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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굴곡진 삶

북한의 참혹상 고발한 ‘요덕스토리’ 만든 탈북자 정성산 감독

기획·이남희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2006. 09. 21

지난 3월 초연한 뮤지컬 ‘요덕스토리’가 4월과 8월 앙코르 공연을 가진 데 이어 9월부터 미국 순회공연을 떠난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 요덕수용소를 무대로 한 이 작품은 제작과 연출을 맡은 정성산 감독이 북한의 수용소를 탈출한 탈북자이기에 더욱 화제가 됐다. “탈북보다 뮤지컬 제작이 더 어려웠다”는 정 감독으로부터 공연 뒷얘기와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에 대해 들었다.

북한의 참혹상 고발한 ‘요덕스토리’ 만든 탈북자 정성산 감독

지난 3월 처음 막을 올린 뮤지컬 ‘요덕스토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화제를 모았다. 우선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대명사로 알려진 함경남도 요덕수용소의 참상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연출과 제작을 맡은 정성산 감독(37)이 북한의 수용소를 탈출한 탈북자라는 사실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탈북자 출신 감독이 북한의 인권 탄압을 다루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금난과 지원 부족으로 말 못할 고생을 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하지만 ‘요덕스토리’가 보름 동안의 첫 공연에서 2만 명 관객을 동원하는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4월 앙코르 공연에서도 전회 매진을 기록했고 이제 9월 미국 순회공연을 앞두고 있다. 지난 8월 초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자리 잡은 극단 사무실에서 만난 정성산 감독은 “이제야 비로소 나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 조금은 떳떳해진 심정”이라고 털어놓았다.
“함북 회령군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가 지난 2002년 돌에 맞아 공개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중앙당 간부였던 아버지가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신 건 모두 제 탓이기에 그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요덕스토리’를 만든 것도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요덕스토리’의 주인공은 무용수로 각광받던 중앙당 간부의 딸 강연화. 그는 어느 날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자 가족과 함께 요덕수용소로 끌려가고, 그곳에서 소장 이명수에게 성폭행 당해 임신한다. 이후 이명수는 이 사실이 드러나 수용소 소장에서 수감자로 전락하고 연화와 함께 탈출하려다 자폭한다. 정 감독은 뮤지컬 줄거리에 대해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모든 사람을 기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정성산 감독은 북한에서 영화연출학을 전공하고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서 유학한 상류층 자제였다. 2남1녀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하게 성장했고 북한의 유일한 예능고등학교인 금성고등중학교를 거쳐 평양연극영화대학에 다녔다. 그는 당시 당 간부 자녀들과 어울려 ‘사고’를 치더라도 부모 ‘빽’으로 풀려 나왔다고 한다.
그러다 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그는 군대로 소환됐다. 그는 그곳에서 남한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듣다가 발각돼 사상범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군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돼 3개월간 고문당한 끝에 1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재판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호송차가 산길에서 구르는 사고가 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저는 다친 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길로 도망쳐 평양에 있는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부모님은 양강도 탄광촌으로 추방된 후였습니다.”
부모를 찾아 양강도로 향하는 길에 그의 사진이 실린 수배자 명단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도주했다. 중국의 장백현으로 넘어가서 보낸 첫 일주일 동안 그는 그때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잘사는 사람들도 있나 신기해 ‘여기가 중국에서 가장 부자동네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중국에서 가장 못사는 데라고 했어요.”

북한의 참혹상 고발한 ‘요덕스토리’ 만든 탈북자 정성산 감독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한 장면.


서울에 정착하게 된 95년부터 그는 남한 사회에 적응해 살아남기 위해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96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졸업하기까지 포장마차·주유소 종업원, 술집 호객꾼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병원에서 시체도 닦아봤다.
북한과 다른 남한의 영화를 익히기 위해 충무로 영화판에 들어갔다. 그는 영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시나리오 각색을 맡았고 임권택 감독 밑에서 지도를 받기도 했다. 온갖 험한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단편 영화도 찍었다.
그는 영화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밤을 새워 시나리오를 쓰고 열심히 준비해서 투자회사에 가져가곤 했지만 영화 관계자들은 “시나리오가 좋다”면서도 그가 탈북자 출신이라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탈북자가 한국 사회에 대해 뭘 알아서 영화를 만들까, 그런 선입견을 갖는 거죠. 남한에 와서 대학을 다시 다니면서 한국의 대중문화, 젊은이들의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사람들은 저한테서 탈북자라는 딱지만 보더라고요.”

돌에 맞아 공개처형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씻고자 ‘요덕스토리’ 구상
그렇게 영화가 ‘엎어진’ 것이 일곱 번이다. ‘7전8기’라는 말에 걸맞게 여덟 번째로 기획해 마침내 찍은 영화 ‘빨간 천사들’은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는 북한과 관련된 과거는 다 잊고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 돼 살고 싶었다고 했다. 방송국에서 드라마 작가로 일할 때 아나운서 연수까지 받으며 열심히 북한 말투를 고쳤다. 완벽한 서울 말씨를 구사하는 그의 억양 어디서도 북한 사람의 흔적을 엿보기 어려울 정도다. 탈북자 티를 덜 내려고 머리도 노랗게 염색하고 다녔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기억하기 싫은 북한 이야기만 자꾸 물었다. 당시 탈북 경험과 관련해 강연해달라는 청탁이 오면 “저 탈북자 아닌데요” 하고 거절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180도 달라져 북한의 인권 현실을 고발하는 ‘요덕스토리’를 쓰게 된 것은 2002년, 아버지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날마다 술로 지새며 자살까지 시도하는 절망 속에서 찾아낸 출구는 작품을 통해 북한의 참혹한 상황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요덕스토리’는 처음에는 영화 시나리오였다. 영화로 만들려면 제작비가 최소한 70억원은 있어야 하는데 투자하겠다는 회사가 없었다. 궁리 끝에 뮤지컬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지만, 막상 뮤지컬 관계자에게 자문을 구하니 난색을 표했다. 정치적 색채가 그렇게 짙은 소재로 뮤지컬이 되겠냐는 것이었다. 북한 인권을 폭로하는 뮤지컬이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김일성 초상화와 북한 노래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투자를 하기로 했던 펀드 회사가 약속을 깨고 극장측도 대관 계약을 취소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이 작품은 예상 밖의 흥행을 거뒀다. 북한의 참상을 처음으로 고발한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요덕스토리’와 정성산 감독의 이야기가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각종 외신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정 감독은 미국의 북한 인권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에도 참석했다. 그는 “북한에 수용소가 사라지는 날까지 ‘요덕스토리’ 공연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미혼인 그는 지난 4년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곁을 지켜주고 격려해준 여자친구와 곧 결혼할 계획이다.
“내 자식이 생기면 부모님 생각이 더 난다고 하지요. 어서 아이를 낳아 좋은 일, 좋은 세상을 많이 누리게 해주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희망이야말로 바로 ‘요덕스토리’가 태어난 이유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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