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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남자의 삶

재미교포 사업가 피터 김

가난한 미국 이민자의 성공 그린 드라마 ‘로비스트’ 실제 모델!

기획·김명희 기자 / 글·윤고은‘연합뉴스 기자’

2007. 11. 23

가난한 미국 이민자가 무기 로비스트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SBS 드라마 ‘로비스트’에서 이민생활을 어렵게 시작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재미 사업가 피터 김의 경험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이민, 숱한 고생 끝에 뉴욕에서 성공한 사업가 반열에 오른 피터 김을 만나 성공 뒤에 감춰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재미교포 사업가 피터 김

드라마 ‘로비스트’의 장면들. 피터 김은 숱한 고생 끝에 로비스트로 성장하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 장진영과 송일국의 실제 모델이다.


지난 10월 초 SBS 드라마 ‘로비스트’의 방영을 앞두고 재미 로비스트 린다 김이 많이 회자됐다. 장진영이 연기하는 여주인공 마리아의 실제 모델이 린다 김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이에 대해 “기획단계에서 린다 김을 인터뷰하고 그의 자서전을 참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검토 결과 드라마에는 반영하지 않았다”면서 “드라마가 모델로 삼은 인물은 재미 로비스트 로버트 김과 재미 사업가 피터 김”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피터 김은 누구일까. ‘로비스트’ 방영을 앞둔 지난 9월 말 짧은 일정으로 내한한 피터 김을 만났다. 나이 43세, 한국명 김현석인 이 남성은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젠틀맨이었다.
그는 미국 뉴욕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꼽힌다. 91년 공항과 카지노를 오가고, 시내투어를 하는 관광버스회사 ‘스카이 라이너’를 창업해 지금껏 승승장구하고 있다. 현재는 버스 54대, 직원 1백20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90년 자신과 같은 이민 2세인 아내를 만나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둔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그가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그야말로 수많은 역경이 있었다. ‘로비스트’에는 피터 김의 바로 그러한 경험담이 들어 있다. 가난한 이민자인 주인공 마리아와 해리(송일국)가 미국에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 곳곳에서 피터 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피터 김이 가난한 미국 이민자가 된 사연부터가 극적이다.
“1980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정부가 과외금지령을 내렸어요. 그런데 몰래 과외를 받다가 적발됐죠. 당시 신문에 크게 났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어요. 첫번째 적발 사례였거든요. 총 5명이 걸렸는데 어린 마음에 동네 가판대에 깔린 신문을 다 사서 버렸어요. 주변 사람들이 신문을 읽지 못하게 하려고요. 정학 30일 처분을 받았고 학교에서는 매일 맞으며 반성문을 썼어요. 3학년에 올라가 간신히 졸업일수를 채운 후 곧바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왔어요. 도저히 한국에서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버스 사업하며 온갖 견제와 협박 다 받아
80년대 비밀과외를 받았을 정도면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했다는 의미인데 이민 생활은 왜 험난했을까.
“돈이 있어도 그건 부모님의 돈이죠. 미국에서 부모님은 델리 가게에서 일하셨어요. 저는 대학을 마치고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다가 버스 사업이 비전이 있어 보였어요. 부모님께 5천 달러를 빌려 버스 한 대를 구입한 뒤 제가 직접 몰면서 관광객을 태우고 다녔어요. 당시 그런 관광버스 사업은 중국인과 이탈리아인들이 꽉 잡고 있었는데 텃세와 견제가 엄청났죠. 아침에 일어나면 버스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어떤 날은 총으로 유리창을 난사한 경우도 있었어요.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관광지에서 새벽부터 호텔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등 자리싸움도 대단했고요. 얼마나 치열하냐 하면 2003년에는 운전사끼리 싸우다 두 명이 죽기도 했어요.”

‘로비스트’는 가난한 미국 이민자 마리아가 고생 끝에 로비스트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로 전반부는 마리아의 고단한 미국 생활을 담는다. 애초 제작진은 마리아 가족이 작은 슈퍼마켓을 경영하는 것으로 설정했으나 미국 헌팅 과정에서 피터 김을 만난 뒤 관광버스 운전을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때문에 슈퍼마켓에서 잡일을 하는 설정이었던 장진영이 졸지에 터프한 버스 운전사로 둔갑하게 됐다고 한다.
피터 김이 버스를 몰던 시절의 고생담은 고스란히 마리아와 그의 아버지 이야기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서 좀 더 극적인 장치가 추가되기도 했다. 단적으로 버스 유리창이 깨졌던 실화는 드라마에서 아예 방화로 버스가 전소되는 것으로 바뀐다.
“제가 버스 6대를 가지고 사업을 하던 94년, 하루는 중국 갱단이 찾아왔어요. 보호비 명목으로 5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더니 나중에는 가족까지 위협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마련해 갱단을 직접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놀라더군요. 자기들이 돈을 받으러 간다고 했는데 직접 돈을 들고 찾아온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대요. 저는 그 자리에서 ‘돈을 내놓기는 하지만 너희들한테 보호를 받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가족들을 협박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어요.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제가 미국에 건너와 고생한 이야기를 했어요. ‘나도 근근이 살아가는데 같은 이민자들끼리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돌아왔는데 사흘 뒤에 누가 사무실로 쓱 들어와 돈을 주고 가데요. 알고 봤더니 그 갱단 쪽 사람이었는데 그 일로 그들과 친구가 됐어요. 그들이 1년에 한 번씩 여는 파티에도 초대받고 그들의 결혼식에도 가요(웃음).”
이 ‘갱단 에피소드’는 극중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민자인 해리가 빚 때문에 중국 갱단 소굴로 찾아가는 것으로 각색됐다.
“갱단하고 얘기하면서 첫아이가 아파 고생했던 아픔도 털어놓았어요. 생후 두 달 된 아들이 심장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돈도 없고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 병원에서 받아주지를 않는 거예요. 오직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보스턴에 있는 어린이 병원으로 아이를 둘러업고 가서 버텼어요. 그랬더니 수술을 해주더군요. 그 아이가 지금은 열일곱 살의 건강한 소년으로 자랐어요.”

“뉴욕 코리아타운 입구에 한국문화 대표하는 인물인 세종대왕 동상 세우고 싶어요”
그는 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주인공들의 역할 모델을 한 것 외에도 ‘로비스트’의 미국 촬영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극중에서 전소된 버스 역시 스카이라이너 소유 버스. 45만 달러(약 4억원)짜리다.
“버스를 아예 불태워야겠다는 제작진의 말에 처음에는 정말 당황했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이왕 도와주기로 했는 걸. 결국 제일 낡은 버스를 ‘상납’했죠(웃음). 미국 드라마 ‘섹스 · 더 시티’나 ‘사인필드’ 등의 촬영에도 우리 버스를 빌려주는데 그때는 정확하게 돈을 받죠. 그러나 한국 드라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냥 협조하는 거죠(웃음).”
피터 김이 버스 사업을 시작한 것은 평소 여행을 즐겼기 때문이다.
“무전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그래서 여행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아주 잘 알죠. 관광버스가 관광객들에게 어떤 서비스를 해야 하는지를 안다는 의미예요. 처음 한 대를 직접 몰고 다닐 때 양복을 사 입었어요. 다른 운전사들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 대부분이었는데 저는 깔끔한 모습으로 손님을 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시간을 철저하게 지켰어요. 이른 아침 호텔에서 손님을 픽업해야 하는 날이면 전날 밤에 호텔 앞에 버스를 대고 잤어요. 절대로 늦을 일이 없도록 하려고요.”

시작부터 중국인이나 이탈리아인들과는 차별화된 전략을 펼쳤던 그는 손님들에게 택시비를 지급한 사건을 계기로 도약을 하게 됐다고 한다.
“어느 날 아침에 자고 있는데 여행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왜 호텔 앞에 차가 안 보이냐고요. 그런데 그 여행사는 전날 제게 오전 6시가 아니라 오후 6시에 픽업 오라는 스케줄표를 보냈어요. 여행사의 잘못이었던 거죠. 결국 여행사는 손님들을 일일이 택시에 태워 공항으로 보내야만 했어요. 그런데 전 그길로 양복을 입고 집에 있는 돈이란 돈은 모조리 털어 주머니에 넣고 공항으로 달려갔어요. 그러고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택시비를 지급하며 사과했어요. 제 잘못은 없었지만 손님들이 버스가 없어 불편했을 점을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더라고요. 그랬더니 여행사에서 감탄을 하더군요. 그 이후 일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중국 갱단 사건을 봐도 그렇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국적을 불문하고 어디서나 통하는 것 같아요.”
이렇듯 진심으로 손님을 대한 까닭에 그의 사업은 2001년 9·11 테러로 뉴욕 관광객이 줄어든 와중에도 오히려 30~40% 커졌다. 2002년에는 일본 여행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 손님이 줄어들자 저는 다른 시장을 개발, 환경변화에 적절히 대응했어요. 현재 1년에 30만 명 정도가 저희 버스를 이용해 애틀랜틱시티 카지노로 이동합니다.”
사실 비밀과외 사건만 아니었으면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미국 이민에 대해 후회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 와서 아내를 만났고 지금처럼 재미있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어 좋아요. 글쎄요,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지금쯤 제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이 안 가네요. 제가 이민 왔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요. 그래서 이민을 꿈꾸는 분들에게 뭐라 조언을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선택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남이 다 하는 일에 묻혀서 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이민 와서도 잘 살 수 있거든요.”
그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고 한다. 뉴욕 맨해튼 32번가 코리아타운 입구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우는 것이 바로 그것.
“뉴욕 차이나타운 입구에는 공자상이 세워져 있어요. 참 보기 좋더라고요. 저도 언젠가는 꼭 코리아타운 입구에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인 세종대왕상을 세우려고 해요. 거기가 굉장히 비싼 땅이라 돈을 많이 모아야 하는데 열심히 일해서 꼭 세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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