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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감동 사랑

북한으로 강제 소환된 남편 그리며 46년 동안 홀로 두 아들 키운 독일인 레나테 홍

기획·송화선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홍중식 기자

2007. 10. 23

1950년대 중반 동독에서 북한 출신 유학생을 만나 결혼한 레나테 홍씨. 그는 결혼 1년 만에 남편이 북한 당국의 소환 명령을 받고 떠나자 46년 세월을 홀로 살며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려왔다. “힘겨운 세월이었지만 남편과의 사랑을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다”는 그의 남다른 사랑 얘기를 들었다.

북한으로 강제 소환된 남편 그리며 46년 동안 홀로 두 아들 키운 독일인 레나테 홍

어느 날 갑자기 남편과 헤어진 후 46년 동안 홀로 사랑을 지켜온 이가 있다. 순애보의 주인공은 푸른 눈동자를 지닌 독일인 레나테 홍씨(70). 지난 60년 동독에서 북한 출신 유학생 홍옥근씨(73)를 만나 결혼했던 그는 결혼 1년 만에 남편이 북한 당국의 명령으로 소환되자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남편과의 재회만을 기다려왔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진 건 남북 정상회담 개최 소식을 들은 레나테 홍씨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면 자신의 안타까운 상황을 전하고 가족 상봉을 추진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46년간 마음 깊이 품어온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한 희망을 품고 우리나라를 찾은 레나테 홍씨는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서툰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라는 첫인사를 건넸다. 이내 수줍어하며 “요즘 남편 만날 날을 기다리며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덧붙이는 그에게선 할머니라기보다는 소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레나테 홍씨는 남편과 헤어진 46년 전 시간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출신 유학생과 동독 여학생의 사랑
레나테 홍씨가 남편 홍옥근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 55년. 옛 동독 예나시의 프리드리히 쉴러 대학 캠퍼스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화학을 전공하는 열여덟 살 신입생이었고, 남편은 같은 과에 다니는 북한 출신 유학생이었다.
“강의 중간 휴식시간에 처음 마주쳤는데 둘 다 첫눈에 반했어요(웃음). 남편은 175cm의 키에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최우수 성적을 받을 정도로 공부도 아주 잘했어요.”
5년여의 열애 끝에 두 사람은 60년 2월 결혼식을 올렸고, 넉 달 뒤 첫아들을 낳았다. 남편의 공부가 끝나면 같이 북한으로 들어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홍현철’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부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 1년여 만에 북한 당국이 모든 독일 주재 유학생들에게 강제소환 명령을 내리면서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61년 4월, 남편이 북한으로 떠나던 날 베를린 기차역 풍경이 아직도 생생히 떠올라요. 그날은 제 생애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죠. 역사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북한 유학생들로 혼잡했고, 생후 10개월 된 아들은 두 팔을 벌리며 남편을 향해 ‘아빠’ 비슷한 말을 했어요….”
레나테 홍씨는 슬픔이 북받치는 듯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은 아들을 안고서 내려놓으려 하지 않더군요.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죠….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늘 쾌활하고 강한 사람이었거든요.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정치적인 이유’라는 설명을 들었을 뿐, 남편이 왜 갑자기 떠나야 했는지 명확한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홀로 남겨진 레나테 홍씨는 오래 슬퍼할 수도 없었다. 이미 배 속에는 둘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을 찾았고, 출산 준비도 했다. 그는 “나는 바쁜 일상 때문에 그나마 슬픔을 잊을 수 있었지만, 홀로 떠난 남편은 더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북한으로 돌아간 남편과 처음엔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남편은 매일같이 편지를 썼고, 그 속에는 언제나 저와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죠. 한 번은 편지와 함께 ‘사랑의 징표’라며 연꽃잎을 보내오기도 했어요.”

북한으로 강제 소환된 남편 그리며 46년 동안 홀로 두 아들 키운 독일인 레나테 홍

레나테 홍씨는 46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연꽃잎을 간직하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남편을 향한 깊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 시절 끊임없이 날아오던 남편의 편지는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레나테 홍씨에게 큰 위안이자 희망을 줬다고 한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곧 남편이 있는 북한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에 관련 자료를 모으는 등 열심히 준비도 했다고.
“그런데 우리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던 편지마저 2년 뒤 갑자기 끊어졌어요. 제가 보낸 편지도 되돌아왔고 남편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됐죠.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겁이 덜컥 나서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과 동독 외무부 등을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였어요. 모두 ‘알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죠.”
이후 레나테 홍씨는 화학교사와 제약회사 연구원 등으로 일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46년을 하루같이 남편을 기다렸다. 힘겨울 때면 문득 ‘가족이 다시 만나 함께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싹트기도 했지만, 한국의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나 남북 교류 등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래, 나도 언젠가는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올 초 마침내 그의 희망은 조금씩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한국과 독일 적십자사의 도움으로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편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홍옥근씨는 귀국 뒤 북한에서 과학자로 일하다 은퇴해 현재 함경남도 함흥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었다. 남편이 재혼을 한 것. 레나테 홍씨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해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우리의 헤어짐은 ‘시대적 운명’일 뿐이기에 남편을 원망하지 않아요”
“다시 함께 살긴 어려울 거라는 걸 저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재혼했다는 걸 알게 되니 ‘이별이 굳어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더군요. 이해는 해요. 저에게는 아들 둘이 있지만, 남편은 혼자였으니까요. 혼자 살긴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마음이 … 아팠죠.”
‘그래도 마음 아프다’고 거듭 말하는 레나테 홍씨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에게 남편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생의 ‘유일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46년 세월을 견뎌올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마음 한편이 아린 것일 것이다.
그에게 남편을 원망하거나, 그를 사랑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불쑥 던진 이 질문에 레나테 홍씨는 망설임 없이 ‘No’라고 대답했다.
“남편을 원망하지 않아요.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고, 우리의 헤어짐은 ‘시대적 운명’이었을 뿐이니까요. 그를 사랑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아직도 사랑하고, 그 마음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예요.”
레나테 홍씨는 지금까지 남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두 아들 덕분이라며 “남편을 닮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내겐 큰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큰아들은 1천 마리가 넘는 소를 키우는 낙농업자이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화학자가 됐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두 아들을 ‘선물’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라고.
“새로 가정을 꾸린 남편이 저 때문에 곤란을 겪는 건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꼭 한 번 만나고 싶죠. 이제 더 이상 미래에 대해 얘기할 수 없겠지만, 함께했던 추억을 나누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할 수 있으면 정말 기쁠 거예요. 무엇보다 남편에게 성장한 두 아들을 보여주고 싶고요.”
그는 또 남편에게 두 아들의 어릴 적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언젠가 남편을 만나면 보여주려고 그는 두 아들을 키우며 끊임없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연도별로 분류해 사진첩을 만들어두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혼자만 보는 것이 남편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라고.
“남편이 독일로 오는 게 어려우면 제가 북한에 갈 수 있어요. 그것도 어려우면 남북 이산가족들처럼 화상으로라도 만나고 싶고요. 그게 안 된다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두 아들만이라도 꼭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레나테 홍씨는 자신이 한국에 온 건 단지 자신의 문제만 해결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현재 독일에는 그와 같은 처지의 이산가족이 15∼20가구 정도 있다는 것. 레나테 홍씨는 재회에 대한 희망조차 거의 잃어버린 그들이 자신을 통해 다시 희망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동안 독일에도 북한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이 있다는 걸 아는 이가 없고, 도와주려는 이도 없다는 게 참 힘들었어요. 남북 두 정상이 만나면 꼭 독일의 이산가족에게도 관심을 갖고 도와주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가족사진이 단 한 장밖에 없는 게 안타깝다는 레나테 홍씨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남편과 헤어지기 한 달 전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속에는 그나마 둘째 아들이 없다고 한다. 아직 그의 배 속에 있었기 때문. 힘겨운 세월을 지내온 레나테 홍씨가 이제라도 완벽한 가족사진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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