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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거장과의 데이트

전설이 된 만남 이창동 윤정희

‘시’의 여운, 칸의 영광

글 정혜연 기자 사진 지호영 기자

2010. 07. 19

노감독과 노배우의 만남이 이토록 빛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영화 ‘시’의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 두 사람은 기대를 모았던 작품상·여우주연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관심과 칭찬만으로도 상을 탄 듯한 기분”이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전설이 된 만남 이창동 윤정희


평생 한길을 걸어온 이들의 얼굴에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배어나온다. 1967년 데뷔 후 20여 년간 영화계에서 활동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 윤정희(66), 발표하는 작품마다 탁월한 작품성을 인정받은 감독 이창동(56)이 바로 그 주인공. 두 사람이 만나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많은 이의 눈과 귀가 쏠렸다.
영화 ‘시’는 그 기대에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작품이었다. 지난한 세월 속에서 더욱 농밀해진 윤정희의 연기력, 이를 스크린 가득 빛나게 담아낸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이 탁월한 미장센을 탄생시킨 것. 이 작품은 제63회 칸영화제에서 작품상·여우주연상 등에 노미네이트됐고, 결국 각본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이창동은 “세계 영화인의 축제에서 큰 상을 받아 영광”이라고 말했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등에서 불편한 주제를 주로 다뤄왔던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주제를 다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스스로 그러한 평가를 인지하고 있던 터라 그는 “한국에서도 익숙한 문법의 영화는 아니라고 하는데, 해외 영화제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신경 쓰였다”고 한다.
“보통 제 영화는 어렵다고 해요. 작품 중간중간 시가 많이 나오는데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의외로 정서적인 부분에서 공감을 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의도했던 바까지 깊숙이 들어와 이해하는 걸 보고 속으로 좀 놀랐죠. 이번에 확실히 영화 문법이란 상당히 보편적이라는 걸 느꼈어요.”
이 작품의 헤로인 윤정희는 칸영화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일이 남다른 감격을 안겨준 듯했다. 안타깝게도 여우주연상은 줄리엣 비노시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많은 분들이 아쉽지 않냐고 물으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상을 받는 것 이상으로 많은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죠. 영화제가 끝나고 공항에 앉아 있는데 금발의 여성이 걸어와 러시아 기자라며 제게 ‘당신의 영화에 감동했어요. 당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도했는데 아쉬워요’라고 하더라고요. 칸 거리를 걷고 있을 때도 감동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저희 남편이 ‘당신, 이보다 더 훌륭한 여우주연상이 어디 있겠어’라고 말할 정도였죠(웃음).”
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윤정희는 이후 수십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그러던 중 72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2년 뒤 두 사람은 파리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딸과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결혼 후에도 종종 작품 활동을 했던 윤정희는 94년 영화 ‘만무방’을 끝으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은퇴 선언은 없었으나 급변하는 영화계에서 그는 자연스레 잊혀갔다. 그를 다시금 카메라 앞에 서게 만든 이창동의 카드는 무엇이었을까. 윤정희는 “마치 나를 연기하는 듯 영화 속 ‘미자’는 온전히 윤정희와 닮아 있었다”고 말해 의문을 해소해줬다.
“쉴 때 여러 시나리오를 받았지만 제 마음을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창동 감독의 ‘시’만은 다르더라고요. 이창동 감독과는 부산국제영화제 시상대에서 한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마주할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저를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니 출연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20년 후 다시 함께 영화 찍고 싶어

전설이 된 만남 이창동 윤정희


이창동 감독은 이번 작품의 플롯과 주인공을 떠올리면서 거의 동시에 윤정희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왜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며 본능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사하며 스쳐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윤 선생님의 내면을 느꼈는지도 몰라요. 그만큼 자연스럽게 오버랩됐죠. 주인공 이름도 그저 ‘미자’여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썼는데 윤 선생님 본명과 같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우연의 일치지만 그런 면에서 필연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는 촬영을 하면서 윤정희가 자신이 상상한 그대로의 연기를 펼치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은 함께했던 여배우 문소리·전도연 등이 “배우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끌어내고자 하는 감독”이라고 할 정도로 배우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윤정희에게만은 단박에 “오케이”를 외쳤다는 후문. 그만큼 윤정희가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이창동 감독은 “눈에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육체적으로 고생을 하신 윤 선생님이 여우주연상을 받기를 소원했다. 그래야 작은 보상이라도 될 것 같아서였다”고 말했다. 그러자 윤정희가 손사래를 쳤다.
“옛날부터 제가 좀 열심파였어요(웃음). 그래서 그냥 열심히 한 거예요. 이 감독님, 걱정 마세요. 칸에서 많은 영화인과 언론인이 제게 ‘당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어요’라고 말해준 것만으로도 기뻤으니까요.”
‘시’ 이후 윤정희에게 많은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당분간 활동할 계획이 없음을 밝혔다.
“출연 요청 받은 것 중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 속의 미자가 아직까지도 저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긴 시간 작업을 하면서 느낀 건 모든 영화 작업은 물 흐르듯 이뤄져야 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지금 제 마음이 ‘미자’ 이외의 인물을 들여놓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 영화관에서 볼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전설이 된 만남 이창동 윤정희


윤정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이창동 감독은 “윤 선생님이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 한 번 더 작품을 같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80세 혹은 90세가 된 윤정희를 스크린에 담고 싶다는 것. 그때가 되면 또 다른 윤정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창동 감독이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과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윤정희를 바라보자 그 또한 “90세가 넘어서까지 연기하는 것이 내 소원인데 너무 감사한 말씀”이라며 미소 지었다.
아직 ‘시’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창동 감독은 벌써 차기작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이야기로 뿌리를 내리고 영화화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작업을 할 생각이라고. 칸영화제에서 환대를 받은 감독이니만큼 자부심도 대단할 것 같았지만 그는 “항상 내 작품의 허물만 보일 뿐”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전 병적으로 제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소심합니다. 자학하는 스타일이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죠. 이번에 각본상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도 사실은 잘못된 점만 보이는 상태예요. 주변에서 좋은 이야기를 해줄 때면 부끄러움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부끄러움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껏 유지했던 저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온전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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