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이 남자 이야기

두산 코치로 새 출발 조성민의 인생 2막

“그때는 어려서 그 사람 진심 몰라, 아이들만 생각하며 곰처럼 우직하게 달릴 것”

글·김명희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1. 03. 16

조성민이 올 시즌부터 프로야구 두산 2군 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최진실의 전 남편’ ‘비운의 에이스’라는 꼬리표를 떼고 ‘조성민’이라는 진짜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곰같이 우직하게 살다보면 자신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도 언젠가 거둬질 거라 믿는 이 남자의 속마음을 직접 들어봤다.

두산 코치로 새 출발 조성민의 인생 2막


조성민(38)에 대한 첫 기억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자가 스포츠신문 야구부에 근무하던 시절, 그는 당시 연인이던 최진실과 함께 결혼 인사차 신문사를 방문했다. 조성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일본의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거물 투수였고, 최진실은 ‘만인의 연인’으로 한창 주가를 올릴 때였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선남선녀 커플에게선 광채가 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말로 치달았다. 별거와 이혼공방, 최진실의 자녀 성 변경 신청과 자살, 그 이후 불거진 친권 논란까지. 마치 비극으로 달려가는 폭주기관차 같았다. 최진실이 세상을 떠난 지금, 홀로 남은 기관사 조성민은 무슨 생각을 할까.
11년 만에 조성민을 다시 만났다. 그는 지난 2월부터 두산 2군 재활코치로 새로운 야구 인생을 시작했다. 결혼 인사를 왔던 그 순간처럼 빛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새로 갈아입은 곰돌이 유니폼이 썩 잘 어울렸다.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하나라도 더 노하우를 전해주려는 모습에서 야구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그는 처음에는 기자를 경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소나마 편안해 보이는 건 상처가 무뎌졌기 때문이 아니라 참고 견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희(10)·준희(8) 두 아이의 아빠로,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

“야구도 인생도 겨울 지나고 다시 찾아온 봄”
조성민의 야구 인생은 아쉬운 점이 많다. 불행했던 개인사와 부상으로 미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비운의 에이스이기 때문이다. 서울 둔촌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야구공을 잡은 조성민은 고교 시절 임선동 손경수와 함께 고교 최고 트로이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메이저리그에서 뛰다가 최근 일본으로 옮긴 박찬호보다도 한 수 위였다. 96년 한국 선수 최초로 일본 요미우리 구단에 입단한 그는 훤칠한 외모로 많은 팬을 몰고 다녔다. 98년 7승을 올리며 ‘꿈의 무대’라는 올스타전에도 등판했다. 하지만 올스타전에서의 무리한 투구로 팔꿈치 부상을 당하고 후반기에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초라하게 마감하고 2002년 한국에 들어왔지만 이듬해 드래프트가 무산되면서 야인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5년 김인식 감독이 지휘하는 한화에서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 3시즌 동안 3승4패의 성적을 거두고 은퇴했다. 하지만 야구판에서 인심을 잃지 않고, 또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선배들 덕분에 두산에서 코치로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 코치로서 소감이 어떤가요?
“첫날이니까 선수들이 어느 정도인가 파악하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기존 코칭스태프가 어떤 것을 추구하면서 가르치고 있나, 그런 것들을 눈여겨보고 있어요. 분위기 파악하고 있는 거죠.”
▼ 코치로 새 인생을 시작한 만큼 포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해야겠다는 포부보다는 희망사항이 있다면 올해 두산이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요.”
▼ 코치로 발탁되는데 두산 김경문 감독이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자주 뵙지 못하다가 지난해 말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감독님이 좋게 보셨는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같이 일해보자’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지 몰랐어요.”

▼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 거죠?
“세 번째죠. 첫 번째는 일본 요미우리에서, 두 번째는 한화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니까요.”
▼ 1, 2, 3기를 평가한다면.
“일본에서가 봄날이었고, 한국 들어와서는 저물어가는 가을이랄까, 마지막으로 빨갛게 한 번 물들었다가 우수수 낙엽이 떨어졌죠. 지금은 코치로서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 겨울 지나고 봄이 다시 왔다고 해야 하나.”
▼ 본인도 요미우리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 부상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재활하는 선수에게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마음의 여유가 가장 중요해요. 조급한 마음에 재활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고 서둘러 복귀하면 부상이 재발하고 그럼 재활 기간이 더 길어지거든요. 처음 부상을 당했을 때 제대로 치료해야 선수 생명이 길어져요. 제 경우에도 시즌 초 부상을 당한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내가 왜 여기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존심 때문에라도 빨리 1군에 복귀해서 던지고 싶다는 생각에 욕심을 부린 게 결국 선수 생명을 단축한 원인이 됐던 것 같아요.”
▼ (기자가 조성민을 찾아간 날, 스포츠신문 1면에는 일본 오릭스 박찬호의 근황이 보도됐다) 고교 시절 함께 활동했던 박찬호 선수는 일본으로 옮겨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와 비교하면 속상할 것도 같아요.
“비교는 안 해요. 사람이 어떻게 한결같은 인생을 살 수 있겠어요. 잘 살다 못 살기도 하고, 못 살던 사람이 잘 살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야구 인생이 빨리 끝나는 사람이 있고, 그 반대도 있고…, 운명이죠.”
▼ 선수 시절 자신에게 점수를 준다면.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겠지만 선수로 뛰던 시기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노력을 많이 했다고 자부해요.”
▼ 오늘 연습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던가요.
“전혀. 저는 한국에서 다시 야구를 시작하면서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보단, 1군 마운드에서 공 하나라도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화 때 성적이 그렇게 좋았던 건 아니지만 공 하나보다는 많이 던졌으니까, 그리고 야구선수 조성민이라는 이름을 어느 정도 되찾았으니까 그걸로 만족해요.”
▼ 야구선수 조성민이라는 이름을 영영 잃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었나요.
“야구선수 조성민보다 다른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으니까 제 이름을 찾고 싶었던 거죠.”



두산 코치로 새 출발 조성민의 인생 2막


최진실과 결혼식 축가가 휴대전화 연결음
한때 조성민의 부성(父性)을 의심한 적이 있었다. 최진실이 둘째를 임신했을 때 이유가 어쨌든 별거를 한 건 남자 쪽 책임이 더 커 보였다. 2004년 이혼을 할 때 전처에게 친권·양육권을 다 넘겨준 것도 아빠로서 무책임해 보였다. 2008년 최진실이 법원에 아이들의 성을 바꿔달라는 자녀 성 변경 신청을 냈을 때도 조성민보다 최진실의 처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조성민은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모르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처지를 구구절절 해명하지 않았던 건 “사람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입을 열수록 그의 이야기는 부메랑이 돼 자신을 찔렀다는 것.
2008년 10월 최진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3일 내내 빈소를 지키는 그에게서 진심이 느껴졌고 이후 아이들과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부성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조성민은 틈나는 대로 아이들과 만난다. 그 자신은 여느 아버지와 똑같다고 했지만 아이들을 떠올리는 표정이나 말투에서 애틋함이 묻어났다. 아이들 외할머니와도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오직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만을 고민한다.

▼ 요즘 야구 영화 ‘글러브’가 화제입니다. 영화 봤나요.
“제가 극장에 안 가요. 인터넷TV 같은 데 올라오면 볼까. 사람이 많이 몰리는 데는 싫더라고요.”
▼ 원래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나요.
“야구장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내 집 같아 괜찮은데 그 이외의 장소는 좀 그래요.”
▼ 몇 년 전부터 휴대전화 통화연결음(컬러링)을 바꾸지 않고 있는데, 어떤 노래인가요.
“기미토나라(‘그대와 함께라면’이라는 뜻의 일본 노래)라는 축가예요.”
▼ 제목도 그렇고, 몇 년씩 쓰는 걸 보면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제 결혼식 축가였어요.”
▼ 어떤 결혼식?
“제가 결혼식은 한 번밖에 안 했어요. 더 이상은 노코멘트입니다.”
▼ 아이들은 자주 만나나요?
“야구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왜 아이들 이야기를(웃음). 가끔 만나요. 엊그제도 저희 어머니 생신이라 부모님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식사했어요.”
▼ 아이들이 아빠를 많이 닮았더라고요.
“큰아이는 저를 많이 닮았고 둘째는 엄마를 닮았어요. 덩치는 큰데 하는 짓이나 손발을 보면 엄마와 똑같아요. 얼굴도 엄마 닮아서 점점 예뻐지는 것 같아요.”

두산 코치로 새 출발 조성민의 인생 2막

1 생전 최진실과 아이들. 2 고 최진영의 49재에 꽃을 들고 찾아온 아이들. 3 준희가 그린 엄마 최진실.



▼ 지금은 외할머니가 키우지만, 언젠가는 조성민씨가 데려와서 키워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억지로 되나요. 여건이 안 되면 못하는 거고, 그럴 기회가 되면 키우는 거고…. 이제는 여기저기 부딪혀가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좋게 지내려고 노력하죠.”
▼ 가끔 환희와 야구를 한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야구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인지, 썩 재밌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래도 던지는 데는 재능이 있어요. 마구잡이로 던지는 것 같은데 공에 힘이 있더라고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예요.”
▼ 만약 환희가 커서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하면?
“저야 대환영이죠.”
▼ 운동선수 생활이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그럼에도 환영인가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나요? 아이가 운동을 좋아하고 열심히 한다면 저는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생판 모르는 일을 하면 관심을 가져줄 수 없지만 야구는 제가 가장 잘 아는 일이니까 조언도 해줄 수 있잖아요.”
▼ 지금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엄마도 없고, 의지하던 삼촌도 세상을 떠나고. 미안한 점이 많을 텐데.
“미안하기보다 좋은 아빠가 되려고 하는데 어려운 점이 좀 있어요. 무작정 감싸면 안되는 걸 알지만 가끔 만나는데 혼을 낼 수도 없고. 부모는 아이들이 잘하는 거, 잘못하는 거 다 눈에 보이잖아요. 밥도 잘 먹으면 좋겠고…. 그런 걸 조절하기 힘들어요.”
▼ 아이들이 아빠를 좋아하나요.
“글쎄, 모르겠어요. 만나면 ‘놀아달라’고 못살게는 구는데 아이들 속마음을 정확히는 모르니까. 분명한 건 점점 더 나아지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 최진실씨가 교육열이 상당했었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엄마가 있었으면 그 녀석들 지금쯤 공부하느라 정신없었을 거예요(웃음). 지금은 그 역할을 할머니가 해주시는데 아무래도 젊은 엄마들보다 힘이 부치시죠.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트렌드가 있으니까 할머니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다른 학부모들한테 조언을 많이 들으시는 것 같아요.”
▼ 아이들 성격은 어떤가요.
“환희는 숫기가 없는 반면 준희는 활달하고 뭐든 적극적이에요. 고집 센 거 빼곤 둘 다 착하고요.”

두산 코치로 새 출발 조성민의 인생 2막

2008년 10월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조성민은 장례식 내내 최진실의 곁을 지켰다.



▼ 고집 센 건 누굴 닮은 건가요?
“엄마 아빠 다 닮았죠(웃음).”
▼ 최진실씨 생전에 친하게 지냈던 이영자 정선희 홍진경씨 등은 지금도 아이들을 많이 챙기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네, 여전히 잘 해주는데 요즘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기보다 아빠의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해요. 고마운 일이죠.”
▼ 2004년 이혼 이후 언론에 최진실씨는 결혼생활에 미련이 있었던 걸로 비쳐졌어요. 조성민씨가 대중에게 더 미움을 받은 이유죠.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저는 그때 그렇게(최진실이 자신에게 미련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아이들 엄마가 그렇게 되고 나니까 진심이 느껴지더군요.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 당시에는 제가 공격을 많이 받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해봐야 산에다 소리 지르는 것밖에 안 됐어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메아리로 돌아올 때는 이상하게 오니까.”
▼ 왜 사람들이 조성민씨 이야기를 왜곡해서 듣는지, 그 부분은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제가 잘못한 것도 있을 것이고, 말씀드리기 곤란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사람들이 조성민씨에 대한 오해를 푼 계기가 된 게 최진실씨 빈소를 지킬 때였던 것 같아요. 반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3일 내내 우직하게 빈소를 지켰죠. 그때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그날 느낀 게 많아요. 그 사람이 가면서 정말 많은 걸 알려줬어요. ‘싸우면서 사는 게 다 부질없구나’라는. 미안한 마음도 많았고 ‘이렇게 갈 거면서’라고 원망도 많이 했어요.”

“이제는 부딪혀가며 살고 싶지 않다”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아깝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런 후회스러운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조성민은 특히 그럴 것 같다. 지상 1백층에서 지하 17층까지 롤러코스터를 탔던 그는 이제 인생 수업료를 톡톡히 치르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아직 자신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야구 경기로 말하면 이제 겨우 5회 초. 아빠로, 지도자로 9회 말 멋진 역전 홈런을 칠지 누가 알겠는가.
▼ 인생의 어떤 시점으로 돌아가 되돌리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저는 되돌리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아요. 대학 때로 돌아가서 일본이 아니라 메이저리그로 갔더라면, 올스타전에 등판해 부상을 당했을 때 고집부리지 말고 바로 마운드에서 내려왔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 했더라면 또 무슨 일이 생겼을지 누가 알겠어요.”
▼ 결혼은 되돌리고 싶지 않나요.
“결혼 자체보다 결혼생활에서 조금 더 서로 이해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이런 상황까지는 안 왔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어요. 그때는 부부가 어떤 건지도 몰랐고, 왜 상대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하나라는 원망밖에 없었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저는 어린아이였던 것 같아요. 남들 눈에도 어리고, 어리석게 보였겠죠.”
▼ 둘 다 톱스타였기 때문에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상대가 자신을 챙겨주기만을 바랐던 거 같아요. 당시 저는 수술을 하고 재활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아이들 엄마가 저를 더 챙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고, 아이들 엄마도 대접받으면서 살아왔는데 제가 그만큼 대접해주지 않으니까 섭섭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그거고, 아이들 엄마 인간적으로는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두산 코치로 새 출발 조성민의 인생 2막


▼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른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나요.
“네.”
▼ 지금 최진실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빠 노릇을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최선을 다할 거라고.”
▼ 어느덧 서른여덟 살입니다. 누구보다 많은 일을 겪었는데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많은 걸 잃었고 많은 걸 얻었죠. 일단은 그 전까지 만들어놓은 ‘조성민’을 잃었고, 최초로 만들었던 가정을 잃었고, 사람을 잃었고…. 아이들 엄마도, 주변 사람도 많이 잃었어요. 상황이 안 좋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 정리가 되더라고요.”
▼ 잃은 것들이 너무 소중한 것들이라 마음이 아프네요. 그래도 조성민이라는 이름은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걸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어요. 아직 다는 못 찾았는데 많이 좋아졌어요. 1년 전에만 만났어도 이렇게 인터뷰 못했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마음에 칼날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 그렇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시간이 지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고 자꾸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마음이 편해지고 주변 상황도 점점 좋아졌어요. 아이들, 외할머니와의 관계도 그렇고….”
▼ 얻은 게 있다면.
“사람이 살면서 이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저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구나라는 것. 나를 너무 많이 내보이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고요.”
▼ 조성민씨의 살아온 여정을 보면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 상황을 우직하게 이겨냈어요. 그런 성격 때문에 살면서 손해도 많이 봤을 것 같은데.
“‘당장은 손해 보더라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진심을 알아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그렇게 사니까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고 그러면서 또 이런 자리에도 오게 된 것 같아요. 그런 건(우직함은) 통한다고 봐야죠.”
▼ 여전히 조성민씨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인터넷 악플 같은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상처를 받나요.
“‘아직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죠. 아이들 엄마가 그렇게 되면서 느낀 게 있어요. 그때 안티팬들이 좀 많았어요. 그런데 아이들 엄마가 그렇게 되고 나니 악플을 다는 사람보다 슬퍼하는 사람들이 백 배, 천 배는 많더군요. 그 일을 통해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는 아니구나. 이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실제로는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악플 1백 개 가운데 제 마음을 알아주는 글이 한 개라도 있다면, 그걸로 위안이 돼요.”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