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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시골 청년과 위대한 노시인의 나이를 초월한 우정 이야기

기획·김동희 기자 / 글·민지일‘문화에세이스트’ / 사진제공·REX

입력 2007.02.13 12:01:00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대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작은 어촌 마을에 거주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시인과 평범한 우편배달부 청년의 우정을 그린 소설. 마리오는 시인에게 우편물을 배달하며 시의 매력에 새롭게 눈뜬다. ‘일 포스티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이 소설을 통해 불안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삶을 사랑하는 칠레 민중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시에 대한 이해도 덤으로 얻게 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영화 ‘일 포스티노’ 장면.(왼쪽) 칠레 어촌의 평범한 청년 마리오는 파블로 네루다를 만나 시의 매력에 빠져든다.(오른쪽)


1973년 9월. 수색영장을 든 군인들이 병실로 몰려들어왔다. 병상에 누워있던 노시인은 힘겹게 상체를 들었다.
“뭘 찾나? …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곤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가 깜짝 놀라 권총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게 뭡니까?”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시인은 입을 열었다.
“시(詩)일세!”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역사’

2006년 12월.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외신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칠레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하 파티를 벌였다”고 전했다. 피노체트는 남미 우익 독재의 상징이었다. “나뭇잎 하나도 내 뜻이 아니면 구르지 않는다”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고 17년 재임 중 3천1백97명을 살해했다.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유혈 쿠데타로 쫓아낸 뒤 반대자들을 축구장에 몰아넣고 보란 듯이 고문 살해하는 반인권적 행위를 자행했다. -동아일보

병상에서 군인을 나무란 시인이 ‘파블로 네루다’다. 그는 1970년 칠레 대통령 후보직을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양보해 민중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71년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로 재직 중 노벨문학상을 탔다.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말 그대로 네루다 시인에게 온 우편물을 배달하던 청년의 이야기다. 무대는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한적한 해안 마을 이슬라 네그라(검은 섬이란 뜻이나 섬은 아니다). 때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4년 전. 이야기는 쿠데타 발발 직후까지 이어지지만 전개가 정치적이거나 무겁지 않다. 시와 사랑, 그리고 민초들의 삶이 발랄하며 아름다운 청춘이야기와 맞물려 경쾌하게 펼쳐진다.

불안한 정치 상황 속에서 시와 여인을 사랑하는 칠레 사람들의 정열 밝게 그려
1969년. 열일곱 살 마리오는 대물림으로 어부가 되는 것이 싫어, 시인 네루다의 집에 우편물을 배달하는 특별배달부로 취직한다. 시의 ‘ㅅ’조차 모르고 빈둥거리던 그는 하루 한 번씩 시인과 만나며 시의 본질에 조금씩 접근해간다. 메타포(은유법)를 배우고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라는 알량한 논리를 세우기도 한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자 시인에게 ‘뚜쟁이’ 역할을 해달라는 막무가내 주문을 하기에 이른다. 네루다도 자신의 시집에서 사랑 노래를 뽑아내 구애의 도구로 사용하는 마리오가 밉지 않다. 오히려 순수한 마음의 그와 시를 논하고 깜짝 놀랄만 한 대구(對句)를 듣는 게 즐겁다.

소녀 어머니의 반대를 물리치고 마리오는 베아트리스와 결혼에 성공한다. 시인도 망신을 당하면서까지 소녀 어머니를 만나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70년 네루다의 대통령후보 양보로 아옌데 정부가 세워지고 시인은 주프랑스대사로 나간다. 마리오는 네루다가 파리에서 보내온 녹음기에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바람소리, 종소리, 해변 바위에 부딪쳤다 밀려나가는 파도소리와 갓 태어난 자신의 2세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보낸다. 물론 자신이 쓴 첫 번째 시 ‘파리의 네루다를 뒤덮는 백설 송가’를 낭송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73년 8월. 소리 소문도 없이 네루다가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왔다. 병이 든 것이다. 9월11일엔 쿠데타가 일어나 아옌데 대통령이 순직했다. 네루다의 집에도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군인들이 출입을 통제했다. 우체국에는 네루다에게 오는 편지들이 쌓여갔다. 부슬부슬 비 오는 날, 마리오는 해변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 네루다의 집에 들어간다. 이미 바닷가에서 봉투를 뜯어 수십 번 읽고 외운 편지내용을 들려주지만 시인은 자신의 병든 몸을 일으켜 창가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검은 물이 포효하듯 철썩이고 시인은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린다.

하늘의 품에 휩싸인 바다로 나 돌아가노니,
물결 사이사이의 고요가
위태로운 긴장을 자아내는구나.
새로운 파도가 이를 깨뜨리고
무한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그때까지,
어허! 삶은 스러지고
피는 침잠하려니.

시인은 수도 산티아고 병원으로 후송돼 23일 숨을 거뒀다. 며칠 후. 새벽 5시경 마리오의 집 앞에 차들이 멈춰 섰다. 검은 우비를 입은 두 사람이 차갑게 물었다. “우체부 마리오요?” “그렇습니다.” “저희와 동행해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일상적인 일이죠.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마리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노벨상을 수상한 대시인과 10대 우편배달부의 격의없는 대화 돋보여
작가가 미리 밝혔듯 소설은 열광적으로 시작해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져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반적 분위기는 탱고 춤을 추듯 가볍고 경쾌하다. 신이 난다. 구름 위 인물로 그리기 십상인 노벨상 수상 대시인을, 10대 우편배달부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게 만들면서도 시의 요체를 슬쩍 풀어주는 작가의 치밀한 구성도 돋보인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즉 바람, 바다, 나무, 산, 불, 동물, 기타 등등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가요?” 네루다의 입은 턱이 빠질 듯이 떡 벌어졌다.

“제기랄, 나도 시인이나 되었으면. 제가 시인이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천만에! 시집 두어 권 선물했다고 내 시를 표절하라고 허락해준 줄 알아? 게다가 자네는 내가 마틸데를 위해 쓴 시를 베아트리스에게 선사했어.”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메타포라고…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촌구석 술집 년을 베네치아 공주처럼 느끼게 만들지. 그리고 나중에 진실의 순간이 오면, 즉 현실로 되돌아오면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네 미소가 나비보다 더 높이 난다는 말보다 술주정꾼이 주점에서 네 엉덩짝을 치근덕거리는 게 천만 번 낫지.”

이러니 소설을 읽다 보면 프란츠 카프카가 시에 대해 내린 정의가 생각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철학자 플라톤이 국가공동체에서 시인을 제외한 건 이해할 만하다”며 “시인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인간에게 다른 눈을 주려 하므로 국가에 위험한 요소”라고 말했다.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이다. 민음사 간, 우석균 옮김.
지은이 안토니오 스카르메타(1940~)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칠레의 안토파가스타에서 태어나 칠레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예술학 석사를 받았다. 67년 단편집 ‘열정’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단편집 ‘지붕 위의 누드’로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상을 수상했다. 73년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베를린으로 망명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장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20여 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으며 필립 느와레, 마시모 트로이시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89년 베를린 망명생활을 접고 칠레로 돌아가 한 가족의 이민사를 다룬 연작 장편 ‘시인의 결혼식’ ‘트롬본 부는 소녀’ 등을 발표했다. 그 밖에도 텔레비전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주독일대사로 재직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성동아 2007년 2월 5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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