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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뜨거운 열정

이규혁의 아름다운 도전

피겨 슈즈 신은 ‘빙판 위 불사조’

글·구희언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SBS 제공

2011. 07. 15

이 남자 볼수록 매력 있다. 날카로운 눈매와 강한 승부욕이 먼저 떠올라서였을까. 차가울 거라고 생각한 ‘스피드의 제왕’은 예상 외로 뜨거웠다.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규혁 선수 이야기다. 그가 스피드스케이트 슈즈를 벗고 피겨 슈즈를 신었다. SBS 예능 프로그램 ‘김연아의 키스 & 크라이’에 출연 중인 그를 태릉선수촌에서 만났다.

이규혁의 아름다운 도전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실내스케이트장. 푸른색 선수복을 입고 빠르게 얼음을 지치는 국가대표들 가운데 그가 있었다. 이규혁(33)은 아침부터 스피드스케이팅 연습에 한창이었다. 이날 새벽까지 SBS 탄현제작센터에 마련된 아이스링크에서 ‘김연아의 키스 · 크라이’(이하 ‘키스 · 크라이’) 1차 경연을 촬영한 뒤라 지칠 법도 했지만 빙판을 가르는 그의 스케이팅은 여전히 힘찼다.
이규혁은 ‘무관의 제왕’으로 불린다. 13세이던 1991년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1996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500m 세계신기록을 달성하는 등 수많은 세계대회에서 메달을 땄지만, 유독 올림픽에서만큼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까지 모두 5차례 출전했으나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그런 그가 돌연 ‘키스 · 크라이’로 피겨스케이팅에 도전장을 냈다.
그는 지난해 2월 SBS ‘밴쿠버 2010 올림픽센터’에서 제갈성렬 해설위원과 인터뷰하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시 태어나면 힘든 스피드스케이팅 안 하고 피겨스케이팅을 하겠다”고 했다. 당시 인터뷰 이야기를 꺼내자 “피겨스케이팅에 관심은 있었지만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했다.
“김연아 선수 덕분에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에 대한 관심이 커졌잖아요. 가족 절반(어머니와 동생)이 피겨를 해서 저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피겨를 접했어요.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어쩐지 피겨는 스피드스케이팅에 비해 따뜻한 종목으로 보였거든요. 농담 삼아 한 이야기가 현실이 됐네요.”
이규혁의 몸에는 빙상인의 피가 흐른다. 아버지 이익환씨(65)는 스피드스케이팅 전 국가대표, 어머니 이인숙씨(55)는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으로 전국스케이팅연합회 회장이다. 두 사람은 스케이팅 선수 커플 1호이기도 하다. 어머니 이름을 따 그의 외할아버지가 만든 ‘인숙스케이트’는 과거 국내 스케이팅 선수가 즐겨 신던 최고의 브랜드. 정상의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그의 어머니는 피겨 슈즈를 신고 감기약 CF를 찍기도 했다. ‘키스 · 크라이’에서 그에게 피겨를 가르친 이규현씨(31)는 그의 동생이자 피겨스케이팅 코치다.

스피드의 제왕, 오페라의 유령 ‘팬텀’으로 변신
‘키스 · 크라이’의 콘셉트는 또 다른 도전이다. 프로그램 연출을 맡은 김재혁 PD는 첫 방송을 앞두고 출연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피겨에 대한 열망과 피겨를 하려는 이유가 프로그램 취지와 맞는 사람으로 골랐다”고 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들이 또 다른 분야에 도전하려는 정신을 강조한 것. 이규혁은 이 프로그램의 의도에 딱 맞는 캐스팅이었다.
“이번에 촬영하면서 20여 년 동안 제가 한 번도 피겨 슈즈를 신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집에 늘 돌아다니는 게 그거였는데 말이죠. 동생이 피겨스케이팅 국제대회에 나가기는 했지만 이번에 촬영하면서 대단한 선수였음을 새삼 알게 됐어요. 처음부터 의미를 두고 시작하기보다 무언가를 하다가 목표가 생기면 그게 도전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지금 그런 단계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규혁의 부모는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인 아들이 피겨스케이팅을 해보겠다고 하자 그리 반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제가 국가대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칠까 봐 걱정을 많이 하셨죠. 저는 쉽게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우려대로 스케이트 자체가 달라서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첫 공연을 보신 뒤 무척 즐거워하셨어요. 만날 스피드를 내야 한다고 근육을 만들던 아들이 피겨를 하니까 웃겼나 봐요.”
예능 출연을 결심한 계기를 묻자 그는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서 같은 동계 종목을, 그것도 김연아 밑에서 배운다는 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잖아요. 저 개인뿐만 아니라 스피드스케이팅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니까 고민도 하고 거절도 여러 번 했어요. 그러다 제가 이 프로그램에 나오면 스피드스케이팅이라는 종목이 한 번 더 부각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과감하게 출연을 결정했어요.”

이규혁의 아름다운 도전


‘키스 · 크라이’ 예비 경연에서 이규혁은 퀸의 ‘We will rock you’와 ‘We are the champion’에 맞춰 피겨스케이팅을 선보였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 피겨 동작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그의 무대는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후진 기어가 없는 스피드의 제왕답게 그의 스피드는 다른 출연자들을 압도했다.
첫 번째 경연에서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OST에 맞춰 최선영 코치와 커플 연기를 선보였다. 중간 점검에서 여성 파트너와의 스킨십이 쑥스러워서 ‘부동자세’로 뻣뻣하게 굳었던 그는 동생으로부터 “(자세가) 많이 정리됐다”는 칭찬을 듣고 아이처럼 신이 난 모습도 보였다. 화면에는 자막으로 ‘급 신난 몸치 형 이규혁’이라고 떴다. 경연 당일, 그는 헬멧과 몸에 붙는 선수복 대신 하얀 가면을 쓰고 검은 망토를 두른 채 빙판에 등장했다.
“파격 변신을 했죠. 주최 측의 배려로 제 얼굴을 석고로 떠서 제작한 마스크를 쓰고 경연에 임했어요. 방송하는 게 아직은 수줍고 창피한데 주위에서는 굉장히 놀라면서 변화가 있다고 말해요. 재미있게 촬영하고 있어요.”
속도감 넘치는 그의 피겨를 본 시청자는 ‘시원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연스러운 표정 연기와 스핀, 독창적인 리프트와 필수 과제였던 스파이럴을 선보이며 ‘전문 아이스댄싱 선수급 공연’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규혁은 “공연 프로그램은 전부 동생이 짠 것”이라며 “나는 그저 동생의 아바타처럼 움직였다”고 말했다. 그는 훈련 때문에 서로 얼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동생과 이번 방송 촬영을 계기로 모처럼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며 굉장히 가까워졌다고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좀 다혈질이라서 (동생을) 심하게 혼낸 적이 많거든요.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다 보니 몇 년간 풀 기회가 없었어요. 이번 촬영을 계기로 얻은 게 있다면 동생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거예요.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정말 좋았어요.”



피겨스케이팅 코치인 친동생과 함께해 더 즐거워
이규혁은 달변가였다. 다년간의 인터뷰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카메라 마사지’를 받아서였을까. “제가 말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가 어느덧…”이라며 웃던 그는 “인터뷰를 많이 하니까 느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촬영 현장 분위기는 어떨까.
“처음에는 어색하지 않게만 잘 넘기자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스케이트 선수인데 피겨를 열심히 하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열심히 안 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지금은 열심히 하고 있죠. 현장에서 못하면 저 자신에게 창피할 것 같았어요. 누가 잘한다 못 한다보다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응원해 주죠. 동생은 제가 피겨 하는 모습에 희열을 느끼더라고요. 동생한테 칭찬받는 기분도 괜찮았고요.”
그의 매력은 ‘키스 · 크라이’ 미방영 스페셜 영상에서 더 빛난다. 팝송에 맞춰 빙판에서 자유자재로 ‘이규혁 스텝’을 밟는 모습과 동생한테 칭찬을 듣곤 창피해하면서 좋아하는 소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규혁은 탄현과 태릉을 오가면서 피겨와 스피드스케이팅 훈련을 병행한다. 스케이트 선수라는 점에서 조금 더 유리할 것 같았는데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아이유나 서지석씨는 걸음마 수준이었는데 2주 만에 회전도 하잖아요. 얼음 위에서 감각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출연자들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어요.”
김연아 선수는 ‘키스 · 크라이’의 MC 겸 심사위원이다. 천하의 이규혁도 프로그램 안에서는 다른 출연자처럼 키스 · 크라이 존에서 초조하게 자신의 점수를 기다린다. 후배에게 평가받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제 자존심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서의 그것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종목인 피겨스케이팅을 하면서 김연아 선수에게 평가를 받는 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김연아 선수는 동계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평가할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김연아 선수가) 저와 띠동갑이에요. 동갑이라고 막 하더라고요(웃음).”

이규혁의 아름다운 도전

‘키스 & 크라이’ 1차 경연에서 ‘팬텀’으로 변신한 이규혁은 최선영 코치와 ‘오페라의 유령’ OST에 맞춰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



2010년 벤쿠버 올림픽에서 메달을 놓친 후 은퇴를 고려했던 그는 그해 10월 다시 빙상에 섰다. 그리고 보란 듯이 올 1월 세계스프린트선수권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3월 독일에서 열린 2011 세계스피드스케이팅 세계선수권 남자 500m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기세라면 2014년 소치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해 보였다.

올림픽 울렁증 깨고 싶어
“올림픽 울렁증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대회는 다 메달이 있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알겠는데 올림픽만 유독 그래요. 4년 동안 노력한 것을 한 번의 큰 대회에서 평가받아야 하니까 부담되는 것 같아요. 어떤 강심장이 오더라도 긴장하지 않을까요. 다음 올림픽에 나가면 출전 자체가 기록이에요. 여섯 번째 도전이니까요. 그런데 제 목표는 올림픽에 여섯 번 나가는 기록을 세우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빙판의 불사조’의 진짜 은퇴 시기는 언제쯤이 될까.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2014년 올림픽에 재도전하려면 재충전하고 새로운 훈련으로 강하게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선택이 중요해요. 만약 내년에 운동을 한다면 올림픽까지 가겠죠. 그래서 내년에 운동을 할지 안 할지 심사숙고하는 중이에요.”
이규혁은 올해 33세다. 운동선수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 슬슬 체력에 부담을 느낄 시기다. 그가 2014년 올림픽 도전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4년 전만 해도 아직 20대인데 다들 제가 맏형 소리를 너무 일찍 듣는다고 했어요. 외국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은 나이였죠. 지금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저보다 어려요. 메달권에 있는 선수 중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네덜란드의 밥 데용 정도일 거예요.”
물론 때로는 나이가 많은 게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에게는 노련함이라는 무기가 있다.
“스타트가 늦거나 빠르거나, 총을 잘못 쏜다거나 하는 것도 모두 상황의 변화예요. 20여 년간의 선수 생활을 더듬으면 한 번쯤 있음직한 상황이거든요. 돌아가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죠.”
선수 생활은 재미있느냐고 물었더니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예”라고 대답했다.
“만약 스케이트를 타면서 자기 발전이 없으면 재미가 없겠죠.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기술로 1등을 한다면 기쁘기는 해도 재미는 없을 것 같아요. 큰 변화는 아니지만 한 해 한 해 기술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을 느끼는 게 재미있어요.”
선수를 그만두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쉬고 싶다”고 말하곤 웃었다.
“원래 쉬는 걸 좋아해요. 운동하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요. 저는 운동하면서는 운동만 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어서, 만약 선수 생활을 마치면 많은 걸 하고 싶어요. 여행도 하고 공부도 좀 더 하고 여러 가지 해보고 싶어요. 석사과정도 마쳐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심리학 쪽이 궁금해요. 제가 늘 정신적인 부분에서 무너지는 것 같아서. (웃음) 여자친구는 없고 결혼 계획도 아직 없어요. 예전에는 35세쯤 결혼하겠지 생각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이 편하고 좋아요. (선수촌에) 갇혀 생활하다 보니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남들은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시련과 영광 속에서 20여 년을 살았지만 그는 여유롭다.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고 이규혁으로 살 수 있었던 원천이 궁금했다.
“사람마다 가진 고민거리를 큰일이라고 생각하면 큰일이 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게 되는 거예요. 저는 큰일일수록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는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기면 바로 잠을 자요. 얼른 잊으려고 하죠. 그걸로 고민하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자신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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