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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계수전문기자의워파인터뷰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제 2의 전성기’ 맞은 요즘 생활 & 감춰둔 그림 지상공개

사진·조영철 기자 / 그림·조영남

2008. 11. 18

조영남의 주위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너도나도 그와의 만남을 반기는 분위기다. MBC 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 진행자로 인기를 얻고 있는 그는 자신에 대한 ‘안티’ 팬들이 확 줄어든 걸 실감한다고 한다.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요즘 가장 ‘잘나가는’ 사람으로 꼽히는 ‘멀티플레이어’ 조영남, 가수로서뿐 아니라 방송 진행자·화가·작가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를 만났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기자의 조영남(64)에 관한 기억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됐지만 비교적 생생하게 떠오르는 작은 에피소드는 대강 이렇다.
기자 초년병 시절, 영국의 팝스 오케스트라 지휘자 스탠리 블랙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리허설장에 찾아갔을 때였다. 큰 녹음기를 어깨에 멘 한 라디오 프로 진행자가 끼어들어 먼저 5분만 인터뷰를 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는 20분 가까이 시간을 쓰더니 심지어 녹음 스위치가 안 켜져 있었다며 말릴 틈도 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해댔다. 기자 차례가 됐을 때 스탠리 블랙은 다른 약속이 있어 떠나야 한다며 서둘렀다. 난감했다. 그때 스탠리 블랙의 무대 게스트로 그곳에 있던 조영남이 라디오 진행자에게 “너무하다”고 하면서 “어떡하냐”며 내 걱정을 해주었다. 다행히 스탠리 블랙은 친절한 사람이어서 기자도 그의 약속장소로 함께 이동해 잠시 기다렸다가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탈한 조영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유명인인데 이런 사소해 보이는 남의 일에 ‘공분(?)’을 드러내며 거들어주다니! 며칠 후 스탠리 블랙의 무대에 선 조영남은 유머 감각을 겸비한 세련된 무대 매너로 분위기를 한껏 띄워 큰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어쨌든 그때 일은, 기자에게 당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던 그의 ‘비호감’ 이미지를 털어내주었다.
재작년, 지인의 손에 끌려 시끌벅적한 ‘조영남 모임’에 나갔을 때였다. 지난 얘기를 하자, 조영남은 물론 전혀 기억을 못했다. 그는 여전히 소탈하고 유쾌했다. 그날 모임에는 기자들이 많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일간지 선배 기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웬일? 평소 똑 소리 나는 모습은 간 곳 없이 서로 ‘죽이는’ 말을 거침없이 해대며 낄낄댔다. 이른바 청담동에서 중학생 수준으로 논다 하여 ‘청담중학’이라 붙여놓은 모임 이름 그대로였다.
이후 선배 기자들과 함께 몇 번 더 조영남을 만났다. 그는 늘 점잖 빼는 일 없이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사람들을 웃겨주었고, 자신도 온몸으로 웃어 젖혔다. 60이 넘은 그의 나이를 잊게 만들었다. 자신에 대해 포장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었다.
새삼스럽게 조영남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는 것은 기자에게 좀 쑥스러운 일이었다. 약속을 잡기 위해 그의 말대로 오전 10시쯤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을 만나야 한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석 달간 매일 만나도 된다”며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인터뷰 장소는 그의 청담동 빌라.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창가에 놓인 파란 잎사귀를 담은 하얀 화분들과 대비되는 조영남의 화투나무 화분들. 조영남의 자화상. 조영남이 설치미술이라고 일컫는 침실에 진열된 60여 개에 이르는 안경들. 곧 출간을 앞두고 있는 이상에 대한 원고. 요즘 빨간 펜으로 꼼꼼히 교정을 보는 중이다.(왼쪽부터)


연예인 중에서 가장 비싼 집에 사는 남자
“어머, 예쁜 화분이 놓였네요.”
탁 트인 유리창으로 한강과 영동대교가 한눈에 들어오는 거실. 앙증맞은 하얀 화분 수십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화분 안에 돋아난 파란 잎들의 모양도 가지가지, 다양한 종류인 듯하다. 지난해 조영남의 집에 갔을 때는 단출한 가구에 그림들만 놓여 넓은 거실이 다소 썰렁해 보였는데, 작은 화분들이 즐비하니 한결 환하고 생기가 돌았다.
“내가 만든 아트하고 신이 만든 아트하고 뭐가 다를까, 대놓고 비교를 해보자 해서 한번 키워보는 거지. 결국 내가 신보다는 못해. 그런데, 내 건 생명력은 없지만 아름다움은 추가됐지.” 이렇게 농을 던지던 조영남이 이어 말한다. “집안에 식물 키워본 건 처음이야. 재미 삼아 산 지 석 달 됐어. 사정없이 자라니 겁나대. 처음엔 신기해하고 열광했지. 근데 내가 한 가지 결함이 있어. 오래 열광 못하는 거….”

그의 집은 올봄 ‘연예인 집 중 가장 비싼 집’으로 첫손에 꼽혔다. 면적 617㎡(187평)에 정부 발표 공시지가가 40억4천만원(당시 추정시가 1백억원)으로 알려진 것.
“주거공간으로 더 좋은 집은 있겠지만 이 집처럼 한강을 가까이 끌어안고 있는 집은 없을 거야. 물 가까이에 있다는 점에서 최고지. 집은 좋은데, 가구는 초라해. 빈곤층 가구야. 테이블, 침대, 장까지 집에 있는 모든 가구를 내가 직접 만들었어.”
조영남의 집 공간 배분은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보게 한다. 넓은 거실에는 큰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가 그린 그림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연주실 같기도 하고 화실 같기도 하다. 안쪽으로 삼면에 책이 빼곡히 들어찬 서재가 거실에 이어 가장 큰 공간이다. 그가 만든 소박한 1인용 침대가 있는 침실은 넓지 않다. 주방 또한 여느 공간에 비해 좁다. 평소 소식을 하는 그는 성대하게 차려 먹는 일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7년 전 이사했을 때 작은 빌라였던 그의 집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재개발에 들어가 그의 재산목록 1호가 됐다.

‘그림 그리는 일에 중독된’ 가수 조영남
그는 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얘기를 나누면서도 붓질을 멈추지 않는 게 습관이 돼 있다. 보통 예술가들은 작품에 매달리며 고통스럽다고 말하지만 그는 여느 작가와는 다르다.
“요즘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재미있어. 어느 정도냐, 아침 7시에 일어나면 방송하러 나갈 때까지 7시간이 나잖아, 그림 그릴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있다는 게 해피한 거야. 내가 언제부터 이랬지? 생각해보니 1년이 채 안 됐어. 난 뭐든지 느려. 낚시꾼은 큰 고기 잡으려 하고 등산가는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하잖아. 근데, 난 아냐.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 일종의 중독자야.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내가 조물주가 된 느낌이 들어. 고통? 그거 있으면 왜 해.”
역시 조영남이다. 그는 덧붙인다. “젊은 여자들이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안 놀아주잖아. 같이 놀자고 할 수 없고. 참 딱한 일이야. 놀아주면 내가 왜 해. 난 재미추구자인데….”
또 예의 ‘재미론’을 펼친다. 저녁시간 그는 여자친구들과 수다 떨고 낄낄대는 일이 가장 재미있다고 말한다. 수다 외에 쇼핑하고 영화 보는 일이 재미있다고 하니 젊은 여친들과 보내는 시간이 즐거울 법하다. 그는 아트를 죽기 살기로 하지 않고 재미를 추구하면서 대충대충 하다가 끝내야지, 일찍이 마음을 먹었다고 말한다.
“헤밍웨이나 반고흐같이 고뇌에 짓눌려 자살하는 예술가는 위대한 거지. 하지만 난 과도하게 쏠려서 균형을 못 잡은 거라 생각해. 난 그럴 필요가 없다, 생각하지.”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의 글을 조각조각 맞추어 살펴보면, 가수생활을 했으면서도 화가로서 꽤나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정식으로 미술수업을 받은 일 없이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해야 했으니, 고민과 혼란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사생대회에 출전, 고교시절 미술부장으로 자질을 드러냈던 그는 유럽 현대 작가들의 화풍을 연구하며 습작에 몰두했다. 73년 그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김민기(‘아침이슬’ 작사·작곡)의 소개로 만난 윤명로 선생(전 서울대 미대 학장)의 도움을 받아 안국동 소재 한국화랑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 이듬해 그는 미국으로 유학, 신학대학에 다니면서도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고 뉴욕·워싱턴·LA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미술에 관한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몇 배 더 공부하고 몇 배 더 시간을 할애해야 미술을 전공한 사람을 따라갈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최대치의 열의를 낼 수 있었다… 나는 독자적인 미술학습법을 개발했다. 미술 자료나 도록에서 눈에 띄는 작품들을 오려내 따로 분류하는 일이었다. 물론 유명·무명을 망라했다. 내가 좋아해서 수집한 그림들과 최첨단을 치닫는 현대의 경향들을 비교하면서 나는 나의 취약점을 순발력 있게 메워갈 수 있었다….’(조영남 저서 ‘태극기는 바람에 펄럭인다’ 중에서)
그는 “산을 맘먹고 탄 건 그림이 처음”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는 국내외에서 50회가 넘는 전시회를 열며 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렸다. 3년 전 한 미술전문지에서 인사동을 지나가는 사람 1천 명에게 “화가 하면 누구 이름이 떠오르나”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조영남은 당당히 7위에 올랐다. 그는 재작년 전주에서 무려 4백50점의 작품을 선보인 개인전을 최고의 전시로 꼽는다. 지난해 서울 힐튼호텔에서 ‘조영남 현대미술쇼’를 열어 화제를 모았던 그는 올 연말에도 가나아트에서 한 달간 개인전을 열 계획을 갖고 있다.

친일 파문 때 그를 살린 ‘여친’과 ‘남친’
그림값을 묻자 그는 선선히 5백만원에서 2천만원 사이라고 말해준다. 조영남이 그림의 소재로 삼는 것은 화투·바둑·태극기·초가집·악보 등이다. 특히 그의 화투 그림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화투를 즐겨 그리는 이유를 설명하다가 그는 목청을 드높인다.
“난 편견에 관심이 깊어. 처음 화투를 그린 건 화투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였지. 실제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투를 제일 좋아하면서도 천시하잖아. 일종의 저항이었던 셈이야. 예전엔 화투 그림을 어디다 거냐, 했는데 이젠 몇 백만원 주고 사가. 내가 화투 그림으로 유명해졌으니까 편견 이겨낸 거 아닌가?”
그는 이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하고 시작되는 노래 ‘화개장터’로 산맥 하나를 두고 사이가 갈렸던 지역주의 편견에 저항했다고 말한다. 세 번째 저항이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이란 책을 펴내고 시도한 일본과의 화해문제였는데, 그만 실패했다고.
“난 일본이 이웃나라인데 1백년간 미워했으면 충분하다, 대대로 미워하면 되겠냐, 이제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 했던 거야. 이웃사랑, 다 용서하고 사랑하자는 게 기독교 정신이잖아. 저항에 실패했지만 덕분에 내가 성숙해졌으니 얻은 게 있지.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처음 터득했거든. 거기서 깨달은 교훈이 엄청나.”
연일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며 매국노 같은 ‘친일파’로 몰려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 그는 자살하는 사람의 심경을 이해하겠더라고 했다. 그때 그에게 힘을 준 것이 각계각층의 친구들이다. 또한 여자친구들은 수시로 그에게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 위로해주었다. 이름난 ‘여친’들로 그는 행복 디자이너 최윤희, 방송인 유인경, 개그맨 이경실 등을 꼽는다. 가장 가까운 남자친구들로는 이장희·김민기·송창식 등 40년 가까이 형제같이 지내온 이들을 꼽았다.
“방송에서 잘리고 일이 다 끊기니까 사회로부터 왕따당하는 기분이 드는 거야. 꼭 어딜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궁리해봐도 마땅하게 갈 데가 없더라고. 그때 울릉도에서 장희가 찾아온 거야. ‘농사 잘되냐’ 했더니 ‘농사 아무나 짓는 게 아니야. 김매려고 30분 앉아 있으려니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 하잖아. 그때 깨달았지. 장희는 농사꾼 되겠다고 유토피아를 찾아갔는데, 그게 안 되면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는 거구나, 장희 말 듣고 어디로 도망가겠단 생각을 접었어.”
그때 그는 ‘청담중학’을 개설했다고 한다. 테이블 2개, 불판 2개를 놓고 같은 식당에 매일 10여 명이 모여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낄낄거렸다. 그중 절반 정도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이었고 나머지는 직업이 다양했다.
“중 2, 3 때가 제일 재미있었잖아. 매일 키득키득대면서 할 말이 많았지. 그때로 돌아간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거야. 단순히 먹고 낄낄댄 것뿐인데, 그처럼 소중한 것이 없어. 최고 약효 있는 삶의 비타민이었던 거지. 그렇게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1년 반을 보냈어. 위기국면을 전환시킨 거야.”
그때 그는 삶에서 중요한 것 하나를 발견했다고 진지하게 말한다. 뭔가 했더니, 정의 우정 사랑, 거기에도 돈이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매일 10여 명씩 모이려니까 돈이 들더라고. 사람들 부담을 없애기 위해 내가 100% 돈을 다 냈거든. 몇 개월 지나니까 심각한 적자가 생기더군. 내가 평생 ‘돈’의 역할을 모르고 살 뻔했지. 정치인이 돈, 돈 하는 게 왜 그러는 건지 실감이 나더군. 그때까지 돈을 모르고 살았어. 그래서 오히려 돈이 많이 들어온 건지도 모르지.”
청담중학은 ‘학생이 너무 많이 늘어’ 문을 닫게 됐다고 한다. 2006년 11월 그가 MBC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진행자를 맡아 매일 방송을 하게 된 것이 공식적인 이유가 됐다.

청취율 1위 방송 진행 맡으며 ‘안티’ 확 줄어
올여름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조영남이 진행하는 방송 ‘지금은~’이 라디오 프로 청취율 1위를 차지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방송을 즐겨 듣는 이유로 10명 중 3명이 ‘진행자의 진행 솜씨가 좋아서’라고 응답했다. 그는 지난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라디오부문 신인상을 탔다.
“날 좋아하는 팬층이 넓어진 것 같아. 특히 지방 팬이 늘어난 걸 실감해. 라디오를 통해 내가 길게 떠드는 걸 들으면서 생각보다 바람둥이 같지 않고, 이기주의자로 알았는데 그것도 좀 아니고 하는 식으로 나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



그는 이어서 또 조영남 특유의 너스레를 떨기 시작한다.
“사실 난 비관 자살해야 해. 바람둥이란 소문에서 헤어날 수 없으니 얼굴 내놓고 살 수 없잖아. 그런데 주위에서 그것도 안 된다는 거야. 지금 죽으면 노환으로 죽은 거니 자연사로 처리된대.”
조영남은 겉보기와 달리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다. 너스레를 떠는 그의 모습에선 종종 ‘위악적인’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난 변명을 싫어해. 남자가 변명하는 거 치사하잖아. 비굴한 표정 짓기 싫으니까 ‘위악’의 가면을 쓰고 사는 거지. 그래, 나 그렇다 어쩔래? 하는 식으로.”
지난 8월 조영남은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가졌다. 70인의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데뷔40주년 기념 무대였다. 이 공연의 기획자에 따르면 전에는 VIP석 티켓이 먼저 나갔는데, 이번에는 값이 싼 학생석이 먼저 팔려 조영남이 서민층에 얻은 인기를 실감했다고 한다. 공연 일주일 전 티켓이 동났다고 하더니, 공연 때 관객이 조영남에게 보여준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섹스가 개입되지 않는 제 2, 제 3의 사랑 중요해
인터뷰 도중 상대가 여자로 짐작되는 전화가 종종 걸려왔다. “요즘도 젊은 여자들에게 전화가 자주 오나보다”고 하자 그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 전화 온 친구의 예를 들자면 이래. 용인에 있는 미술관 행사 때 이곳으로 돌아오려는데 차가 없었어. 그곳 관장이 한 방향이라며 미모의 여자를 불러왔지. 같이 차 타고 얘기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거야. 연락을 주고받게 됐지. 몇 마디 해보면 마음에 드는지, 자기하고 통하는지 금방 알 수 있잖아.”
그는 요즘 서너 명의 젊은 여친을 만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인지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섹스가 개입되면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섹스를 배제한 만남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균형을 잘 맞추면 돼. 결국은 나하고의 싸움이지. 한 여자와 맺어지면 그걸 견딜 수 있겠느냐, 하는 건데 자신이 없더라고… 결론은 프러포즈 안 하고 아저씨-조카나 오빠-동생처럼 만나서 편하게 밥 먹고 영화 보는 게 좋다는 거야.”
조영남은 80이 가까운 할머니에서부터 동네 여섯 살짜리 꼬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친이 있다고 자랑한다. 남자친구들과의 사랑도 강조하며 동성애가 아닌, 남자들의 진한 사랑을 강조했다. 우정이라는 단어는 약하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길게 이어졌다.
“우리는 보통 섹스가 개입된 사랑을 제 1의 사랑으로 생각하잖아. 그런데 내 말은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사랑을 모르고 산다는 거야. 중간 중간 끊어지는 여자와의 사랑과 달리 남자와의 사랑은 훨씬 더 길고 깊이가 있지. 이 제 2의 사랑도 굉장한 건데 우정이라는 틀에 가두어 홀대하는 경향이 있어. 또 섹스를 배제한 여자친구들과의 제 3의 사랑도 현명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봐. 섹스가 개입되면 독점욕이 생기고 애정 균형 문제로 다툼이 생겨. 저울도 균형 잡기 힘든데 무슨 재주로 쌍방이 주장하는 균형을 맞추겠냐고. 제 1의 사랑이 아옹다옹하다 끝을 내는 반면, 제 2, 3의 사랑은 충분히 활용가치가 있어. 동성친구는 그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고 이성친구 또한 야릇한 맛이 있단 말이야, 다툴 필요 없으니 얼마나 편해. 근데 왜 잘 안되냐, 제 1 사랑에만 투자하고 여유가 없으니 투자를 못하는 거지. 애인 아닌데 왜 시간낭비하냐 생각하거든. 실제로는 더 정겹고 재미있는데 모르고 지나가는 것 같아.”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웬만해서는 결혼하겠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덧붙인다. “두 번 결혼생활을 해봤는데 세 번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자신 없어.”
그에게는 딸 은지 말고도 제 2의 가족이 있다고 한다. 매일 그의 집을 찾는, 18년간 함께 일해온 매니저 최철호씨와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집안 살림을 도맡아 20년간 함께 살고 있는 주복순 할머니가 그들이다. 그 누구보다 다섯 살 때 입양한 딸 은지는 요즘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존재다. 요즘 재수학원에 다니는데 패션 감각이 특출하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난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고 두 아들하고도 헤어졌어. 두 번째 아내하고도 깨졌지. 난 가족을 모르고 산 사람이야. 실제 가족이란 개념을 나한테 심어준 건 은지야. 나한테 누구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걸 은지가 일깨워줬어. 은지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됐지.”
조영남은 은지에 대해 말하며 신이 났다. 친구들과 아주 원만하게 잘 어울린다고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내가 바라는 스타일의 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같이 사니까 나를 닮나봐. 자기 일에만 관심 쏟고, 낯선 사람들 많이 있는 앞에 나서는 거 극도로 싫어해. 파티 같은 거 싫어하고. 나도 소수가 모이는 모임을 좋아하지 사람 많은 건 싫어하거든.”
은지는 인터뷰 동안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낯을 많이 가린다는 은지는 자신의 방에서 나와 잠시 주방에 들렀다 서둘러 외출하곤 했다.

조건 없는 사랑 일깨워준 딸 은지
그는 사후 재산 배분 내용을 한 시사월간지에 직접 쓴 ‘미리 쓰는 유서’에서 밝혔다. 은지가 4분의 1, 미국 사는 그의 두 아들이 각각 4분의 1, 세상을 뜰 때 곁에 있는 여자 4분의 1, 이렇게 남기겠다고 한다. 그가 미리부터 주변 친구들에게 일러두곤 했다는 유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내가 죽게 되면 내 시체는 처음 발견한 사람이 담요나 홑이불 같은 데 둘둘 말아서 차 뒷자리나 트렁크에 싣고 곧장 화장터에 달려가 태워라. 돌아서기가 섭섭하면 내 시신이 다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기서 한줌 재를 싸주면 그걸 들고 한강 영동대교에 올라가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쳐다봐왔던 한강물에 뿌려라. 누가 혹시 ‘영남이 어디 갔냐?’고 묻거든 그때 덤덤하게 ‘걔 죽었다’고 대답해라.’
그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하면서도 쓸쓸하다. “찾아갈 납골당도 없는 것이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한다. 지인들이 조영남의 유물 한 점을 갖고 가서 때마다 기념한다면 어떡하냐고 묻자, “그건 자유지!” 응수한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조영남은 올해 안으로 스물여덟에 요절한 시인 이상에 대한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이상이 보들레르나 랭보보다 훨씬 뛰어난 ‘시문학의 황제’라고 일컫는다.
“이상은 서울 공대 출신으로 건축을 공부하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게 됐지. 네가 뭘 안다고 우리 글동네 와서 글을 쓰냐, 기존 문단에서 배척당했어. 박수 한번 못 받아보고 악전고투하다 죽었지. 동경에서 꿈을 펼쳐보이리라 했는데 몸이 허약해서 죽었어. 유행가 가수로 그림 그리고 글 쓰는 나 같은 사람은 이상 같은 아웃사이더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런데 생태적으로 욕먹어야 되는 거다, 하며 그간 잘 참았지. 이제 내 시대가 온 것 같아. 변방에서 이름이 나 이제 메이저 화랑에서 전시를 하게 됐으니….”
조영남의 무기는 무엇보다 ‘솔직함’일 터다. 그런데 그 앞에서 “솔직히”라는 말을 썼다가는 곧바로 면박을 당한다. “그럼 그간의 말은 솔직하지 않았다는 것이냐”는 화살이 날아온다. 그런데, 이제 60대 중반에 들어선 그가 인생을 바라보는 눈은 그가 날리는 거침없는 말처럼 화끈하지는 않다.
“삶은 무엇이든 반이야. 반은 쓸쓸하고 반은 안 쓸쓸하지. 반 기쁨이 있으면 반은 슬픔이 있고. 반은 환희고 반은 스트레스고. 경제상황도 반이 공포면 반은 낙관이 되는 거야.”
인터뷰를 마쳤을 때 그는 근처 단골 카페에서 차나 한잔 하자며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을 불렀다. 순식간에 여럿이 둘러앉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그가 유머를 들려주는데, 늦은 시간 그의 휴대전화가 여러 번 울린다. 카페에서 나갔을 때 운동복 차림의 발랄한 젊은 아가씨가 환하게 웃으며 조영남의 팔짱을 낀다. 그는 귀여운 여친의 애교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일명 ‘힐리스’라 불리는 바퀴 달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조영남씨는…
작고한 부친과 모친의 기억이 다른 까닭에 1944년과 45년 황해도 남천과 신천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됨. 1·4후퇴 때 온 가족이 충남 예산군 삽교면으로 이주, 제 2의 고향이 됨. 한양대 음대, 서울대 음대 중퇴. 69년경 ‘딜라일라’라는 번안가요로 데뷔, 대중가요 스타로 이름을 날림. 7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플로리다 트리니티 신학교 졸업. 82년 귀국 후 다시 가수로 활동하며 ‘화개장터’ ‘지금’ ‘제비’ 등의 음반을 냈음. ‘조영남쇼’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이 만난 사람’ 등의 방송 진행. 현재 MBC 라디오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진행 중. 73년 첫 미술전시회를 연 후 국내외에서 50여 회의 개인전을 연 화가. ‘조영남 양심학’ ‘예수의 샅바를 잡다’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등 10여 권의 저서를 발간.

‘여친’ 방송인 유인경이 말하는 ‘내가 본 조영남의 매력’
가수·화가·작가로서의 장점이나 역량은 전문가가 평가할 분야이나 ‘인간복덕방’이라고 소문날 만큼 광대한 대인관계 면에서 보자면 대한민국 중년, 아니 노년 남성으로선 매우 드문 덕목을 갖고 있음.
여자와 대화와 놀이가 가능 골프·축구·섹스 이야기 외에 미술·쇼핑·영화·연예인 뒷담화까지 화제가 풍부하기 때문에 영감과 대화한다는 생각이 안듦. 미술관 관람부터 새벽 동대문 시장·양재동 꽃시장 가기·면세점 아이쇼핑 등을 할 수 있는 영감은 한국에선 본 적이 없음.
맞장구의 대가 별 시시한 이야기도 매우 집중해서 들어주고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듯 몸을 쓰러뜨리며 웃어줌. 반면 좀 썰렁해지면 ‘앞으로 30분간 침묵’ 등의 경고를 날려 근신하게 해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해줌.
끈적거리지 않음 여자, 그것도 무조건 젊은 여자를 좋아하며 확실히 호감을 표현함. 그러나 느글느글하고 찐득거리는 시선을 보내거나 호시탐탐 접촉의 기회를 노리는 이와 달리 매우 쿨한 태도를 견지함. 덕분에 ‘사심 없는’ 여성들과 오랜 우정이 지속가능함.
명쾌한 분석 어떤 복잡하고 억장 무너지는 일도 단칼에 판결(?)을 내려줌. 예컨대 일과 관련한 소송이 40여 건이라고 걱정하는 한 기자에게 “아직 1백 건도 안 됐는데 무슨 엄살이야”라며 정작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식의 말을 잘해줌.
이런 이유로 잘생기지도, 젊지도, 선물공세를 퍼붓는 것도 아닌데 다양한 여성이 곁에 있는 것으로 사료됨.

‘남친’ 기자 홍현종이 말하는 ‘내가 아는 인간 조영남’
재미있는 것과 없는 것, 하고 싶은 일과 싫은 일, 내게 맞는 사람과 아닌 사람… 이런 것들에 계산이 아닌 본능으로 선택과 집중을 ‘절묘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조영남이다. 삶의 에너지를 이곳저곳 교묘히 분배해서 신나게 살고 특히나 젊은 여자와 히히덕거리기를 태생적으로 즐기는 그에게 예절·관습 같은 세상사(事) 규범은 어쩐지 스멀스멀하다. 다시 태어나도 양반은 못 될, 그러나 시대를 멀찌감치 앞서가는 탁월한 예인(藝人), 그가 조영남이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1 화투시리즈 중 하나인 ‘극동에서 온 꽃’.
2 청계천 풍경. 73년 처음 그린 유화인데 러시아 출신 작가 니콜라 드 스타엘의 기법을 흉내내서 그린 그림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수억을 주고 팔라 해도 안팔고 내가 갖고 있다. 지금은 이처럼 멋진 그림을 못 그린다. 왜? 때가 묻었기 때문이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3 천지창조. 화투 솔에 성경책 창세기를 뜯어붙인 것이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내가 처음 그림의 모티브로 삼은 것이 화투였다. 화투 그림에 사람들의 거부감이 많았으나 지금은 내가 화투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굳어졌다. 화투에 대한 편견이 없어진 셈이다.
4 사진작가 만 레이의 연인들 - 입술을 세로로 세워 조영남화시킨 것이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1 아트 & 뮤직. 나는 화투에 이어 바둑알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다. 바구니는 바둑알을 반으로 자른 모양과 같다. 바구니는 또한 초가지붕을 연상시켜서 좋았다. 또 하나의 소재로 삼게 됐다.
2 음악. 난 음악과 미술을 하나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음표를 미술 소재로 삼았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3 바둑판 변주곡. 화투를 그리다 보니 어느 날 바둑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둑판이 현대미술 자체로 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미술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직선·곡선·점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1 밀레의 만종을 패러디한 것. 조영남과 주복순 할머니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우리 할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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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명한 신윤복의 달빛 아래 연인들. 바둑판 소재로 배경을 현대화시킨 것이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3 어머니의 고무신과 황포 돛대. 어머니의 고무신 위에 거대한 황포 돛대를 달고 온 천하를 떠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그림이다.
청취율 1위 라디오 프로 진행자 요즘 ‘뜨는’ 화가 조영남

1 무제. 가끔 나도 설명이 안 되는 추상화를 그리곤 한다.
2 초가집. 난 어렸을 때 초가집에서 살았다. 초가집은 나의 영원한 모티브다. 초가집은 그림에 있어서 어머니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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