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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사랑 전도사’정애리 나눔 일기

“조금만 떼어줘 보세요. 행복해질 겁니다”

글 이설 기자 사진 박해윤 기자, 유별남 사진작가 제공 || ■ 의상협찬 기비(02-514-9006) 이대 쵸이(02-312-1707) 캐롯투(02-463-8535)

2009. 07. 20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각박한 세상. 남을 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탤런트 정애리는 이 어려운 일을 실천하는 몇 안 되는 명사다. 그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다른 사람을 봐야 본인이 넉넉해진다고. 함께 아프고 감동하며 그 사람의 마음에 다다라야 내가 행복해진다고.

‘사랑 전도사’정애리 나눔 일기


“사랑을 나눠서 얻는 건 사랑이에요. 도우면 도울수록, 나누면 나눌수록 마음이 충만하고 행복해지는 걸 느낍니다.”
드라마에서 비치는 탤런트 정애리(49)의 이미지는 수더분함보다 도도함에 가깝다. 다른 이와 함께 울고 웃기보다는 아픔도 기쁨도 조용히 가슴에 담아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베푸는 것을 즐기는 따뜻한 가슴을 가졌다.
그는 선행을 많이 하는 연예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89년부터 아동시설인 ‘성로원’을 매주 방문하며 후원해왔고, 2004년 인연을 맺은 국제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을 통해 2백명 넘는 아이를 지원하고 있다. 또 서울 흑석동에서 2층짜리 쉼터인 ‘하래의 집’을 마련해 직접 운영한다. 그러던 사이 이런저런 내역을 더한 1년 기부금액이 1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지난 5월에는 월드비전 홍보대사 자격으로 베트남에 다녀왔다. 베트남 중부 산악지역에 위치한 흐엉후아라는 지역이었다. 4박5일간 그는 산간지역에서 힘든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아동과 노인들을 만나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나눔에 눈 뜨게 해준 ‘성로원’과의 소중한 인연
그의 나눔 활동의 시작은 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기회는 방송 프로그램 촬영을 하던 중 우연히 찾아왔다. 당시 ‘드라마 게임’이라는 단막극에서 그는 잃어버린 아기를 찾는 엄마 역할을 맡았다. 그 촬영지가 지금도 틈틈이 방문하는 노량진에 위치한 아동시설 ‘성로원’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려던 차 이상하게 발걸음이 무거웠어요. 잠깐 시간을 보내고 가는 것인데도 아이들이 품에 안기고 양팔에 매달리며 가지 말라고 엉기더군요. 아이들을 겨우 떼놓고 오면서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죠.”
그리고 두어 달 뒤. 그는 정말 성로원을 다시 찾았다. 다른 촬영을 위해 그 주변을 지나다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방문한 것이다. 그곳에서 2시간 동안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면서 힘든 동시에 희열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그건 나를 변하게 하는 운명적인 만남이었어요. 성로원을 방문한 뒤 어려운 아이들, 다른 사람을 돌아보게 됐으니까요. 버려지거나 맡겨진 아이들이 ‘엄마’라며 손을 내미는데, 그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사랑 전도사’정애리 나눔 일기

이후 그는 주말마다 부지런히 성로원을 찾았다. 숙제처럼 스스로에게 강요한 적은 없으나 발걸음이 저절로 그곳을 향했다. 처음에는 웃음이 예쁘거나 또랑또랑하거나 살가운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말을 잘 듣든 아니든, 예쁘든 밉든, 아이 하나하나를 모두 품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예쁨 받는 아이는 당당하게 사랑을 요구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아이는 눈치를 보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는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이부터 챙긴다. 그때보다 지금 좀더 넓고 깊게 아이들을 바라보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성로원에는 어둠과 빛이 공존한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넘치는 와중 끊임없이 새로운 식구가 오고 떠나는 이별이 반복된다. 이렇듯 늘 슬픈 일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날 성로원에 온 아이의 사연은 가엾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청소부 아저씨가 전봇대 아래 쓰레기를 수거하다가 아이를 발견했대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이가 신문지에 둘둘 말려 울지도 않고 얌전히 있었다는군요. 쪽지와 함께 과일바구니에 넣어 다른 집 앞에 버리는 것도 가혹한데, 아이를 쓰레기처럼 쓰레기장에 버리다니. 자꾸만 아이를 씻겨도 쓰레기냄새가 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어요.”
그는 월드비전 홍보대사를 맡으면서 매년 해외 사업장을 방문해왔다. 그가 방문한 나라는 가나, 모잠비크, 우간다, 콩고, 에티오피아, 르완다, 인도 등. 그는 이번 베트남 방문에서 만난 일곱 살 난 여자아이 호치메를 비롯해 모두 2백6명의 해외 아동과 1:1결연을 맺고 있다.

‘사랑 전도사’정애리 나눔 일기

해외 사업장 방문은 몸도 마음도 고된 여정이다. 대부분이 시골 깊숙이 위치해 몇 시간씩 비탈길을 달리거나, 식수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숙소에서 머무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촬영 중에 떠나면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꼼짝없이 대본을 외워야 한다. 그는 “한번 활동을 다녀오면 얼굴에 기미가 팍 오른다”며 웃었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계속 가게 돼요. 얻는 게 많아서 그런가 봐요. 특히 감사하는 마음이 부쩍 자라는 걸 느껴요. 예를 들어 제가 살찐 편이 아닌데도 현장만 가면 살이 찐 게 미안해져요. 굶어서 팔다리가 가느다란 아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죠. 그래서 평소에도 되도록 비싼 커피는 줄이려고 노력해요. 그냥 커피인데 제가 타 마시거나 자판기 커피를 마셔도 무방하니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하자고 다짐하는 거죠.”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앞에 두고도 손쓸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굴리는 부모와 질병에 걸릴 것을 알면서도 구정물로 목을 축이는 아이들. 나라에 상관없이 결연아동들이 거주하는 가난한 지역의 환경은 대개 비슷하다. 중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베트남 흐엉후아도 마찬가지였다.
“산간 소수민족 마을을 다녀왔어요. 그곳 아이들은 가난 때문에 일손을 돕느라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해요. 화장실조차 없는 집에서 사는 사람도 많고요. 이번에 결연을 맺은 아이는 감사하게도 부모가 살아 있었어요. 이 가족은 하루 2끼를 먹는데, 정말 반찬 하나 없이 밥과 소금만 먹어요. 유일한 단백질 반찬은 개울에서 잡은 피라미고요. 부모가 농사를 짓는 동안 아이들은 땅을 파서 산쥐를 잡아 팔더군요.”
그는 자칭 타칭 수도꼭지다. 눈물이 많아 고된 이들의 손을 잡을 때나 아픈 사연을 들을 때마다 목구멍이 아파온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사람은 한 할머니. 아들이 전쟁 잔재인 폭탄을 제거하다가 사고로 죽은 뒤 며느리, 손주와 지낸다고 했다. 달력도 시계도 없이 사는지라 본인 나이도 몰랐다.
“건강이 굉장히 나쁘셨어요. 온몸이 쑤셔 앉아 있지도 누워 있지도 못한 채 계속 뒤척이시더군요. 짤막한 헤어스타일에 표정이 없어 처음에는 무서운 인상이셨어요.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가 ‘아드님 보고 싶지 않으세요’라며 손을 잡아드렸더니 갑자기 펑펑 우시더군요. 순간 그분의 오랜 외로움이 가슴에 박혀 저도 한참 같이 울었어요.”

딸 지현이는 든든한 나눔 동지
그가 막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의도를 오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정치하려고 하느냐’ ‘이미지 메이킹이냐’라며 부지런히 어려운 이들을 찾는 배경을 의심했다. 봉사에 대한 의지가 분명한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선행은 다른 연예인에게도 큰 귀감으로 통한다. 이유리, 박탐희 등 여러 동료 연예인이 적극적으로 후원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든든한 동지는 딸 지현이다. 어릴 때부터 ‘성로원’에 함께 다니던 지현이는 이제 의젓한 고등학생이 됐다. 어릴 때 다른 아이들을 챙기는 엄마에게 “나보다 다른 아이를 더 사랑해?”하며 질투하던 지현이가 지금은 엄마보다 더 적극적이라고 한다.
“지현이가 태어나기 전에 성로원과 인연을 맺었어요. 그 전에도 아이들이 예뻤지만 아이를 낳은 뒤에는 그 마음이 더 깊어지더군요. 한편 성로원 아이에게도 내 아이와 똑같이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요. 한데 지현이도 느낀 바가 있는지 다른 아이가 저를 엄마라고 부르면 뾰로통하고 그랬어요. 다 자란 지금은 딸아이와 허심탄회하게 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요.”
20년 넘게 이웃을 도와온 그는 최근 가족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얼마 전 막내오빠가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난 일이 계기가 됐다. 그는 “그동안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서도 정작 피를 나눈 가족에게는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고 말했다.
“병을 알았을 때는 이미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어요. 그간 피붙이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덜컹했죠. 늦었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어서 병원을 수소문하고 호스피스 케어도 알아보며 오빠 곁을 지켰어요. 마음은 아프지만 이번 일로 가족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작정하고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다. 손 내미는 곳이 있으면 자연스레 도울 뿐이다. 그러다 보니 요 몇 년 새 기부금액도 나날이 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소외계층은 더 힘든데, 이럴 때일수록 내가 좀 더 노력하자’는 그런 마음이라고 한다. 그는 “봉사를 시작하면서 금전적으로 더 풍족해졌다. 돈은 그냥 흘러가게 해야지 통장에 있으면 어떻게든 나가게 돼 있다. 그래서 어차피 쓸 돈이라면 좋은 곳에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그의 나눔 계획은 뭘까.
“파양 당한 아이에게 관심이 많아요. 성로원에서 입양된 한 아이가 1년 만에 돌아온 적이 있어요. 새엄마 새아빠가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양부모가 ‘도벽이 심해서 못 키우겠다’며 돌려보냈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은 자라면서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도 하는데, 보듬을 생각 없이 바로 내친 그 분들이 야속했어요.입양은 귀한 일이에요. 하지만 간혹 아이가 아닌 어른들을 위한 선택이 될 때도 많죠.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어른들 사정으로 입양되고 파양 당한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나요. 두 번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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