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자랑스런 한국인

우리 춤의 아름다움 세계에 알리는 전통무용가 천명선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천명선 제공

2007. 10. 23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전통무용가 천명선씨는 10년 넘게 아시아와 세계 전역을 돌며 한국 춤을 알리고 있다. 서른여덟에 남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우리 춤 홍보대사로 살아온 그의 삶을 들었다.

우리 춤의 아름다움 세계에 알리는 전통무용가 천명선

일곱 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으니 춤 인생 40년이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전통무용가 천명선씨(48). 그는 지난 6월 필리핀에서 한국전쟁 참전 용사를 위한 감사 공연을 열고, 8월에는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열린 광복절 축하 공연의 예술 총감독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이름난 천씨 춤의 특징은 가녀리고 슬픔이 묻어나면서도 신명이 난다는 점. 그래서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평을 듣는 그의 춤사위에는 고된 인생사가 묻어 있다.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 본거지를 두고 있지만 각종 국악예술경연대회 심사위원을 맡아 자주 한국을 찾는다는 그는 “춤이라는 돛단배가 있었기에 인생 고비에 불어닥친 풍랑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며 지난 삶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천씨가 처음 춤을 추게 된 건 어린 시절 유난히 몸이 약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난 그는 “연년생 남동생에게 엄마 젖을 빼앗겨서 그랬는지” 늘 잔병을 앓았다고 한다. 허약하고 밥도 잘 안 먹는 딸이 운동을 하면 건강해질 거라고 생각한 부모는 그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무용학원부터 보냈고, 천씨는 땀을 많이 흘리며 비실거리다가도 무대에만 서면 펄펄 날았을 만큼 춤에 소질을 보였다. 취미로 대금을 연주할 정도로 국악을 즐기던 그의 아버지는 기분이 좋을 때면 천씨를 불러 “오늘 배운 도라지 타령 한 번 춰보라”고 하고 흐뭇해할 정도로 그의 재주를 아꼈다고 한다.

우리 춤의 아름다움 세계에 알리는 전통무용가 천명선

한국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천명선씨의 보살춤·살풀이춤· 선녀춤(왼쪽부터).


부모 반대 무릅쓰고 재일교포와 결혼, 두 아이 낳은 뒤 남편 잃어
우리 춤의 아름다움 세계에 알리는 전통무용가 천명선

그러나 천씨는 21세 때 일본 삿포로 눈 축제에서 공연한 것을 계기로 만난 재일교포와 사랑에 빠져 일본행을 결심한다. 당시 천씨는 서울에서 스승인 이매방 선생과 듀엣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천씨에게 반한 남편은 한국으로 그를 찾아와 이매방 선생에게까지 청을 넣어가며 열렬히 구혼했다고.
“일본으로 시집가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아주 많이 반대하셨어요. 춤 공부를 더 하면 한국 무용계에서 크게 쓰일 사람인데 왜 일본에 가느냐고요.”
그는 일본에 가더라도 무용을 계속하겠노라고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간신히 결혼 허락을 받고 스물다섯 살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집 지하실에 무용연습장을 마련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구에도 천명선 무용연구소를 열어 제자를 기르는 등 양국을 자주 오가며 무용을 계속했다고 한다. 한국 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일본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려가며 두 명의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천씨에겐 행복만 계속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여러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남편이 지난 97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그의 인생은 격랑에 휘말렸다고 한다. 건강하던 남편이 어느 날 위벽의 동맥이 터졌다는 진단을 받더니 여러 번 수술에도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몇 달 만에 숨을 거둔 것이다. 두 아이가 여섯 살, 네 살 때의 일이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정신이 없었죠. 그런데 힘든 일은 계속됐어요. 남편이 하던 회사를 엉겁결에 제가 상속받게 됐거든요. 저는 할 줄 아는 게 춤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시집에서 하라는 대로 조카에게 경영을 맡겼어요. ‘예술하는 사람이 이재에 밝으면 뭐하나. 혼자 살풀이춤 한 번 추고 나면 아픔도 서러움도 다 씻겨나가는데’라고 생각했던 거죠.”
천씨는 회사 경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채 두 아이를 키우고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전념했다. 그런데 5년 뒤, 조카는 거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빚만 남겨놓은 채 자살했다고 한다. 엄청난 부채는 고스란히 천씨의 몫으로 돌아왔다.
“지하 연습실이 있던 큰 집이 다 빚으로 날아갔어요. 이렇게는 안 되겠구나 싶어 그나마 있던 재산을 모아 소송을 시작했죠. 남겨진 빚은 제가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받기 위한 소송이었어요. 남은 재산이 소송비용으로 다 들어갔을 즈음 간신히 재판에서 이겼지만, 이미 제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죠.”
남편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 연이은 소송으로 고되던 시절 천씨를 살게 해준 건 오직 춤뿐이었다고 한다. 지난 97년 요코하마에 ‘천명선 무용연구소’를 열고 일본의 한국인 2세·3세들에게 전통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한·일 춤 교류를 시작한 천씨는 지난 2000년부터 가나가와현 민단본부의 문화사업추진위원장을 맡아 활동영역을 넓혔고, 미국 중국 호주 캐나다 독일 헝가리 러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1백 회가 넘는 공연을 열어 우리 무용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지난 97년 전주대사습전국대회 무용부 장원을 차지하며 춤의 예술성을 인정받은 그는 지난해 서울 전통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살풀이춤으로 대통령상도 받았다.
천씨는 “힘겹던 시절의 인생 공부가 춤 속에 녹아들어 내 춤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며 “원래 전통무용은 곰삭은 인간미와 경륜이 담겨야만 제대로 된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많은 재산을 잃었지만 춤이 든든한 재산이 돼줘서인지 힘든 줄 몰랐다”고 말하는 천씨.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을 받으며 무용예술을 널리 알리는 요즘이 너무 행복하다”며 밝게 웃는 그는 “앞으로도 세계 속에 우리 춤의 우수성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