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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꼬마 미술가

아홉 살에 첫 개인전 연 권세진

“발달장애 있지만 학급에선 인기남으로 통해요”

글·정혜연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2011. 02. 17

도로 위 수많은 자동차,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 빌딩 위 형형색색의 상호들이 모두 미술의 소재가 된다. 아스퍼거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홉 살 권세진군은 남다른 예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펜 드로잉·유화·점토공예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든다. 네 살 때부터 만든 작품을 가지고 첫 개인전도 열었다.

아홉 살에 첫 개인전 연 권세진


똘망똘망한 눈망울에 세상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보통 사람들에겐 일상이 된 대중교통수단, 도시 마천루 속 수많은 상호 등이 아홉 살 권세진군에게는 모두 작업의 소재가 된다. 올해로 미술을 시작한 지 5년째. 권군은 펜 드로잉·유화·점토공예 등 그동안 작업한 작품들을 모아 경기도 용인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1월 중순, 기성작가들로부터 “천재적인 미술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권군과 가족을 만났다. 그의 어머니 최경임씨(45)는 “세진이는 네댓 살부터 원근감과 입체감을 표현하는 등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다”고 말한다.
“세진이가 네 살 때 스케치북을 사줬는데 하루 종일 빠져 있을 정도로 그림 그리며 노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 세진이가 그려놓은 종이를 살펴보다가 신기한 걸 발견했어요. 아이들은 보통 사물을 표현할 때 2차원적으로 그리는데 세진이는 3차원적으로, 그러니까 입체적으로 표현하더라고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런 능력은 10세 전후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던데 세진이는 그런 쪽으로 확실히 감각이 있었죠.”
다섯 살쯤 되자 세진이는 자동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후 한동안은 자동차만 잔뜩 그렸다. 그런데 자동차의 한 면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왼쪽 옆모습, 윗모습, 오른쪽 옆모습을 이어서 평면도형으로 그렸고 이를 가위로 오린 뒤 차 모형처럼 이어 붙이려는 시도를 했다고. 약간의 오류로 자동차 모형은 탄생하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입체모형 만들기를 스스로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권군은 대중교통수단을 그릴 때도 입체감각을 활용해 표현했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타면 항상 뚫어지게 살펴보더라고요. 집에 와서 본 것들을 그리는데, 투명버스를 본 것처럼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부터 버스 뒤편 사람들까지 세밀하게 표현했죠. 저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보통 어른들도 그리기 힘든 걸 아이가 공간감각을 활용해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걸 보고 재능이 있다는 판단이 들었죠.”
최씨는 권군의 재능을 키워주려고 미술 관련 기관들을 찾았고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 아이들을 위한 미술 수업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곳에서 권군은 체계적인 미술 수업을 받을 수 있었는데 처음 배운 도예와 점토공예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이를 눈여겨본 미술관 관장은 권군의 부모에게 개인전을 제안했고 4년 동안 만든 많은 작품 중 수십여 점을 전시하게 됐다.

또래보다 자기 세계 강하지만 일상 생활 무리 없어

아홉 살에 첫 개인전 연 권세진


진눈깨비가 온 세상을 덮었던 인터뷰 당일, 권세진군은 추운 줄도 모르고 미술관 마당을 뛰어다니며 장난을 쳤다. 웃음소리가 씩씩한 여느 아홉 살 남자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실 권군은 아스퍼거증후군을 앓고 있는 발달장애아. 아스퍼거증후군은 사회적으로 대인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관심분야와 행동이 한정돼 있으며 같은 양상을 반복하는 증세를 보이는 질환이다. 어머니 최씨는 권군이 생후 20개월에 접어들 무렵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병원에 갔더니 아스퍼거증후군이 의심된다고 하더라고요. 나이가 어릴 때는 확실하게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며 지켜보자고 했죠.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달라지는 점이 없어 현실을 받아들였어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약간 다른 부분은 있지만 학습적인 면에서 무리 없이 따라가고 있어요. 다만 자기 세계가 강하다 보니까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 부분에서 좀 아쉬운 측면이 있죠.”
새 학기가 시작되면 권군은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 3학년이 된다. 이 학교는 각 반에 장애아동을 한 명씩 배정, 통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통합교육이란 일반학생이 장애아동과 수업을 받으며 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자연스레 익히도록 하고, 장애아동도 마찬가지로 일반학생과 지내는 법을 익히며 사회적인 능력을 쌓도록 가르치는 것. 복지가 발달한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행해지고 있는 수업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시행되는 추세인데 장애아동과 일반학생의 부모 모두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작년 말 세진이가 학우들이 선정해서 주는 ‘재치 상’을 받아왔어요. 한 해 동안 친구들을 가장 많이 웃게 해준 사람에게 주는 상을 자신이 받았다며 기뻐하더라고요. 하루는 아이들이 영어로 발표를 하는 데 학부모들이 초대돼 다 같이 보러 갔어요. 원래 세진이가 무대 체질이긴 한데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던지 신나게 발표를 하고는 ‘지금까지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어요. 그 엉뚱함에 모두들 웃더라고요. 담임선생님 말로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대요(웃음).”
학급 친구들은 권군을 장애우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권군이 한글을 일찍 습득했고 영어 실력 또한 또래 아이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아홉 살에 첫 개인전 연 권세진

권세진군은 네 살 무렵부터 사물을 표현할 때 입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네 살 무렵 한글 비디오를 보던 세진이가 화면에 나온 ‘오이’라는 단어 중 ‘이’를 스케치북에 썼어요. 좌우가 바뀐 ‘ㅣㅇ’였지만 며칠 뒤 바르게 썼고 이후로 한글을 그림처럼 따라 그리면서 모두 스스로 익혔죠. 점차 책을 읽어달라는 횟수도 늘었는데 제가 소리 내서 읽은 발음과 글자를 일치시켜 뜻도 정확하게 인지해나갔어요. 영어도 마찬가지로 명함이나 은행 간판의 로고 같은 걸 그대로 베껴 익힌 뒤 알파벳의 소리와 뜻을 알려주자 자연스레 습득했죠.”
지앤아트스페이스 벽면을 빼곡히 채운 권군의 그림 속에는 많은 영어 단어가 적혀 있는데 이는 모두 뜻을 정확히 알고 써 넣은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초 온 가족이 미국에서 3주간 체류할 때도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암기 능력과 시각적 인지능력이 뛰어난 권군은 이를 토대로 자신만의 예술 영역을 차근히 확장해나가는 중이다.
“세진이가 가진 능력은 놀라울 정도예요. 아이들에게 흙과 함께하는 점토공예가 좋다고 해서 기회를 줬더니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여러 작품을 만들어냈죠. 변기와 비데를 사실적으로 재현해내고, 성경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요압 장군과 전래동화 속 사또를 상상해서 만드는 걸 볼 때면 감탄하게 돼요.”

무궁무진한 상상력 지닌 아이

아홉 살에 첫 개인전 연 권세진


권세진군의 소원은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미술이 훨씬 좋기 때문에 하루빨리 커서 미술만 하고 싶다고. 그런 권군의 바람을 조금이나마 실현시켜주기 위해 그의 부모는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권군은 요즘 넓은 마당과 거실에서 마음껏 작품을 만든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는 아이가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을 하다 보면 집이 망가지니까 한계가 있었어요. 세진이에게 화실을 꾸며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이사를 했죠. 어찌나 즐거워하며 작품을 만드는지 이사 후 만든 것만해도 집 안 가득 쌓였을 정도예요.”
권군의 가족은 이외에도 미술 작업에 도움이 될 만한 여행을 자주 다닌다. 지난해 연말에는 강원도 정선 한 리조트로 여행을 떠났다. 가는 길에 횡성을 들러 한우를 구워 먹고 눈썰매를 실컷 탄 뒤 집으로 돌아왔다고. 이후 권군은 또 하나의 기발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날따라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신기하게 지켜보던 세진이가 ‘스키 타는 한우’를 유화로 그렸어요.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들을 기억해뒀다가 작품으로 만드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그래서 세진이는 차를 탈 때도 꼭 운전자 옆 보조석에 앉아요. 늘 보던 도로, 신호등, 버스, 빌딩일지라도 상상력을 가미해 새롭게 창조를 하죠. 소재가 떨어질 법도 한데 무궁무진하게 작품을 만들어낼 때면 가끔은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지?’ 싶어요.”
권군의 관심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그의 아버지가 수업 준비를 위해 파워포인트로 작업하는 걸 본 권군은 이를 가르쳐달라며 졸랐고 딱 한 번 배운 뒤부터는 알아서 사용하고 있다. 한동안 권군은 자신이 좋아하는 상표나 그림을 파워포인트로 뽑아 프린트기로 출력한 뒤 이를 그리는 일에 빠졌다. 이후에는 ‘차르륵 차르륵’ 소리를 내며 종이를 뿜는 프린트기에 매료됐고 최근에는 찰흙으로 여러 가지 모양의 프린트기도 만들었다.
“아이가 ‘다음 개인전에는 프린트기를 전시할 거예요’라고 말해서 한참을 웃었어요. 다음 개인전을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데 말이죠(웃음).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세진이는 우리 부부가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앞서나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펜 드로잉, 유화, 도예, 점토공예 등 다양한 작업을 하지만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지, 미술 분야에서 성공을 할지조차 모르기에 걱정을 했거든요. 이제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어요. 세진이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충분히 행복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앞으로도 세진이가 지금처럼 즐겁게 작업하며 행복한 사람으로 컸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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