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연주 못지않게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이지만 요즘 그는 그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가르칠 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 힘이 난다고 한다.
“예전에는 연주만이 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누군가의 재능을 찾아주는 것 또한 제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어머니께 받은 무한한 사랑과 가르침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들려주는 Memory of my mother

정트리오의 모친 고 이원숙 여사는 자녀들의 음악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 아낌 없이 후원해 정명화·경화·명훈 남매를 세계적인 음악인으로 키워냈다. 1 3 정트리오 95년 국내 공연, 92년 카네기홀 공연 모습. 2 4 2004년 국내 공연 당시 고 이원숙 여사와 함께 한 모습과 기념 촬영.



참고도서·통 큰 부모가 아이를 크게 키운다(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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