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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그 사람 그 후

故 장진영 남편 김영균씨, 아내 떠나보내고 1년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니, 평생 동안 진영이의 멋진 남편이고 싶어요”

글 김유림 기자 사진 문형일 기자

2010. 10. 18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지난해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배우 장진영. 어느덧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부부의 인연으로 단 3일밖에 함께 할 수 없었던 남편 김영균씨는 그가 떠난 빈자리를 슬픔 대신 아름다운 추억으로 메우고 있다.

故 장진영 남편 김영균씨, 아내 떠나보내고 1년


지난 9월1일 경기도 분당 한 추모공원. 아름다운 배우, 고 장진영이 잠들어 있는 이곳에서 1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지난해 위암으로 서른여덟 짧은 생을 마감한 장진영을 추억하기 위해 그의 남편 김영균씨(43)가 마련한 자리였다. 전날 태풍이 올 거라는 기상예보와 달리 햇살은 눈부시게 빛났고 사진 속 장진영의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김씨는 날씨 얘기로 안부를 물어오는 기자에게 “그러게요. 날씨가 정말 좋네요. 그런데 진영이는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했어요”하며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이날 추모식에는 장진영의 부모와 김영균씨의 아버지, 큰누나도 참석했다. 고인의 지인들이 편지로 그리운 마음을 전했고, 마지막으로 김씨의 편지가 낭독되자 추모식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고인의 유골이 안치돼 있는 추모관에서 헌화식을 거행한 뒤 분홍색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며 추모식은 끝이 났다.
며칠 뒤 서울 교대역 근처에서 김씨를 다시 만났다. 그가 운동차 자주 들른다는 주상복합건물이었다. 그는 예전에 비해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실제로 요즘 들어 그는 식사도 거르지 않고 운동도 다시 하면서 아내를 만나기 전 삶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요즘 저의 일과는 평범함 그 자체예요.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챙겨 먹고 출근하고, 퇴근 후 집으로 오죠. 사실 혼자 산 지 꽤 됐기 때문에 뭐든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요. 진영이가 옆에 없다는 사실 빼고는 일상생활에서 불편한 점은 거의 없어요.”
현재 건설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퇴근 후 집으로 곧장 오는 날이 많다고 한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시기도 하거니와 취하면 마음이 너무 힘들어져 술자리를 되도록 피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슬픔에 허덕이던 날도 있었지만, 항상 그는 생각했다. ‘진영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하고. 그렇기에 마냥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연애할 때도 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진영이가 바라는 남자가 돼야겠다고. 혼자 남았지만 그 마음은 똑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주위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진 않아요. 결코 그런 모습을 진영이가 원치 않을 걸 알기 때문이죠. 대신 무언가 몰두할 거리를 찾았어요. 그 첫 번째가 책을 쓰는 일이었어요. 물론 책을 쓰면서 많이 울었지만요(웃음). 그 다음은 진영이의 팬들과 미니홈피를 통해 소통을 시작했어요. 정말 저에겐 많은 힘이 돼주는 분들이에요. 날마다 제 홈피를 찾아와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는데, 그 고마움에 일일이 답글을 쓰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겠더라고요.”

故 장진영 남편 김영균씨, 아내 떠나보내고 1년


김영균씨는 지난 1월 두 사람의 만남부터 이별까지를 글로 엮어 책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을 펴냈다. 기억이 흐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아름다웠던 연인의 모습을 평생 간직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책에는 두 사람이 함께 했던 6백8일 동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배우 장진영에 앞서, 사랑하는 한 남자의 여자로서 그가 누렸던 행복과 기대, 그리고 암 발병 후 시작된 고통과 두려움이 한 편의 영화처럼 그려져 있다. 김영균씨는 책을 항상 머리맡에 두고 불현듯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있을 때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해서인지 만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추억은 어느 커플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다고 생각해요. 마침 진영이가 드라마 ‘로비스트’를 끝낸 후 휴식기에 들어갔을 때 만났고, 저 역시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라 여행도 많이 다닐 수 있었어요. 진영이가 좋아하는 전시회, 음악회를 다니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죠. 비오는 날이면 유리 지붕이 덮여 있는 진영이의 집 베란다에 누워 비 내리는 광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창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어요. 비오는 걸 유난히 좋아했던 진영이는 제가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며 놀리기도 했죠(웃음). 2년 전 연애할 때도 비가 참 많이 왔는데 올해도 그런 것 같아요.”

아내와 영원한 인연의 끈 만들고 싶어 혼인신고



故 장진영 남편 김영균씨, 아내 떠나보내고 1년

지난해 7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입맞춤하는 두 사람.



하지만 꿈같이 행복하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만난 지 8개월 정도 됐을 때 암 발병 사실을 알았고, 1년간의 투병생활을 한 뒤 영영 이별을 해야했다. 마흔 둘, 서른여섯. 늦게 만난 두 사람이 예고된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마지막까지 죽을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김영균씨는 두 사람의 사랑을 분명 ‘운명’이라 믿고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배우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은 남자는 없을 테고, 수많은 능력 있는 남자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어느 순간 그의 눈앞에 나타난 장진영을 그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역시 마흔이 넘는 동안 ‘언젠가는 진정한 사랑이 나타나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처음에는 진영이가 제가 총각인 거에 대해 의심을 했어요. 혹시 결혼한 적이 있는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낳은 숨겨둔 아이가 있는 건 아닌지요(웃음). 자신도 그 나이까지 혼자였으면서, 제가 혼자라는 걸 의아해했어요. 한번은 농담으로 미국에서 결혼한 적이 있다고 했다가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어요(웃음).”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장진영이 사망하기 3일 전 혼인신고를 한 것 역시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장진영과 결혼을 꿈꾸며 만났고 더군다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는 그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인연의 끈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 “혼자 가는 길이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진영이에게 여자로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다 만끽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거기에는 멋진 프러포즈와 결혼식도 포함되죠.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인데, 결혼하자고 이미 약속까지 했는데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결혼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간단해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잖아요. 물론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쉽게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첫째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진영이 치료차 멕시코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순간 머릿속에 결혼계획이 세워졌어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라스베이거스 여행에서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김씨는 결혼식 날을 회상하며 “신부가 혼자서 부케를 들고 입장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멕시코 병원은 한국에서는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을 때, 장진영이 지인의 소개로 직접 찾아간 곳이다. 가지 말라고 말리는 김씨에게 당시 장진영은 “한국에 있으면 나을 수 있대요?”하고 반문하며 멕시코행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반드시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멕시코에서의 치료는 안타깝게도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故 장진영 남편 김영균씨, 아내 떠나보내고 1년


故 장진영 남편 김영균씨, 아내 떠나보내고 1년

김영균씨는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을 책으로 펴냈다.



두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영원히 그 자리에
참다 참다 슬픔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밀려올 때면 그는 실컷 눈물을 쏟는다고 한다. 혼자 살고 있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라고. 장진영은 처음 연애할 때는 다정다감하게 잘 챙겨주는 그를 ‘부인’이라고 부르더니 암이 발병하고부터는 매일 우는 그에게 ‘울보 부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딱 한 달 전 그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도 ‘내 사랑, 울지 마요. 내가 많이 미안해요. 열심히 치료해서 꼭 나을게요. 내가 나중에 꼭 행복하게 해 줄게요’라고 적혀 있다. 아직도 그의 휴대전화기에는 장진영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김씨는 “이것 때문에 전화기를 바꾸지 못하겠다”며 한참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장진영이 그에게 남긴 마지막 말 또한 “고맙고 사랑한다”였다.
“사망 이틀 전 서울대병원 측에서 ‘더 이상 치료를 위한 의료행위가 무의미하다’고 하기에 집과 좀 더 가깝고 편안한 곳으로 병원을 옮기기로 했어요. 진영에게 ‘내일 더 좋은 병원으로 갈거야’라고 했더니, 진통제에 취해서인지 집에 가는 걸로 잘못 알아듣더라고요. 유난히 병실을 싫어했거든요.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그럼 이제 집에 가는 거예요? 고마워요. 사랑해요’하고 말한 뒤 다시 잠에 빠져들었는데, 그게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어요.”
평소 장진영이 좋아하던 음악, 영화, 그림 등을 통해 그는 날마다 둘만의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특히 노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장진영이 처음 그를 집으로 초대한 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들려줬는데, 당시 처음 그 노래를 접한 김씨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에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또 단 둘이 처음 노래방에 간 날 장진영이 그에게 들려준 노래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 OST ‘별’이었다고. 두 곡 외에도 생전에 장진영이 즐겨 듣던 음악은 현재 김영균씨의 미니홈피에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있다.
장진영의 생일날 그가 프러포즈와 함께 건넨 반지는 지금 그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다. 결혼식 때 준비한 똑같은 디자인의 예물반지도 함께. 혹여 그의 손가락에서 두 개의 반지가 없어지는 날이 올까 궁금하다.
“이 반지와 함께 진영이가 항상 제 곁에 있는 거라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걱정하며 앞으로 좋은 사람 만나 다시 결혼하라고 말하지만, 글쎄요. 과연 이 반지를 빼게 만들 사람이 나타날까요. 아마 이 반지는 평생 제 손가락에 끼워져 있을 것 같아요.”
‘장진영의 남편’이란 타이틀을 달고 평생을 살아가야할 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 또한 두렵지 않다. 오히려 장진영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고 한다. 그는 “진영이는 대한민국을 대표한 훌륭한 배우였고, 그녀에게 걸맞는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진영이를 불쌍하게 여기기보다 부러워하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욱 당당한 남편으로 거듭나려 노력했어요. 진영이도 하늘나라에서도 제가 남편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또한 김씨는 장진영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배우, 매력적인 여자로 기억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진정한 사랑의 대명사로 각인된다는 건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간 생일 등 기념일마다 자신의 미니홈피 사진첩에 두 사람의 행복했던 모습을 올리고, 장진영의 팬들과 소통해온 것 또한 장진영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자신이 할 일은 어느 정도 다 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는 더 올릴 사진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잊히는 것도 순리라 생각해요. 진영이를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하고 저는 마음속에 조용히 그녀를 품고 살 거예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마지막 작별의 시간까지, 모든 순간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김영균씨. 지금 그가 가장 두려운 건 흐릿해져가는 기억과 조금씩 닳아져갈지 모를 추억이다.

▶ 故 장진영 아버지 장길남씨 인터뷰
“딸 연예활동 반대한 일 후회, 1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故 장진영 남편 김영균씨, 아내 떠나보내고 1년


지난 9월1일 추모식에서 만난 고 장진영의 아버지 장길남씨(75)는 착잡한 표정으로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장진영의 아버지는 “1년이란 세월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자식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부모가 아니고서는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영이 떠나고 난 뒤 아버지는 숱한 날을 후회로 보내야했다. 오랫동안 딸의 연예활동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모의 보호 아래 얌전히 있다가 가정을 꾸리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 아이를 많이 힘들게 했다”며 빨리 연예활동을 인정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혹시 나 때문에 우리 아이가 몹쓸 병에 걸린 건 아닌가하는 자책감이 들어요. 언젠가 한번은 연예인 생활을 못하게 하려고 아이를 방에 가두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한 적도 있어요. 그랬더니 소리를 빽 지르면서 ‘아버지가 나 죽이려 한다’며 문을 박차고 도망치더라고요. 저를 피해 숨어서 활동하느라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아버지 이제 마음 좀 풀어주세요’하고 애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모습마저 볼 수 없으니….”
장길남씨는 지난 2월 사재를 털어 ‘계암장학재단’을 설립했으며, 같은 무렵 시작한 장진영기념관 설립 공사도 조만간 완공될 예정이다. 장진영기념관은 선산이 있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 계암마을에 터를 잡았다. 장진영의 아버지는 “우리 딸을 사랑해주는 많은 분들을 위해 기념관을 잘 꾸려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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