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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빛나는 그녀

신영옥 데뷔 20주년 앞둔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

글·정혜연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 촬영협조·이희헤어(02-3446-0030)

2008. 11. 18

사람들은 신영옥을 ‘은빛 목소리를 지닌 성악가’라 부른다. 그가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서기까지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고 성악가로서의 고집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면서 그는 겸손의 미덕을 배운다고 한다. 얼마 전 영화음악 앨범을 발매하고 한국을 찾은 그와의 특별한 만남.

신영옥 데뷔 20주년 앞둔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


서정적이고 맑은 음색을 지닌 소프라노 신영옥(47). 그를 만나기 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강마에(김명민)처럼 깐깐하고 괴팍하지는 않을까 하는 선입견을 가졌다.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신영옥이라면 강마에 이상으로 자존심 강하고 고집이 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만나자마자 자신이 사온 빵을 건네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인터뷰에 앞서 11월부터 방영될 드라마 ‘천추태후’에 삽입될 채시라의 테마곡을 녹음하고 왔다는 그는 “아직도 귓가에 노래가 맴돈다”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어제는 오랜만에 언니들을 만나 같이 잤는데 이 노래를 불러줬더니 정말 좋아하더라고요(웃음). 한국에 오면 이런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 늘 설레요.”
공연이 없을 때는 주로 미국 뉴욕 맨해튼에 거주하는 그는 10월 초 영화음악 앨범 ‘시네마티크(Cinematique)’를 내고 잠시 귀국했다. 이번 앨범은 그가 직접 수록곡을 고르고, 영화의 느낌이 묻어나도록 노래를 부르는 등 각별히 신경 썼다고 한다. 그중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영화 ‘미션’의 주제곡 ‘넬라 판타지아’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그는 이 곡의 도입부를 특히 좋아해 만족할 때까지 수십 번 녹음했다고 말했다.
“뉴욕 맨해튼의 집 아래층에 극장이 있어서 시간이 나면 종종 영화를 보기도 해요. 하지만 최신 개봉작보단 옛날 영화를 더 좋아해요. 이번 녹음에 앞서서도 관련 영화들을 전부 다시 봤어요. ‘쇼생크 탈출’에서 교도소 죄수들이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이중창’을 들으며 감동받는 장면은 다시 봐도 뭉클하더라고요.”

피나는 노력 끝에 세계 최고의 무대 섰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픔 겪어
어려서부터 유난히 목소리가 고왔던 신영옥은 다섯 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KBS 어린이합창단 오디션을 봐 최연소로 합격하면서 성악과 인연을 맺었다. 선화예고 재학시절 두각을 나타낸 그는 79년 미국 유학을 떠났고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 당시 유명한 성악가 다니엘 페로를 사사했다. 그런데 졸업할 때가 되자 진로가 고민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영옥 데뷔 20주년 앞둔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

“요즘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면 ‘영옥아, 넌 지금도 유명하지만 학창시절엔 더 대단했지’라고 말해요.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에도 한국의 대학·예술원 등 여러 곳에서 강의를 맡아달라고 제의가 들어왔거든요. 그때 고민을 하다가 그냥 돌아가면 미국에서 힘겹게 공부한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 같아 ‘갈 땐 가더라도 세계 최고의 오페라극장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한 번 서보자’는 결심을 했죠.”
신영옥은 89년 꿈에 그리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 섰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 역을 맡은 것. 하지만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던 그는 캐스팅된 후 6개월 동안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피나는 훈련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수잔나는 굉장히 발랄한 역할이에요. 뛰어가서 피가로의 엉덩이를 치고 도망가는 장면이 있는데 남자의 엉덩이를 치는 게 민망해서 몇 번이나 실수했죠. 보다 못한 연출자가 ‘좀 더 세게 치고 도망가야지!’라며 호통치기에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서 잘 못하겠다’고 사정을 말씀 드렸죠. 그때부터 연출자와 조금씩 맞춰가면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다행히 첫 공연 평가가 좋게 나왔어요.”

신영옥 데뷔 20주년 앞둔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

내년이면 데뷔 20년을 맞는 신영옥은 한국에서 특별공연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으로 공연을 보러온 그의 부모는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딸이 종교음악이나 점잖은 바로크 음악을 하길 바라던 그의 어머니는 ‘오페라를 하지 말라’며 당부했다고.
“연습할 때도 늘 부모님을 떠올리며 열심히 했는데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 속상했어요. 오페라가 즐겁고 연기하는 것도 적성에 잘 맞는다고 설득하자 탐탁지 않아하던 어머니도 결국 승낙을 하셨고 이후 운 좋게 일이 잘 풀려 프랑스·캐나다·일본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게 됐어요.”
세계 각국에서 밀려드는 출연 제의를 소화해내느라 정신없이 지내던 그는 92년 무렵 한국에 전화할 때마다 어머니와 통화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간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딸의 활동에 지장을 줄까봐 투병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가족들은 그가 집에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교회에 갔다”는 등의 핑계를 둘러댔다고.
“93년 루치아노 파바로티와의 일본 공연을 앞두고 뒤늦게 어머니의 건강 상태를 알게 됐어요. 충격을 받고 귀국했다가 어머니의 불호령에 못 이겨 다시 공연 준비를 하러 떠났죠. 휠체어라도 타고 와서 공연을 보겠다던 어머니는 결국 공연을 한 달 앞두고 돌아가셨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아픔을 참고 연습해야 했어요.”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함께해왔기에 어머니의 부재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두 언니와 아버지 덕분에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낯선 사람을 만나도 먼저 알은체를 하고, 살갑게 인사를 나누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굉장히 까다로웠다는 것.
“세컨드 캐스팅이 들어오면 단번에 거절하고, 미국에서도 제가 사는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연 제의가 들어오면 안 한다고 했죠. 지금 생각하면 저도 대단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는 당시 자신의 한국 공연을 관리했던 둘째 언니에게도 차갑게 대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언니는 ‘아무리 가족이지만 이렇게 유별나게 굴면 누가 널 좋아하겠니’라며 나무랐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세계 수많은 성악가와 경쟁하면서 그도 점점 고집을 꺾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에 한국 들어와서 언니들을 만났는데 저보고 많이 부드러워졌대요. 귀가 예민해서 예전에는 공연 전에 누가 조금이라도 시끄럽게 떠들면 불같이 화를 냈거든요. 그때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했죠. 요즘에는 그냥 웃고 넘어가는 일이 많아 달라졌다는 소리를 종종 들어요(웃음).”

“운동·벨리댄스 등으로 건강관리, 언젠가는 평생 함께할 인연 만날 거라 기대해요”
한국에 오면 늘 아버지와 함께 보낸다는 그는 이번에도 한 달 동안 매일 아침식사를 함께했다고 한다. 팔순이 넘은 아버지는 아직도 과일을 먹기 좋게 잘라 그의 앞에 놓아줄 정도로 세 딸 중 막내인 그를 예뻐한다고.
“지금도 절 ‘예쁜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애지중지하세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바뀌는 것 같아요. 전에는 아버지가 늘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셨는데 지금은 제가 하니 말이에요. 오늘 아침에는 식사를 하는 도중 옷에 음식을 흘렸기에 닦으시라고 몇 번을 얘기했더니 ‘잔소리 좀 그만해’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아버지와 함께하는 재미 때문에 일정을 마치고 늦게 잠들어도 오전 7시면 일어나서 식사를 하죠.”
아직까지 미혼인 그가 안쓰러운지 아버지는 “이제 좋은 사람 만나야지” 하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고. 그러면서도 “너무 나이 차이가 나면 힘들고, 연하는 맞춰줘야하니 안 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가끔 소개가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먼저 사진을 보시고 그 다음 언니들이 봐요. 별 소리를 다 하다가 결국은 ‘이 사람은 안 되겠어’라며 사진도 안 보여주죠(웃음). 누군가를 만나고 싶기는 한데 괜히 나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겁이 나기도 해요. 언젠간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 생각해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날씬한 몸매를 지닌 그는 평소 꾸준히 운동하며 건강관리를 한다고 한다. 호기심이 많아 피트니스센터에서 운영하는 운동 프로그램을 골고루 배워보기도 한다고. 한때는 권투를 배웠는데 연습하던 중 잘못 맞아 코피를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무용을 배워서 춤추는 건 지금도 좋아해요. 최근에는 벨리댄스가 재미있더라고요. 의상을 갖춰 입고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박력 있게 흔들어야하는데 처음에는 어렵더니 금세 익숙해져서 한동안 계속 빠져 살았죠. 그 덕분에 많이 먹는 편인데도 살은 안 찌는 것 같아요.”
내년이면 그는 세계무대 데뷔 20주년을 맞는다. 우연찮게도 그를 주목받게 했던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역으로 내년 한국에서 공연을 갖는다고.
“수잔나는 제게 있어 특별한 역할이에요. 처음 오페라를 시작하면서 맡은 배역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번 맡았는데 할 때마다 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거든요. 내년에는 또 어떻게 수잔나를 부르게 될지 저도 궁금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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