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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 딸 키운 경험 담은 책 펴낸 로이 리처드 그린커 교수

‘자폐아 키우는 부모들이 꼭 알아야 할 것들’

기획·김명희 기자 / 글·박경아‘자유기고가’ / 사진·로이 리처드 그린커 제공

2007. 08. 13

자폐에 대해 인류학적으로 접근한 ‘낯설지 않은 그들’로 미국 사회에서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로이 리처드 그린커 조지워싱턴대 교수. 한국인 아내와 결혼, 딸 셋을 두고 있는 그는 큰딸이 자폐 진단을 받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자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자폐아를 둔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폐 딸 키운 경험 담은 책 펴낸 로이 리처드 그린커 교수

“제가 만난 한국의 자폐아 어머니들은 사랑이 넘치고 책임감 강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들 문제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폐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인류학과 로이 리처드 그린커 교수(45)는 자폐와 관련한 한국인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자폐 문제를 인류학적으로 접근, 미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그는 한때 북한에 관한 연구를 해왔으나 94년 자신의 큰딸이 자폐 진단을 받자 연구 주제를 자폐로 바꿨고 지난 2월 미국에서 큰딸을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자폐 환자의 급증, 문화권에 따른 자폐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을 분석한 결과를 담은 책 ‘낯설지 않은 그들’(Unstrange Minds: Remapping the World of Autisms)을 펴냈다. 이 책은 전문 과학잡지 ‘네이처’, 대중 잡지 ‘피플’ 등에 소개되며 화제가 됐다. 2005년부터 미국 예일대·루돌프 어린이 사회성 발달연구소 연구진과 팀을 구성, 경기도 일산지역 초등학교의 어린이 3만여 명을 대상으로 정확한 자폐 진단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그는 지난 5월에는 자폐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자폐 인구는 1천 명당 1명꼴로, 통계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과거보다 현저히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자폐인구 비율의 증가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미국의 경우도 15년 사이에 1만 명당 1명에서 1백50명당 1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는 자폐 자체가 증가한 게 아니라 정확한 진단을 통해 자폐 진단을 받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자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지 못해 자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뇌손상이나 정신지체, 정서불안 등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자폐는 한마디로 언어 문제, 반복적인 행동, 그리고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 어려움을 겪는 신경장애를 말한다. 그동안 자폐의 원인으로 환경적인 요인, 유전적인 요인, 환경과 유전이 복합된 요인, 호르몬 이상 등이 제기돼왔는데 최근 미국에서는 복합적인 유전적 이상으로 보는 견해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자폐를 보는 견해는 나라 혹은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마법과 연관짓고 미국의 나바호 인디언은 ‘신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특정 지역과 인도에서는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과 프랑스에서는 아이가 자폐인 경우 부모가 죄인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때문에 한국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아이가 자폐라는 사실을 공개하기 꺼려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언어치료, 약물치료 등을 시도하다 아이가 낫지 않으면 포기하고 만다고. 하지만 지난해 말 ‘뉴스위크’지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예전 같으면 시설에 위탁됐을 젊은이 수천 명이 각종 치료요법 덕분에 대학에도 진학하고, 직업인으로서도 정상적인 삶이 기대되고 있다고 한다.

세 살 때 자폐 진단 받았지만 적절한 치료와 주변의 도움으로 조금씩 호전되고 있는 딸
자폐 딸 키운 경험 담은 책 펴낸 로이 리처드 그린커 교수

세 살 때 자폐 진단을 받았지만 꾸준한 치료로 일상생활을 큰 무리없이 해내고 있다는 그린커 교수의 큰 딸 이사벨.


그린커 교수의 큰딸 이사벨(16) 역시 세 살 때 자폐 진단을 받았지만 지금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그린커 교수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조지타운대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부교수며 국립정신보건연구소 연구원인 그의 아내 조이스 정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부부 사이에는 큰딸 이사벨(16)을 비롯해 세 딸이 있다. 이사벨은 ‘상희’라는 한국 이름도 가지고 있다.
아이가 자폐 진단을 받을 경우 많은 부모는 좌절하게 된다. 하지만 그린커 부부는 이사벨이 자폐 진단을 받았을 때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아이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벨은 다른 아이들과 발달과정이 달랐습니다. 특히 또래에 비해 말이 현저히 늦었어요. 마치 언어회로가 엉켜 있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하지 못하고, 표현력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사람들과 대화가 되지 않으니까 혼잣말을 자주 하더군요. 때문에 저희는 오히려 자폐 진단으로 딸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마련했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는 자폐 진단과 치료는 무엇보다 일찍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데 늦어도 3~5세에는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먼저 아이를 위해 좋은 의사와 치료사를 찾아야 하고 아이가 움츠러들지 않도록 정상적인 교육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또 사춘기 후반이나 성년기 초기가 되면 ‘그룹홈’(사회복지사와 성인 장애인이 함께 거주하는 주거공간) 생활도 고려해봐야 하고요.”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만 특히 자폐아들에게는 일상적인 활동조차 힘겹게 터득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그는 자폐아를 기르는 과정을 ‘전쟁’으로 표현했다.
“그래도 요즘 자폐 진단을 받는 아이들의 부모는 과거보다 상황이 훨씬 낫습니다. 자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과거보다는 많이 줄었으니까요. 이사벨도 특수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를 다녔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자폐 아동을 배려하지 않는 학교 측과 많은 갈등을 빚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일반 학교를 다니는 자폐 아동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평생 자폐증과 싸워온 부모들의 마지막 걱정은 자신들이 세상을 뜬 다음이다. 한국에서 부모 다음 보호자는 당연히 형제자매다.
“자폐아 부모 누구나 생각하는 문제죠. 미국은 독립적인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개인주의 사회입니다만 우리 부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 딸 올리비아가 우리 부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며, 언젠가 언니 이사벨을 돌보는 일을 기꺼이 맡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사벨의 장애 극복을 위해 꾸준히 도우며 노력해왔기에 그의 가족은 서로에게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우린 이사벨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사벨의 장애 극복을 위해 도전해왔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사벨이 뭔가를 해냈을 때 ‘한팀’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사벨을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의 이사벨과 비교하죠. 그러면 놀라운 발전을 깨닫게 됩니다.”
10년 전만 해도 매일 혼잣말을 하고 손뼉을 치는 아이였던 이사벨은 이제 동생과 함께 식탁에서 접시를 치우라는 아빠 말에 “난 장애가 있잖아”라며 꾀를 부리고, 첼로를 연주하고 애완견과 열대어를 키우며 국립동물원 자원봉사도 희망하는 활기찬 소녀로 변했다고 한다. 그린커 교수의 ‘낯설지 않은 그들’은 오는 11월 한국어로 번역돼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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