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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계절 맞춤여행

기찻길 연인과 도란도란 걷기

옛 중앙선 팔당역~운길산역

글·김화성 사진·서영수

2011. 02. 07

기찻길 연인과 도란도란 걷기


사랑은 평행선이다. 기찻길이다. 기찻길은 결코 마주보며 가지 않는다. 앞을 똑바로 보고 나란히 간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게, 딱 그 거리만큼 떨어져 간다. 너무 사랑한다고 두 길이 하나가 되면 기차는 가지 못한다. 싫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도 기차는 달리지 못한다.
철선과 철선 사이의 공간은 절대고독의 공간이다. 절대 자유의 공간이다. 혼자 있어야 비로소 영혼은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운 영혼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외로움이다. 외로우니까 사랑이다. 그렇다. 외로우니까 인간이다. 두발 달린 짐승이다. 외로워서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다.
두 줄기 기찻길은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헤어질 수도 없다. 좋으나 싫으나 나란히 갈 수밖에 없다. 두 기찻길은 가상의 소실점에서 만날 뿐이다. 소실점은 눈 앞 저 멀리 하나가 되는 점이다. 그것은 신기루다. 하지만 그 신기루가 두 줄기 기찻길을 이끌고 간다. 소실점은 가도 가도 영원히 앞에 있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게 인생이고 운명이다.

8.8km 기찻길 깔깔대며 걷는 맛

기찻길 연인과 도란도란 걷기


경기 남양주 팔당에 가면 옛 중앙선 폐철로가 있다. 팔당역~능내역~운길산역 옛 기찻길이 바로 그곳이다. 옛 팔당역사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2008년 중앙선을 복선화할 때 굽은 철로를 곧게 펴면서 남은 흔적이다. 철로는 이제 녹이 잔뜩 슬었다. 나훈아의 가요 ‘녹슨 기찻길’이 저절로 떠오른다. 철길에 밴 역청냄새도 이미 사라졌다.
기찻길은 열차 쇠바퀴의 담금질로 젊어진다. 철커덕철커덕 쇠바퀴소리를 들어야 윤이 자르르 흐른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은 한순간에 늙는다. 직장에서 떨려난 사내들의 얼굴이 몇 달 만에 팍삭 늙어버리는 것과 같다. 쇠는 잠시라도 담금질하지 않으면 바스라진다.
옛 팔당역~운길산역까지 기찻길은 약 8.8㎞ 거리다. 이 중 옛 팔당역~능내역까지가 5㎞이다. 노닥거리며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옛 기찻길은 이제 열차 대신 사람들이 걷는다. 팔당역에서 운길산역 쪽으로 걷는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많다. 방한 옷차림도 거의 검은색 계통이다. 반대로 운길산역에서 팔당역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은 젊은 남녀들이 많다. 울긋불긋 옷차림이 싱그럽다.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걷는다. 깔깔대거나 수다를 떨며 기찻길을 따라 간다. 마치 시냇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들 같다. 소풍 가는 동심이다. 문득 어디선가 누렁이가 나타나 터벅터벅 기찻길을 따라 간다. 도대체 쟤는 어디로 가는 걸까.
옛 기찻길은 한강을 따라 간다. 산과 강 사이에 기찻길이 있다. 기찻길 곳곳에 전망용 데크가 있다. 그곳에 앉아 한강과 그 너머 첩첩 산줄기 선들을 바라보면 아슴아슴하다. 전망 데크에는 반드시 다산의 시구가 2개씩 붙어 있다.
‘고향집은 여기서 8백리/맑거나 비 오거나 같은 거린데/ 맑은 날은 가까운 것만 같고/비 오는 날은 멀게만 느껴지네’ ‘서풍은 집을 지나오고/동풍은 나를 지나가네/불어오는 소리만 들릴 뿐/바람 이는 곳은 보이지 않네’
기찻길 침목은 촘촘하다. 침목 간격대로 걸으면 종종걸음을 치게 된다. 그렇다고 침목을 하나씩 건너뛰며 걸으면 간격이 멀어 폴짝거려야 한다. 걸음걸이에 맞추려면 침목 한 칸 반이 딱 맞다. 그러려면 어느 한쪽 발은 침목 사이를 내디뎌야 된다. 결국 침목과 발걸음은 엇박자일 수밖에 없다. 불편하다. 마침 쌓인 눈이 침목과 침목 사이의 골을 메워줘 조금 낫다. 가끔 외줄 철길 위를 체조선수처럼 걸어본다. 몸이 갸우뚱거린다. 균형 잡기가 쉽지 않다. 사는 것도 그럴 것이다. 날마다 외줄을 타며 용케 견뎌왔다.



기찻길 연인과 도란도란 걷기

1 옛 중앙선 봉안터널 구간을 걷고 있는 여행객들. 2 왼쪽 운길산역 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청춘남녀가 많고, 오른쪽 팔당역 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유난히 어르신이 많다. 왜 그럴까? 3 2005년에 폐쇄된 능내역 대합실. 4 카페 ‘봉주르’ 입구를 지키고 있는 조각상.



기찻길 연인과 도란도란 걷기


보리밥으로 마음에 점 찍고 또 걷다
팔당댐 부근에 봉안터널(250m)이 있다. 봉안터널 아래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그 유명한 보리밥집 ‘시골밥상’이다. ‘마음에 점찍기(점심)’에 안성맞춤이다. 터널 안은 은은한 조명이다. 사람이 지나가면 자동으로 불빛이 밝아진다. 터널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철길 위로 푸른 하늘조각이 반공중에 걸려있다. 사람들 말소리가 우렁우렁하다. 터널 기찻길 침목에는 연인들의 낙서가 눈에 띈다. ‘사랑해 ×××’류가 대부분이다. 유치찬란하다.
기찻길 옆에는 오막살이만 있는 게 아니다. 밥집과 주막집이 있고 소나무가 있다. 봄여름 가을에는 개나리와 배롱나무꽃 해바라기 코스모스가 반긴다. 요즘은 깨벗은 국수나무가 황갈색 줄기를 치렁치렁 드리우고 있다. 낭만카페 ‘봉주르’는 1982년 대학로에서 문을 열었던 장안의 소문난 카페다. 1992년 지금의 남양주 기찻길 옆으로 이사와 자리를 잡았다. 입구엔 조각가 김원근의 우스꽝스런 조각이 서 있다. 조각상은 보리알갱이 같이 퉁퉁하고 둥글둥글하다. 보면 볼수록 정겹다. 시멘트 조각에 색을 칠한 것이다.
기찻길은 평행이다. 가도 가도 아스라하다. 하얀 눈 더미위에 검붉게 삭은 두 줄기 철길이 뻗쳐나간다. 가물가물 한 점의 소실점이 된다.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얼굴을 파고든다. 능내리 연꽃마을의 연못엔 말라비틀어진 연잎사귀만 바스락거린다. 목쉰 바람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기찻길 연인과 도란도란 걷기


왜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는 잠만 잘 잘까. 기차소리 요란한데 어떻게 새근새근 잘도 잘까. 찢어지게 가난한데도 어떻게 깨지 않고 단잠을 잘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엄마 아빠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랑이 소음을 막아줄 것이다. 가난도 한순간에 날려 버릴 것이다.
팔당댐 위쪽 강물은 입을 앙다물고 있다. 팔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에 여덟 개의 당(堂)을 지어 놀았다는 팔당(八堂). 이곳 토박이들은 팔당이라 하지 않고 ‘바댕이’라고 부른다. 팔당이 바댕이로 변한 것이다. 팔당댐 위는 꽁꽁 얼어붙었고, 그 아래는 물이 흐른다. 고인 물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얼어붙은 물엔 새들이 살지 못한다. 왜가리, 큰고니, 청둥오리는 댐 아래에서 먹이를 찾는다. 팔당대교를 사이에 두고 하남 검단산과 남양주 예봉산이 마주보고 있다. 산과 산 사이에 강물이 흐른다. 겨울강물은 쫄쫄 흐른다.
다산은 아들 여섯에 딸 셋을 낳았지만, 네 아들과 두 딸은 요절했다. 다산의 가슴에 자식 여섯을 묻었다. 두 아들과 딸 하나만 제대로 살아남았다. 다산은 죽기 사흘 전 유작시를 지었다.
‘육십년 세월 잠깐 사이 흘러가/복숭아나무 봄빛 신혼 때와 같구나//생이별이나 사별은 모두 늙음을 재촉케 하나니/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네//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다정하고/지난 유배시절 임의 치마폭에 쓴 먹 흔적 남아있네//헤어졌다 다시 만난 우리 부부가/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주노라’

[ 여행정보 | 능내역과 다산 유적지 ]
살얼음 걷듯 조심하며 고향 마재에 은둔했던 정약용

기찻길 연인과 도란도란 걷기


남양주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도시다. 다산은 옛 경춘선 능내역에서 1km 떨어진 마현리(馬峴里)에서 태어났다. 그곳엔 다산과 그의 부인 풍산 홍씨(1761~1838)의 합장묘가 있다. 기찻길을 따라 가다가 옛 능내역에서 한강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다산은 열네 살인 1776년 봄, 한살 위인 홍씨와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 60주년 기념일인 1836년 봄에 눈을 감았다. 부인 홍씨는 다산이 죽은 지 2년 뒤 78세의 나이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다산은 “내가 죽으면 우리 집 뒷동산에 묻고 지사(地師)에게 물어보지 말라”고 유언했다. ‘명당이니 뭐니 그런 것 따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마재엔 복원된 다산생가(여유당·與猶堂)와 그의 사당 문도사(文度詞), 다산동상, 다산기념관 등이 있다. 여유당은 다산이 서른여덟 때(1800년 봄)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 마재에 은둔하면서 지은 당호이다. ‘여유(與猶)’는 노자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여(與)’는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 조심하라’는 뜻이다. ‘유(猶)’는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살얼음 건너듯 모든 것을 살피고 조심하면서 살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다.
다산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산이 낙향한 그해 여름에 정조 임금이 죽었다. 다산의 유력한 후원자가 사라진 것이다. 결국 다산은 그 이듬해(1801년 2월) 하옥돼 기나긴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다산은 고백한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가 없다.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가려서 할 줄 모른다. 정에 끌려서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맘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한다.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두지 못한다.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 또한 운명일까.”
능내역은 2005년 4월1일 폐쇄됐다. 옛 중앙선에 기차가 다닐 때도 문 닫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대합실 문은 꼭 잠겨 있다. 유리창 너머로 열차시간이 적힌 안내판만이 쓸쓸하게 걸려 있다. 유리창엔 마지막 안내문이 아직까지 붙어 있다. ‘출입통제-2005년 4월1일부터 능내역이 무배치간이역(무인역)으로 개편되오니 대합실(맞이방) 출입문을 통제하며 기존 통로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능내역장’
기찻길 입구 팔당역이나 운길산역이나 옛 기찻길 입구 찾기가 쉽지 않다. 팔당역에서는 옛 팔당역사 쪽으로 2km쯤 더 올라가야 한다. 팔당역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지난 조개울에서 예봉산장 길을 따라 가다보면 무인철도 건널목이 나타난다. 바로 그곳이 출발점이다. 그냥 길을 따라 옛 팔당역사 쪽으로 쭉 올라가도 된다. 가다보면 왼쪽에 동태음식전문점 ‘와카리’와 카페 ‘티나세’가 있는데 그 뒤쪽이 기찻길 시작점이다. 도로 벽에 ‘추억의 기찻길산책’이라는 현수막이 있다. 운길산역에서는 장어집이 있는 한강(진중삼거리)쪽으로 내려와 길을 타고 500m쯤 가다보면 오른쪽에 끊어진 기찻길이 보인다.
교통 중앙선 전철 용산~이촌~옥수~왕십리~청량리~회기~구리~도농~양정~덕소~도심~팔당~운길산. 팔당역이나 운길산역에서 내려 반대방향으로 가면 된다.
먹을거리 봉안터널 아래 보리밥집 시골밥상(031-576-8355). 팔당촌두부집(031-576-4110). 페치카에 몸을 녹이고, 항아리수제비, 고추장삼겹살, 쌈밥, 산채비빔밥, 해물파전, 커피 막걸리 등을 맛볼 수 있는 카페 봉주르(031-576-7711).
주변 볼거리 주필거미박물관 김주필 박사가 2004년 설립. 거미 표본 5천여 종이 있으며 살아 있는 거미와 곤충표본 화석 등을 볼 수 있다. 031-576-7908. 우석헌자연사박물관 광물 암석 화석 공룡 등 다양한 전시물. 031-572-9555. 남양주역사박물관 팔당에 있음. 봉선사대종 문양, 현판 탁본, 석기, 토기, 생활용품 등 유물 전시. 031-576-0558. 몽골문화촌 몽골식 가옥 겔, 몽골음식, 몽골 전통악기, 장신구, 전통의복, 춤, 노래 등 체험. 031-590-2793. 들꽃식물원 몽골문화촌 앞 소재. 31개 테마의 야생화 눈길. 031-559-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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