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한 눈빛으로 앉아 있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다급하게 ‘팔찌’를 찾는 중년 여인. 홍유진(55)은 MBC 주말 드라마 ‘보석비빔밥’에서 젊은 나이에 치매를 앓는 ‘이태리’ 역을 맡아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하는 열연을 펼치고 있다. 방송 초반에는 다소 생소한 얼굴이라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홍유진을 빼고 이 드라마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가 교수로 재직 중인 동덕여대를 찾았을 때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학과 일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인기를 실감하느냐고 묻자 밝게 웃으며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아요. 요즘은 조기 치매에 걸리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제 나이 또래 분들도 유심히 보시더라고요. 최근에 식당에 갔더니 음식을 더 챙겨주면서 우스개로 ‘빨리 나으세요’라고 말하는 아주머니도 계셨어요(웃음).”
홍유진은 77년 TBC 공채 탤런트 18기로 데뷔했다. 10년 동안 드라마 촬영을 하다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로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강의에만 전념했다. 후학 양성에 힘쓰다 불현듯 드라마에 출연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백호민 감독이 직접 찾아와 진지하게 출연을 제의해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백 감독이 연구실로 찾아와 어떤 작품인지 왜 나를 캐스팅하고 싶어 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하고 갔어요. 박근형 선생님을 비롯해서 한진희·한혜숙 선배가 출연한다고 하더라고요. 오래전부터 알던 분들이라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 싶어 하겠다고 했죠. 강의만 하다가 교양 있고 우아한 재벌가 사모님을 연기하려고 하니 처음에는 좀 긴장됐는데 차츰 적응됐어요(웃음).”
그의 출연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제자들이었다. 동덕여대 방송연예학과 1기생으로 그에게 배운 박경림·박진희 등 많은 제자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줬다고. 그는 “현재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것 같아 기분 좋다”고 말했다.

부모 반대 무릅쓰고 연영과 진학, 공채 탤런트로 쉴 새 없이 일해
홍유진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연기자를 꿈꿨다. 경북 문경초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일년에 몇 차례 초등학교를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때마다 학예회가 열렸는데 재주가 많던 그는 발레며 합주, 독창을 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뽐낼 때면 희열을 느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재능 있는 아이로 인정받으며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막연하게 이쪽으로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안정적인 직업인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고. 만약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면 재정적인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을 정도였다.
“그래도 하고 싶어서 고집을 꺾지 않았어요. 열심히 준비한 덕분인지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장학생으로 들어갔어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집에서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비를 제 손으로 벌어야 했죠. 어차피 연기를 계속할 거면 이걸로 돈을 벌어야 되겠다 싶어서 동양방송 공채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운 좋게 합격했어요.”
탤런트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그는 어린이 연속극부터 반공 드라마까지 온갖 방송에 동원돼 촬영을 해야 했다. 그 당시 출연했던 드라마만 3백 편이 넘는다. 당시 함께 입사한 탤런트는 김영철과 고 임성민 두 사람뿐이었다. 김영철과는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가끔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며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곤 한다고.



그는 이번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달라진 작업 환경에 많이 놀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분장이며 의상을 스스로 준비해 촬영지원 버스를 타고 다니며 드라마를 찍어야 했던 시절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 강남의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해준 의상을 입은 뒤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탄 채 촬영장을 오가는 후배 연기자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한다.
공채 탤런트로 10년쯤 일했을 때, 매너리즘을 느끼던 그에게 세상을 크게 볼 기회가 찾아왔다. TBC에서 주최하는 미국 순회공연에 참여하게 된 것.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한인유학생들을 만난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석사 과정에 지원했어요. 공부를 하면서 유학을 갈 만한 학교를 알아봤고, 학위를 받은 직후 출연한 작품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미국으로 갔죠.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입학을 허가해달라고 말하는 동양 여자를 학과장이 잘 봐주셔서 원하던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죠.”
뉴욕대학교대학원 연극심리학과에 들어간 그는 입학과 동시에 난관에 부딪혔다. 몸짓으로 표현하는 실기 수업은 따라갈 수 있었지만 이론 수업은 영어 실력이 달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책에 있는 영어가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보였다”며 웃음 지었다. 한 학기 동안 랭귀지 스쿨을 다니며 필사적으로 영어를 익힌 후 어렵사리 수업에 참석할 수 있었다.



5년 만에 박사 학위 받고 귀국해 이영애·이서진 등 지도
원하고 바라던 공부였지만 하면 할수록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초반에는 박사 학위까지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고. 그저 매일같이 연기의 새로운 면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고 한다.
“학교에 앉아서 공부할 때 안식을 느꼈어요. 덕분에 즐겁게 공부했는데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지더군요. 작은 사물이나 우연히 지나치는 상황에서도 색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교수님이 박사 자격시험을 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게 제 인생 최대 고비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웃음).”
미국의 대학은 입학하기보다 졸업하기가 더 어렵다. 그는 자신이 논문을 낼 때마다 지도 교수가 사사건건 지적을 하자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고 회상했다. 어느 날은 띄어쓰기 하나로 트집을 잡는 바람에 속이 상해서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도 했다고. 하지만 열매는 달았다. 그의 논문이 통과되던 날, 지도 교수는 샴페인을 터뜨리며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줬다고 한다. 그는 “샴페인 한잔에 피곤이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91년 한국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기자를 만나 근황을 이야기하면서 이후 그는 언론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탤런트’로 알려졌다. 이후 여기저기에서 섭외 요청이 들어와 다큐멘터리·라디오 프로그램 등에서 진행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강의 요청도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귀국한 뒤 인터뷰를 하면서 ‘홍유진 심리드라마 연구소’를 차릴 계획이라고 말했는데 의외로 문의가 많이 들어왔어요. 막연하게 생각만 한 것을 말한 건데 일이 커졌죠(웃음). 공무원 연수원, 은행 같은 곳에서 특강 요청이 와서 강의를 하곤 했어요. 그리고 기성 배우들 재교육도 했죠. 그때 이영애 명세빈 이서진 이지훈 등을 가르쳤어요. 이영애씨를 제외하고는 다들 데뷔하기 전이었어요. 이영애씨는 연기자로 막 데뷔했을 때라 드라마 촬영 중에 발성부터 기본기를 닦도록 가르쳤죠.”



그가 연기 지도를 하는 것으로 방송가에서 입소문을 타자 동덕여대에서 연락이 왔다. 방송연예학과가 신설되는데 교수로 일해줄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후학 양성에 관심이 많던 그는 흔쾌히 제의에 응했다. 문을 열었을 때 박경림 박진희 이재은 박시은 등 많은 이가 지원했고 그 덕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이후로 남상미 김아중 임주은 등 이름이 알려진 제자들도 동덕여대를 거쳐갔다.
제일 기억에 남는 제자를 묻자 그는 주저 없이 박경림을 꼽았다. 1기생은 모두 기억에 남지만 박경림은 아버지와 관련된 에피소드 때문에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연구실을 찾은 박경림의 아버지가 휑한 벽면을 한참 동안 보다가 줄자로 사이즈를 재더니 “왕년에 목수 일을 했는데 교수님께 책장을 짜드리고 싶다”고 말한 뒤 정말로 책장을 보내왔다고 한다.

치매 연기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에 눈물 흘려
시간이 남을 때면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그는 “어머니를 뵈러 간다”고 말했다. 7년 전 치매 증상이 악화돼 요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한 달에 두 번씩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엄마가 치매에 걸린 시점부터 치매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 덕에 치매 걸린 사람의 뇌구조가 어떤지, 어떻게 간호해야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공교롭게 치매 연기를 하게 돼 따로 공부할 필요 없을 정도로 도움이 됐죠.”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치매 연기를 칭찬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딸을 위해 빚을 내서 옷을 만들어준 걸 잊을 수 없다고. 그는 “늘 사랑을 받기만 했는데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도 내가 치매 연기를 잘할 수 있도록 선물을 하신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늘 정신을 놓고 계시는데 가끔 제 얼굴을 알아보실 때가 있어요. 말도 하지 않고 저를 안고 눈물을 보이세요.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살아 계시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평생을 꿋꿋하고 강인하게 살아온 그는 이제는 사랑의 감정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한다. 우정이 됐든 사랑이 됐든 지인들을 비롯해 어려운 이와 마음을 나눌 때면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고.
“남들이 보기에는 고민, 걱정 없이 성공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몰라요. 그런 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부모님 앞에서도 씩씩한 척하기만 했는데 어느 날 ‘왜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니’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게 서운한 일인 줄 정말 몰랐어요. 무조건 잘하고 성공한 모습을 보여야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이제는 그렇게 살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려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