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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시인과의 만남

응달진 삶 비추는 햇살 같은 시인 함민복

“강화도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시 같은 삶, 어둡고 힘든 이들에게 전하고픈 이야기…”

글 임윤정 기자 사진 김형우 기자

2009. 11. 24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자인 시인이 있다. 강화도에서 자연과 벗하며 사는 함민복이다. 그는 집 평수를 넓히려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드넓은 바다와 개펄이 다 자신의 집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삶을 희망으로 채우는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풍족해진다. 따스해진다.

응달진 삶 비추는 햇살 같은 시인 함민복


함민복 시인(47)이 강화도에 거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는 달만 쳐다봐도 물때를 알 수 있을 만큼 제법 섬사람이 다 됐다.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리듯 팔딱이는 시어를 건져 올리고 있는 시인을 만났다. 사람 냄새 나는 시를 쓰는 시인 역시 사람 좋은 인상이다. 충청도 태생의 어눌한 말투가 훈기를 뿜어낸다.
그는 일 년 전쯤 바다가 앞마당처럼 펼쳐진 동막리 집에서 이사 나와 온수리파출소 앞 작은 방에 살았다. 그러다 한 달 전쯤 이번엔 들판이 앞마당처럼 펼쳐진 길상리에 셋집을 하나 마련했다. 한 달에 보증금 없이 10만원이던 옛집에 비하면 한 달 담뱃값 정도 줄여야 형편에 딱 맞는다. 시인의 생애에서 가장 호사스런 집인 셈이다. 하지만 옛 동네 풍경과 사람들이 못내 그리운 시인은 그리로 자주 마실 나가곤 한다.
강화도 시인이라 불리는 함민복은 88년 ‘세계문학’에 시 ‘성선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그리고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 등을 통해 소외된 삶과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특유의 감성적 문체로 풀어내며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시집 ‘말랑말랑한 힘’은 그에게 ‘김수영 문학상’을 안겨줬다.
시인에게 있어 강화도는 엄마의 자궁 속만큼이나 편안한 곳이다. 서울 달동네와 친구방을 전전하다 96년, 마이산 꼭대기에서 본 동네가 좋아 보여 둥지를 틀었다. 처음엔 외톨이 신세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는 성격이 못 됐고, 이곳 주민들 역시 외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쉽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매일 동네 이곳저곳을 목적 없이 걸어 다니거나, 동면에 드는 겨울 개펄에 낚싯대를 메고 가는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당시엔 전화기가 없어서 호출이 오면 전화하러 밖에까지 나가야 했어요. 그날도 전화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왜 그렇게 왔다 갔다 해요?’하면서 말을 붙이더라고요. 심심하면 일손 좀 도와달라고 해서 김 따거나 느타리버섯 재배하는 거 도와주곤 했어요. 저의 유일한 부동산은 시간밖에 없거든요(웃음).”
시인은 그렇게 갯사람들 일손을 도우면서 어느새 동네 경조사까지 참여하는 어엿한 강화도 주민이 됐다. 동막리 정든 집을 떠나야 했을 때 동네 주민들은 가족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서운해했다. 가난한 시인을 위해 땅을 내어주고, 집까지 지어주려고 했을 정도다.
동막리 사람들과 한데 엉겨서 소박한 삶을 사는 함민복. 삶이 곧 시가 되고, 시가 곧 삶이 된다. 어쩌면 함민복의 시는 기쁠 땐 흥을 돋우려고, 슬플 땐 자신을 달래려고 부르는 콧노래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시절을 녹여낸 시, 그 따뜻한 위로
강화도 시인이라 불리기 때문일까.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랐을 것 같지만 사실 그의 고향은 충청도 한 산골마을이다. 가난은 어린 시절부터 시인을 따라다녔다. 그의 부모는 자식들 끼니 걱정에 허리가 휠 정도로 일했다. 그러나 형편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농사짓다가도 나가서 이 장사 저 장사 하셨어요. 김장철인 이쯤엔 새우젓 떼다가 리어카에 싣고 동네 이곳저곳에 팔러 다니셨어요. 이런 얘긴 처음 하네요. 시골의 여느 부모님처럼 생활력이 강하셨죠. 죽도록 일하는데 끝까지 못살고….”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는 겨우겨우 졸업했지만, 고등학교까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다 학비 전액 무료라는 말에 서울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이소룡 영화를 보며 액션 스타를 꿈꾸던 그는 막연히 서울로 올라가면 무술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술이 아닌 시에 빠져든다. 고등학교 3년을 문학 소년처럼 보낸 공고생은 졸업 후 원자력발전소에서 기곗밥 먹으며 4년을 살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신경쇠약과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결국 문학을 공부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직장을 그만뒀다. 하지만 공부하는 데 쓰려던 퇴직금마저 집안 빚을 가리는 데 다 들어갔다. 어렵사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대학 2학년이던 88년 등단했다.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시인의 타이틀을 달았지만, 지독스런 가난은 지독스럽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두 달 전쯤 발전소에서 함께하던 친구들이 놀러왔어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너희들 연봉이 얼마나 되냐?’ 물었죠. 다 1억이 넘더라고요. 발전소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지금쯤 저도 잘살고 있겠죠. 사실 집을 위해서는 직장을 계속 다녀야 했는데, 어리니까 글 쓴다고 폼 잡고 나오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죄송했죠. 한번은 어머니가 ‘저 아랫동네도 대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있는데, 시 쓴다고 그러다가 그냥 떠돌아만 다닌다고 하더라’고 말씀하셨어요. 신경림 선생님이거든요(웃음).”
지난한 삶을 가슴으로 써 내린 함민복의 시는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느라 지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한다.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는 사람”이라 했던 소설가 김훈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 혼자 있을 때는 가난한 게 편해요. 가난하다는 건 뭔가 부족하다는 건데, 전 뭘 원하는 것도 없으니까 가난하지도 않은 거죠. 또 가난은 가능성이니까, 안 가진 것은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니까요. 술과 담뱃값 대고 방세 내고 잘 살아요. 친구들에게 두세 번 얻어먹으면 저도 한 잔 살 수 있고요. 전보다는 잘사는 거죠.”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시집 한 권 팔리면/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박리다 싶다가도/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_‘긍정적인 밥’

사별한 어머니 향한 사모의 노래
시인이 최근 세 번째 산문집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를 들고 나왔다. 이번에도 맞잡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오는 따뜻한 온기를 담아냈다. 눈길을 잡아끄는 대목이 있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모친과의 마지막 순간에 관한 사연이다. 시인은 병상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온 노모를 간호하면서 서툰 기도를 올린다. “어머니, 소가 되셨나요. 왜 코뚜레를 하고 계세요? 어머니, 코끼리가 되셨나요. 왜 코에서 나온 호스로 미음을 드시죠? 어머니, 소처럼 벌떡 일어나세요. 어머니, 코끼리처럼 큰 소리로 저를 한번 불러주세요… 열쇠처럼 쪼그맣지만 내 모든 것을 열어준 어머니, 나의 어머니!”
“시 쓴다고 발전소 그만둔 일이 후회가 되더라고요. 대학을 못 나온 분이니까 대학병원에라도 모시고 싶었는데, 결국 의료원에서 돌아가셨어요. 저는 종교가 없지만 교회 다니셨던 어머니를 위해 당신의 믿음대로 그런 세계가 있었으면 하고 기도했어요.”
‘내 머리카락 한 올 보다도 힘이 없는’ 어머니 걱정에 늘 노심초사하던 시인은 이제 전화기에 043으로 시작하는 고향 쪽 전화번호가 찍혀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아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지. 지금 땅속에 누워 계시지’ 자꾸 확인하게 된다. 어머니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장가도 안 간 노총각 아들이 눈에 밟혀 한숨 가실 날 없었다.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당부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라”였으니까. 시집이 1천 권 팔리기도 힘든 나라에서 2만 권 가까이 팔리는 시인이 됐지만, 시가 뭔지 알지 못했던 어머니는 아들의 유명세를 끝내 감지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한번 TV에 제가 나온 걸 누가 봤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 산 속에 돼지 기르고 살 때인데, 팩스 같은 게 없으니까 글을 써가지고 나가고 그랬어요.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만날 써 가지고 나가면 뭐 하냐! 맞춰야 돈이 되지.’ 시가 맞추는 건지 아셨던 거죠. 옛집에 살 때 오시면 집 행색이 말이 아니니까 심란해하셨어요. 고기잡이 도구만 쭉 늘어서 있고. 바다에 나갔다 죽어서 돌아올 줄 알고 걱정이 많으셨어요.”
그의 시를 읽으면 눈물이 핑 돌지만, 그 눈물을 훔쳐내면 왠지 모를 희망이 솟구친다. 그 이유가 뭘까.
“전에 TV에서 아들을 군대 보낸 부모들이 나와서 각자의 사연을 털어놓은 걸 본 적이 있어요. 한 어머니가 ‘아들 군대 보내고 나서 화장실에 있는 칫솔에 앉은 먼지를 볼 때마다 슬퍼져요’라고 하니까 거기 있던 부모들이 다 울더라고요. 제 글에 그런 힘이 있다면 어느 한 부분을 잡아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응달진 삶 비추는 햇살 같은 시인 함민복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찾는 행복
마흔일곱 노총각의 삶이 외롭지 않은지 물었다. 시인은 대답 대신 기르는 개 길상이 얘기부터 꺼내놓는다.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동안 동네 친구 집에 맡겼다가 최근에야 데리고 왔다.
“길상인 동막리에 있고, 저만 길상리에 있었어요. 동네 형님들한테 ‘큰일났어요. 개 이름을 바꿔야 되겠어요. 길상아, 길상아! 부르면 길상면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하니까 ‘그럼 동막이라고 바꾸면 자네가 다시 동막리로 올 거 아닌가’ 그러세요. 이제부턴 발음을 흘려서 ‘길삼아!’라고 부르려고요. 저놈 외로움 달래주려고 강아지 한 마리를 새로 들였어요. 아직 이름도 못 지었네요.”
몽실몽실한 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다. 마당 위를 왔다 갔다 할 적마다 마치 뭉게구름 한 조각이 떠다니는 것 같다. 그에게 ‘구름’이란 이름이 어떠냐고 권하고 싶다.
시인은 동네 청년들과 술자리를 자주 갖는다. 술이 맛나기도 하지만, 술잔에 오가는 대화도 기가 막히게 맛나다. 거나하게 술이 들어가면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 툭툭 쏟아져 나온다. 거기서 구한 이야기들이 시 속에 녹아든다. 함민복은 내년에 시집을 낼 요량이다. 사실 지난해 출간하려고 이미 써 놓은 시들이 많지만, 버리고 다시 쓰려고 한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드니까 세상에 대한 생각들을 더 많이 해봐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큰일이에요. 이달 말일까지 산문 80장, 시 11편을 써야 하는데, 아직 하나도 안 썼어요. 오늘 술 한 잔 딱 먹고 내일부터 시작하려고요. 술집 안 가고 집에 모여서 간단히 먹곤 해요. 회 떠다가.”
시인은 술 생각에 두어 번쯤 입맛을 다셨다. 알큰하게 속을 데우는 취기처럼 그의 시도 팍팍한 삶에 온기를 불어넣어 속을 뜨끈히 달래준다. 시인의 고단한 삶에 위로가 되었던 선배 시인의 시가 있다.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는 최승호 시인의 짧은 시다. 어렵고 힘든 삶도 날개를 가질 수 있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시인은 그러한 긍정의 힘을 믿는다.
시인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다. 경로당 딸린 방에 모셔야 하는 가난한 아들을 위해 고깃국 먹자며 도리어 아들 몸을 걱정하던 어머니, 중학교 등록금이 없어 쩔쩔매던 제자에게 선뜻 돈을 마련해줬던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 그리고 서무실 장씨 아저씨, 수업료가 밀리면 물고기를 잡으며 설움을 삼키던 소년에게 잡은 물고기와 고기 한 토막을 바꿔주던 정육점집 친구 아버지,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생 나왔다며 자신의 전세방을 월세로 돌려 등록금을 대줬던 형님, 기계 소음 속에서 동고동락했던 그에게 좋은 시 쓰라며 만년필을 건넸던 공장장, 배달꾼이 밥 덮어온 신문지에 동생 첫 인터뷰가 나온 걸 보고 그 김칫국물 묻은 신문지를 비닐에 싸 소중히 간직하던 까막눈 사촌 형…. 사람 때문에 울고 웃었던 지난날이다. “손바닥이 두툼하면 인복이 있다는데….” 시인은 바다일로 거칠어진 투박한 손을 내보이며 허허롭게 웃는다. 긴 인터뷰에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던 그가 술 약속에 마음이 급해졌는지 조심스럽게 재촉한다. 오늘은 또 어떤 가슴 따스한 이야기를 품고 돌아올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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