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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말하기 강사로 변신한 전 KBS 아나운서 유정아

“육아문제로 고민하다 새로운 삶의 방향 잡았어요”

글 김유림 기자 | 사진 지호영 기자

2009. 08. 24

90년대 ‘9시 뉴스’ ‘열린 음악회’ 등을 진행하며 KBS 간판 아나운서로 활약하던 유정아가 말하기 강사로 변신했다. 5년째 서울대에서 ‘말하기’ 수업을 진행 중인 그는 프리랜서 선언 후 클래식 음악·책 등 문화예술 분야 전문 진행자로 홀로서기에도 성공했다. 아나운서라는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 색다른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유정아의 다이내믹 인생스토리.

말하기 강사로 변신한 전 KBS 아나운서 유정아



2004년 서울대에 신설된 ‘말하기’ 강좌는 학기마다 10초 안에 수강신청이 마감된다. 다소 생소한 ‘말하기’ 강좌가 어떤 이유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일까. 커리큘럼이 좋아서? 강사의 지도법이 남달라서? 정답은 둘 다다. 인기 강의의 주인공은 유정아(41) 전 KBS 아나운서.
과거 브라운관을 통해서 봤던 깔끔한 커트머리 대신 단발머리에 시원한 슬리브리스 원피스 차림의 유정아는 한결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헤어스타일이 바뀌어 못 알아볼 뻔했다”고 말하자 그는 “회사 그만두고부터 머리를 길렀는데, 그것보다는 시간이 많이 흘러 그런 게 아니겠냐”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지난 97년 퇴사 후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활동하던 중 모교인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말하기’ 수업을 맡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소통능력 향상을 위해 ‘글쓰기’와 함께 신설된 ‘말하기’ 강좌는 말에 대한 성찰, 즉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말을 가로막는 요인은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달으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말하기 방식을 찾아가는 수업이다. 학생들의 수강 목적은 다양하다. 발표 능력이 떨어져서, 면접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목소리 교정 등.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은 아기 같은 목소리 때문에 고민하던 여학생이라고 한다.
“목소리가 만화주인공처럼 가냘프고 떨려서 남 앞에서 얘기하는 걸 두려워하는 친구였어요. 이런 경우에는 발성 연습이 많은 도움이 되는데, 한 학기를 마치고 나자 발표하는 데 한결 자신감 있어 보이더라고요. 물론 한번 수업을 들었다고 해서 금세 말솜씨가 늘 순 없어요. 말하기에서 100%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란 없고, 100% 소통해야만 좋은 것도 아니죠. 이 세상에는 완벽한 화자도 청자도 존재하지 않거든요. 비록 목소리가 갈라지고 더듬더라도 상대를 배려하며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결정적인 이유는 육아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두 아들의 나이는 네 살, 두 살. 아이들에게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였고, 더욱이 큰아들이 말이 늦어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적잖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1년 정도 휴직을 고려했지만 사정상 불가능해지자 사직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제가 회사를 그만둘 무렵 이금희·정은아·손범수씨 등 소위 잘나가는 아나운서들이 프리랜서로 나섰어요. 저는 그들처럼 인기가 많아서 자유롭게 일을 하려고 회사를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아쉬움은 없었죠. 또 기존에 제가 해왔던 분야가 예능이 아닌 시사·교양 쪽이어서 시청자에게 그리 친숙한 이미지도 아니었고요(웃음).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요즘이 행복해요.”
첫째는 의젓한 성격에 공부도 잘하는 ‘모법생과’인 동시에 그룹 ‘동방신기’의 춤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출 정도로 활달한 면도 있다고 한다.
“지난 5월에는 제가 진행하는 클래식 음악회에 아이들을 초대했는데, 한창 댄스음악을 즐겨 듣는 큰아이로서는 이날 음악이 별로였나봐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꼼짝 않고 앉아만 있어야 하는 게 곤혹스러웠던 거죠. 공연이 끝나자 대뜸 ‘엄마 이런 행사 자주하면 보수로 보이는 거 아니야?’ 하면서 정색하고 묻더라고요(웃음). 평소 아이와 정치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는데, 그래서 아이가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과묵한 첫째와 달리 둘째는 딸처럼 아기자기하고 붙임성이 좋다고 한다. 한데 사춘기여서 그런지 요즘 들어 공부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며 마음을 잡지 못해 걱정이라고. 그는 여러 가지 상황을 예로 들며 아이에게 많은 얘기를 해주고 있지만 좀처럼 접점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그는 “아직까지는 막연하게 공부가 싫어서 그런 것 같아 좀 더 지켜볼 생각이지만, 훗날 아이 스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는다면 그때는 적극 밀어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말하기 강사로 변신한 전 KBS 아나운서 유정아

“말하는 기술 주입하기보다 인내심 갖고 아이 말 끝까지 들어주는 게 중요해요”
유정아는 가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아이의 말하기 능력 향상 노하우 몇 가지를 들려줬다. 먼저 아이와 눈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말을 시원하게 내뱉지 못하고 입에서 우물거리거나 말하기는 걸 두려워 쭈뼛거리는 아이에게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을 하게끔 유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말하는 기술을 주입하기보다 인내심을 갖고 아이의 말을 들어주다 보면 아이도 말하는 데 자신감을 갖게 된다고.
또 아이를 설득하는 데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아이에게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로 인한 부모의 솔직한 감정을 잘 짚어 말한 뒤, 부모의 욕구나 필요를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그 필요를 바탕으로 부탁과 요청을 하는 것이다. 유정아는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무조건 공부하라고 말하는 것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자식이 공부하는 일이 부모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등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말은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듣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 듣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죠. 부정적인 단어는 피하고 긍정적이면서 의문문으로 말하는 게 좋아요. ‘방 좀 어지럽히지 마’보다는 ‘방을 깨끗하게 치워라’ 혹은 ‘오랜만에 방청소 좀 하면 어떨까?’ 하고 아이를 달래는 거죠.”
발성법도 어려서부터 익히면 말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평소 발성을 배울 기회가 흔치 않은데, 유정아는 FM 라디오 진행 당시 성악을 전공한 선배 PD에게 발성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말을 많이 하고 나면 목이 아프거나,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잘 못들을 때도 발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단 목소리를 낼 땐 온몸의 힘을 빼고 하반신은 누가 쳐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야 하며, 상체는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해야 해요. 척추와 목뼈는 꺾이지 않도록 똑바로 앉거나 선 뒤 턱을 쳐들지 말고 아랫배(단전)에 힘을 모으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아~’ 하고 길게 소리를 냅니다. 될 수 있는 한 낮고 크게, 단전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길게 소리를 내는데 더 이상 잇지 못할 것 같을 때 다시 한 번 힘을 실으면 소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아’ 소리를 낸 후 문장을 읽어보고, 다시 소리를 내고 다음 문장을 읽는 식으로 반복하면 발성에 많은 도움이 되죠.”
말하기 전문가로서 그가 기피하는 것은 바로 ‘진부한 표현’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판에 박힌 말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진행자들의 클로징 멘트가 귀에 거슬릴 때가 많아요. 일례로 ‘부부의 날’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진행자들이 ‘오늘은 부부의 날입니다. 아내와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하는 건 어떨까요’ 하고 프로그램을 끝내죠. 정작 자신들은 하지 않을 거면서 말이에요(웃음). 무난한 것과 상투적인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어요.”
한편 그 역시 말로 인해 실수한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 갑자기 낯선 환경에 처하면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오고 불편한 사람과 단둘이 있을 때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생각에 말을 더듬기도 한다고.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다고 한다.
“아나운서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선배 한 분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잃어버렸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대뜸 ‘어떻게 책을 잃어버려요?’ 하고 물었죠. 몇 년 뒤 그 선배한테 듣기로, 그때 제가 했던 말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는 거예요(웃음).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하지만 당시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거든요. 어찌됐든 자신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상대가 듣기에 오해를 살 만한 말도 좋진 않죠.”

차가운 이미지와 달리 내면에서 꿈틀대는 보헤미안 기질
‘말하기’ 외에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음악과 글쓰기다. ‘클래식 사전’ ‘멜로디를 따라서’ ‘한낮의 음악실’ ‘저녁의 클래식’ ‘FM 가정음악’ 등 TV와 라디오에서 7년 넘게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해왔으며 각종 음악회 사회도 주기적으로 맡고 있다.
그가 클래식을 사랑하게 된 데는 클래식 마니아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듣고 자란 그는 방송을 하면서 클래식 관련 지식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그동안 자신이 직접 쓴 방송 원고들을 엮어 클래식 에세이 ‘마주침’을 펴내기도 했다. 대중에게 쉽게 음악을 설명하고 싶어 책을 냈다는 그는 “클래식을 엘리트적 교양주의가 아닌 대중이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주제로 하는 한국정책방송 KTV ‘북카페’ 진행도 그에게는 삶의 큰 활력소다. “1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 게 목표”라는 유정아는 “글쓰기는 평생지기”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5년 동안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말하기 이론을 담아 ‘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를 펴냈고, 내년에는 뉴욕에 있는 후배에게 짬짬이 보낸 음악편지를 모아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어려서 말하는 것보다 혼자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책을 내려면 마감에 쫓겨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조용한 밤 혼자 글을 쓸 때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어요.”
똑 부러지는 이미지와 달리 그의 내면에는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하다. 그를 잘 아는 한 후배는 언젠가 그에게 “선배, 가슴에 있는 집시의 기타를 꼭 울리고 죽어요”라며 그의 열정을 짚어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과거 뉴스데스크 앞에서는 볼 수 없던 생기 있는 웃음과 까무잡잡한 피부, 탄탄한 종아리 근육 등이 그의 진짜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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