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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별책부록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미술 칼럼니스트 이주헌의 쉽고 재미있는 그림 읽기 모음집

■ 기획·이한경 기자 ■ 글·이주헌‘미술 칼럼니스트’

2005. 05. 16

아이에게 좋은 그림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림에 문외한이라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요? 미술과 친해지려면 그런 부담감부터 떨쳐야 해요. 여기 일반인들에게 미술을 쉽게 설명해주는 이야기꾼으로 유명한 미술 칼럼니스트 이주헌씨가 우리 아이들의 눈높이에 딱 맞춰 재미있는 명화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 아이와 함께 보면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쑤~욱 키워주세요.

[시작하기전에]미술 칼럼니스트 이주헌씨가 들려주는 ‘아이와 함께 그림을 즐겁게 감상하는 법’
‘여성동아’ 독자들에게 아이와 함께 보면 좋은 명화들을 소개하고 있는 이주헌씨는 그간 일반인들에게 미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일을 부지런히 해왔다. 네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이주헌씨가 아이와 함께 그림을 즐겁게 감상하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글·구미화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후 기자, 전시기획자, 미술평론가 등으로 활약한 이주헌씨(44)는 94년 세 살배기, 돌배기 아들 둘을 데리고 53일간 유럽 11개국의 미술관을 돌아보고 쓴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주헌씨는 그 후에도 ‘신화, 그림으로 읽기’ ‘생각하는 그림들’ ‘아름다운 풍경화에 뭐가 숨어 있을까’ 등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과 어린이들이 쉽게 그림에 다가설 수 있도록 돕는 책들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그는 그림 감상 만큼 아이들이 교양을 쌓기에 쉽고 좋은 방법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림에는 그려질 당시의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아이들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 가보지 않은 나라의 다양한 생활상을 접할 수 있다고. 뿐만 아니라 많은 그림을 접하는 것은 자기 존중감을 기르게 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특히 유익하다고 한다.
“그림을 감상할 때는 보는 이가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조가 어떻고, 화풍이 어떻고 하는 지식은 곁가지일 뿐 보는 이의 느낌이 가장 중요하죠. 여러 그림을 접하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꽤 중요한 사람임을 깨치게 됩니다. 자만이나 오만과는 다른 자존감이 생기죠.”
절대 틀리다고 말하지 말고 아이의 느낌 존중해줘야
그런 점에서 그는 부모가 옆에서 “이 작가는 유명하고, 저 작가는 그렇지 않고, 이 사조는 어떻고…” 하며 지식을 늘어놓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럴 경우 아이가 그림에 대한 싫증도 빨리 느끼게 된다고. 그는 아이가 그림과 친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아이의 취향에 맞는 그림부터 보기 시작하라고 권한다.
“명화와 졸작의 차이는 크지 않아요. 대가의 그림이라도 아이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면 명화가 아니죠.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그림부터 파고들어 점차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 좋아요.”
그림을 감상할 때 아이에게 지식을 강요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여러 각도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질문은 아이가 그림을 보며 생각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 무엇을 그렸는지, 무엇으로 그렸는지 같은 단순한 질문에도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며 창의력을 키우게 된다고.
“아이가 붕어를 보고 상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때 절대 틀리다고 해서는 안 돼요. 미술에는 정답이 따로 없거든요. 아이에게 ‘참 기발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 하고 되물으면 아이는 다시 그 이유를 찾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풍부한 표현력과 논리력을 발휘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서 그림과 친해지고 그림이 대화의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림은 결코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교양 있는 문화생활’이 아니라 ‘삶이 즐거워지는 훌륭한 소재’임을 강조하는 이주헌씨는 아이들이 이 점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그림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림을 즐겨 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강요하지 않아도 그림과 가까워지고, 좋은 그림을 보기 위해 장거리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 적극적인 관람자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표현한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다비드(1748~1825),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0~1801년경, 캔버스에 유채, 271×232cm, 뤼에유말메종, 국립 말메종 성박물관


나폴레옹이 멋진 말을 타고 군대를 지휘하며 산을 오르고 있는 이 그림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 전기나 역사책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그림이지요. 앞발을 든 말의 늠름한 모습이나 후리후리하고 늘씬하게 생긴 나폴레옹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철저히 허구라고 하지요. 실제 나폴레옹은 키도 작고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도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탔으며, 그림에서처럼 군대와 함께 넘지 않고 군대가 지나간 뒤 따로 안전하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림은 그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나폴레옹을 잔뜩 미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정복자의 한 사람인 나폴레옹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요. 그렇다 해도 왜 화가는 이렇듯 사실과 다르게 그렸을까요? 옛날 궁정화가들은 왕이나 지도자를 꼭 보이는 대로만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나라의 평안과 질서를 책임지는 사람인 까닭에 지혜와 용기, 위엄이 가득 찬 인물로 그리곤 했지요.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예술적 사명이었습니다. 다비드 역시 왜곡을 통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웅의 이상적 이미지를 생생히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다비드는 똑같은 그림을 네 점이나 더 그려야 했다고 합니다.
다비드는요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18세기 말~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미술의 대표 화가. 신고전주의 미술은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 대관식’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등 나폴레옹을 찬미하는 작품을 다수 남겼다.
한 가지 더∼ 기마상은 화가들이 지도자 초상을 그릴 때 애용하는 포즈 중 하나입니다. 말을 탄 왕은 군인의 위용을 보여주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지휘하는 힘찬 지도자를 연상케 합니다. 군주 기마상은 고대 로마 황제를 떠올리게 하여 유럽 왕들의 환심을 샀다고 합니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어린 스페인 공주를 그린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벨라스케스(1599~1660), 시녀들, 1656~1657년경, 캔버스에 유채, 318×276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왕의 딸인 공주는 주위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할 뿐만 아니라 지극한 보살핌을 받지요. 공주가 행차하는 곳이면 시녀와 유모 등 여러 사람이 수행합니다. 스페인 궁궐의 마르가리타 공주도 항상 시녀들을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17세기 유럽 최고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화실에도 수행원을 데리고 방문했지요. 그림 한가운데에 있는 작고 귀여운 아이가 바로 마르가리타 공주입니다. 주위에는 시녀들과 유모, 난쟁이 곡예사, 강아지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습니다. 화가는 화면 맨 왼쪽에 커다란 캔버스를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네요. 귀여운 공주를 그리는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화가의 위치로 보아 공주를 그린다면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그리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화가는 누구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왕과 왕비를 그리고 있습니다. 왕과 왕비는 지금 그림을 보는 우리의 위치에 있는 까닭에 이 그림에는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렴풋하게 왕과 왕비를 볼 수 있지요.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면 거기에 왕과 왕비의 모습이 비치고 있습니다. 공주는 지금 모델 서느라 힘든 엄마, 아빠에게 자신의 재롱을 선사하려고 이곳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따뜻한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림입니다.
벨라스케스는요...17세기 초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왕실 사람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며 ‘시녀들’ ‘왕녀 마르가리타’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민중의 빈곤한 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난쟁이나 어릿광대 등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는데 이들 역시도 희화화하지 않고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담담한 필치로 묘사했다.
한 가지 더∼ 서양화에서는 세 사람 이상이 등장하는 초상화를 집단 초상화라고 부릅니다. 집단 초상화는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발히 제작됐는데, 이 무렵 네덜란드는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시민이 다스리는 나라여서 힘을 가진 시민들이 서로 모여 집단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아름다운 귀부인을 ‘미의 여신’에 빗댄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보티첼리(1445~1510), 비너스의 탄생, 1486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5cm, 피렌체, 우피치 갤러리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모습을 닮게 그릴 뿐 아니라 그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 직업, 취미 등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관례와 달리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이도록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신화 속의 주인공이나 유명한 영웅으로 인물화를 그리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그림 속 주인공을 신화나 역사의 유명한 인물에 빗대어 더욱 멋지게 꾸며주기 위해서입니다.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도 그런 종류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미의 여신인 비너스가 바다에서 태어나는 모습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비너스의 발 아래 조가비가 그려져 있는 것은 엄마의 몸을 빌리지 않고 직접 바다에서 태어났음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비너스가 탄생하자 그림 왼편에서 서쪽 바람의 신 제피로스와 꽃의 여신 클로리스가 꽃바람을 불어 비너스를 뭍으로 보내줍니다. 뭍에 있던 계절의 여신은 망토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여신을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봄의 여신이기도 한 비너스가 뭍에 당도했으니 이제 세상에는 계절의 여왕 봄이 찾아올 것입니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 그림은 시모네타 베스푸치를 모델로 해서 그려졌습니다. 시모네타는 당시 피렌체의 유력한 가문인 베스푸치 집안의 귀부인이었지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시모네타를 칭송하지 않는 피렌체인은 진정한 피렌체인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보티첼리는 바로 이 그림으로 시모네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미인박명’이라는 말처럼 시모네타가 일찍 죽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그림은 시모네타가 일찍 죽은 뒤 그려진 ‘사후 초상’입니다.
보티첼리는요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는 15세기 당시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을 위해 초상화와 ‘동방박사의 경배’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명성이 절정에 달하던 1481~1482년에는 로마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측면 벽화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사실적인 표현을 보다 누그러뜨리고 신화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신비로운 세계를 곡선과 온화한 색으로 표현,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했다. ‘비너스의 탄생’ ‘수태고지’ 등이 대표작이다.
한 가지 더∼ 신화 속에는 위대한 신과 영웅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서양미술에서는 초상화 속 모델을 멋지게 꾸며 그리고 싶을 때 신과 영웅의 이미지를 자주 차용합니다. 나폴레옹을 제우스로, 태양 왕 루이 14세를 아폴로로 묘사한 것도 바로 이런 경우이지요. 그리고 17세기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는 자신의 두 부인을 미의 세 여신인 비너스, 헤라, 아테나로 그렸습니다.

위압적인 인물을 실물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앵그르의 ‘루이 프랑수아 베르탱의 초상’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앵그르(1780~1867), 루이 프랑수아 베르탱의 초상, 1833, 캔버스에 유채, 114.3×93.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신고전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어릴 적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남다른 향학열로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지요.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사람입니다. 앵그르는 특히 초상화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섬세한 외모 묘사는 물론 사람의 내면까지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앵그르가 중년에 그린 ‘루이 프랑수아 베르탱의 초상’도 모델의 내면을 잘 꿰뚫어본 초상화입니다. 그림은 전반적으로 어둡습니다. 주인공의 옷도 검은색이네요. 어두운 분위기는 초상화의 주인공을 매우 위엄 있게 만듭니다. 화면 전체가 어둡게 가라앉아서 밝은 빛을 받은 얼굴만 오롯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움찔하게 됩니다. 그가 우리를 쏘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만큼 위압적인 인물이 실물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베르탱은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었다고 합니다. 앵그르는 이 거물의 대단한 권위와 거친 기질을 묘사하려 무척 애를 썼으나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 울기까지 했다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베르탱이 정치적인 주제를 놓고 무섭게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았는데, 바로 그 표정에서 앵그르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이 초상화에 그려진 모습이지요. 어떤가요? 우리가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움찔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지요?
앵그르는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는 16세 때 고향 몽토방을 떠나 파리로 나와 당시 명성을 떨치던 화가 다비드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파리를 오가며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초상화와 역사화, 우아한 분위기의 누드화를 많이 그렸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달리스크’는 19세기 신고전주의의 불멸의 명작으로 꼽힌다.
한 가지 더∼ 신고전주의는 고전주의의 오랜 전통을 근대사회에 맞춰 새롭게 이어나간 미술을 말합니다. 고전주의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상적이고 조화로운 미술을 모범으로 삼은 유럽 미술의 핵심적인 뼈대지요. 신고전주의는 고전주의보다 더 엄격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여줍니다. 앵그르와 ‘나폴레옹 대관식’ 등의 명작을 그린 그의 스승 다비드가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힙니다.



예수 얼굴이 새겨진 천을 간직한 여인의 이야기엘 그레코의 ‘성 베로니카’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엘 그레코(1541?~1614), 성 베로니카, 1577~1580년경, 캔버스에 유채, 84×91cm, 톨레도, 산타크루스 미술관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는 오랜 세월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 모습이 그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을 때 그려진 초상화는 단 한 점도 없습니다. 모두 예수가 돌아가신 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상상에 의해 제작됐지요.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살아 계실 때 그 얼굴 모습이 또렷한 이미지로 남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는 가시면류관을 쓴데다 채찍에 맞아 아픈 몸을 추스르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요. 그때 한 여인이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뛰어나와 천으로 예수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가만히 보고만 있기에는 고통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곁에 있던 군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화를 내며 여인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여인은 그 와중에도 예수의 얼굴을 닦던 천을 꼭 잡고 있었지요. 그 천을 펼쳐본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천에 예수의 얼굴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으니까요. 전설에 따르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그 천은 지금 로마 교황청에 보관돼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특히 엘 그레코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천을 베로니카가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독특한 2인 초상화를 완성했습니다. 천을 들고 있는 성녀의 표정은 경건하기 그지없고 관객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습니다. 깊은 신앙심에 토대를 두고 그린 그림인 만큼 매우 거룩한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
엘 그레코는요 ‘톨레도의 화가’라는 별명을 가진 엘 그레코(1541?~1614)는 원래 지중해 섬 크레타 출신.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쳐 제2의 고향인 스페인 톨레도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그레코로 불리게 되었다. 종교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성전을 정화하는 그리스도’ 등의 명작을 남겼다.
한 가지 더∼ 중세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유물을 매우 신성시했습니다. 성유물이란 베로니카의 천 같은 이적의 증거물,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 파편이나 못 같은 종교적 기념물, 성인들의 유해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성유물들 가운데 병을 낫게 하는 등 신비로운 효험이 있다고 인정된 것들은 많은 순례자들을 끌어들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엘 그레코의 작품처럼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광활한 평원을 담은 미국식 풍경화우드의 ‘봄이 오네’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우드(1891~1942), 봄이 오네, 1936, 메이소나이트에 유채, 46×102cm, 노스 캐롤라이나, 레이놀다 하우스 미국 미술관(도판 ‘웬디 수녀의 1000 걸작’, 497쪽)


봄은 파릇파릇한 새순과 함께 옵니다. 더불어 봄은 농부들의 부지런한 쟁기질과 함께 옵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오면 농부들은 한 해 농사를 위해 땅부터 갈지요. 자연은 초록빛 의욕으로 만물에 윤기를 더해주고, 농부는 황금빛 구슬땀으로 논밭에 생기를 더해줍니다.
그랜트 우드가 그린 ‘봄이 오네’는 지루한 겨울을 보내고 활동하기 시작한 부지런한 농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미국 땅은 워낙 광활한 탓에 너른 평원이 끝없이 이어지지요. 그 땅을 가는 농부의 모습이 마치 개미 같습니다. 농부가 ‘ㅁ’자로 가는 땅은,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초록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갈색만 남겠지요.
그림 왼쪽 상단에 완전히 갈려 사각형을 이룬 갈색 땅이 보입니다. 완만한 평야 위에 이렇듯 기하학적인 형태로 땅을 갈아엎으니 마치 거대한 추상화 한 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매일 울고 웃으며 부대끼는 일들도 먼 거리,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이처럼 한 폭의 아름다운 추상화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추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림 속의 농부처럼 아주 부지런해야 할 것입니다.
우드는요 미국 화가 그랜트 우드(1891~1942)는 제1차세계대전 참전 후 1920년대 몇 차례 유럽을 방문하면서 동판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알브레히트 뒤러 같은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들에게 빠져들었다. 이들의 독창적인 발상과 신비주의에 매료된 우드는 귀국 후 미국의 전통적인 소박한 리얼리즘 기법을 이용해 ‘개척자 터너’ ‘화분을 든 여인’ ‘아메리칸 고딕’을 그리면서 유명해졌다.
한 가지 더∼ 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유럽 미술의 전통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미국 미술은 미국 미술다워야 한다’며 유럽에서는 보기 힘든 시각과 형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나타났습니다. 우드도 그런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우드의 풍경화는 오로지 미국에서만 가능한 이미지입니다.

고통과 좌절감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한 칼로의 ‘부상당한 사슴’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칼로(1907~1954), 부상당한 사슴(나는 가련한 작은 사슴), 1946, 섬유판에 유채, 22.4×30cm, 개인 소장


화살을 많이 맞아 심하게 부상당한 어린 사슴이 홀로 숲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나무들은 가지가 부러졌거나 잎이 없어 죽은 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나마 잎이 있는 가지는 부러져 바닥에 뒹굴고 있군요. 이 가엾은 가지는 부상당한 사슴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뒤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구름이 보입니다. 구름 사이로 번개가 치고 있습니다. 우호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적대적인 환경입니다. 화가는 부상당한 사슴의 머리를 사람의 얼굴로 대신 그렸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화가 자신인 프리다 칼로입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칼로는 무척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척추수술을 받았으나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멕시코 태생인 칼로는 어릴 적 버스 사고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육체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제 수술만 받으면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수술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몸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이지요. 엄청난 실망이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칼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좌절감과 육체적 고통을 부상당한 사슴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예술가들은 인간의 감정을 사람의 형상을 통해서만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배경을 통해 묘사하기도 하고, 사람의 얼굴을 동물의 몸에 덧붙이는 식의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쓰기도 합니다. 칼로는 이런 방법에 있어 누구보다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칼로의 아픈 마음이 그만큼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칼로는요 멕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는 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고, 18세 때 버스 사고로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을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사고는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그는 ‘부상당한 사슴’ ‘두 명의 프리다’ ‘나의 탄생’과 같이 상처받은 내면의 모습을 주제로 한 자화상을 주로 그렸다.
한 가지 더∼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그림과 가장 가까운 장르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다양한 감정과 복잡한 상황을 매우 함축적이고 미적인 언어로 표현해내지요. 그림도 한 장면 안에 여러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과 시는 둘 다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칼로의 그림을 보며 한번 시를 지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파도가 몰아치는 광경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편크레인의 ‘포세이돈의 말들’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크레인(1845~1915), 포세이돈의 말들, 1892년경, 캔버스에 유채, 86×215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구름 속에는 참 많은 사물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구름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강아지도, 자동차도, 엄마 얼굴도 보이지요.
그런데 월터 크레인이라는 화가는 파도를 볼 때 구름을 보는 것처럼 다른 사물의 형상이 보였나 봅니다. 크레인이 그린 파도는 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힘차게 달려오는 모양이 마치 군대가 용감하게 돌진하는 것 같군요. 발 아래 닿는 것들을 모두 짓밟을 기세입니다. ‘와당탕탕’ 밀려오는 파도의 기세가 꼭 그렇지요. 띠처럼 늘어선 파도의 하얀 거품이 화가로 하여금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오는 백마를 생각나게 한 것 같습니다. 바다로부터 온 백마는 당연히 바다를 다스리는 신 포세이돈의 말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한 화가는 말들을 호령하는 포세이돈도 함께 그렸습니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풍경이 이처럼 옛 신화의 풍경으로 바뀌니 우리의 마음도 저 아득한 상상의 세계로 날개를 폅니다. 상상 속에서는 나도 하늘을 나는 말들을 호령하는 올림포스의 신이 될 수 있겠지요.
크레인은요 월터 크레인(1845~1915)은 ‘그림동화집’ ‘이솝우화집’ 등 어린이 동화집의 삽화를 그린 저명한 영국 화가. 어린이들이 보는 그림책에 컬러 그림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화가이기도 하다. 신화나 설화, 동화 등을 바탕으로 상상의 인물과 풍경을 그리는 데 능했으며 일상생활과 미술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로 섬유나 유리창, 건축물 장식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한 가지 더∼ 월터 크레인은 문학적이고 신화적인 주제를 즐겨 그린 영국의 화가입니다. 잘 그리는 것 못지않게 깊이 생각하고 많이 상상하는 것을 중요시했지요. 상상을 통해 풍경에 신비로운 힘을 불어넣은 크레인을 미술사에서는 상징주의 화가로 분류합니다.

‘신비의 미소’라는 별명이 붙은다빈치의 ‘모나리자’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다 빈치(1452~1519), 모나리자, 1503~1506년경, 나무에 유채, 77×53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는 어렴풋한 미소로 유명한 초상화입니다. 웃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언뜻 봐서는 종잡을 수 없지요. 과연 모나리자는 웃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은 걸까요? 다 빈치 이전에도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초상화는 모델을 닮은 그림이라는 느낌만 주었을 뿐 그림 자체가 진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 빈치는 초상화에 생명감을 불어넣길 원했고 결국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즉 사람을 그릴 때 윤곽선을 없애고 그 부분을 붓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사진처럼 보이게 한 것이죠. 사진을 보면 인물의 윤곽에 선이 없고 경계가 흐릿하단 걸 알 수 있습니다. 다 빈치는 바로 이런 표현을 사진술이 탄생하기 수백 년 전에 선구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윤곽선이 뚜렷한 초상화만 보아온 당시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처음 보고 큰 충격을 받았지요. “도대체 이 그림은 어떻게 이토록 사실적으로 보일까?” 사진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그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살짝 웃는 듯한 모나리자의 표정이 진짜 사람의 표정 같아 신비롭기만 하여 그림에 ‘신비의 미소’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습니다. 모나리자가 웃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입술도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윤곽선이 없는 데다 그 주변이 흐릿하고 부드럽게 표현돼 있어 볼수록 웃는 듯 마는 듯 헷갈리지요. 진정으로 신기한 미소, 마술 같은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 빈치는요 이탈리아 출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과학자. 어린 시절부터 미술 뿐 아니라 음악, 수학, 토목, 건축, 지리, 물리,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고, 과학과 예술을 결합해 원근법 등의 유채 기법을 발전시켰다.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에 깊은 관심을 가져 다수의 해부도를 남기기도 했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암굴의 성모’ 등이 대표작이다.
한 가지 더∼ 윤곽선을 없애고 경계 부분이 희미하게 변해가도록 표현한 다 빈치의 회화 기법을 스푸마토(sfumato)라고 부릅니다. 마치 안개가 끼어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듯 색조의 농담이 점진적으로, 미묘하게 변해 사실적이면서도 신비롭게 보이지요.

에펠탑을 둘러싼 화려한 빛의 향연~들로네의 ‘동시에 열린 창들’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들로네(1885~1941), 동시에 열린 창들, 1912, 캔버스에 유채, 46x37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로베르 들로네의 ‘동시에 열린 창들’이라는 그림이에요. 처음 보면 뭘 그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각형 혹은 삼각형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모습만 눈에 들어오지요. 이 그림처럼 사물의 형태를 거의 혹은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을 우리는 추상화라고 부릅니다.
사물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 추상화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들로네가 이 그림을 그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마구 그린 것은 아닙니다. 들로네는 어느 날 파리의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갔답니다. 거기서 에펠탑을 바라보는데, 주변 건물의 창에 햇빛이 반사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는군요. 거기서 들로네는 상상해보았답니다. 도시의 모든 창이 열리고, 그 창마다 햇빛이 반사되어 빛의 놀이로 충만한 세상, 빛을 무지개 색채로 분광하는 프리즘처럼 수많은 유리창이 서로에게 프리즘이 되어 풍성한 빛과 색의 하모니를 연출하는 세상, 그 찬란한 환상이 바로 이 그림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그림 가운데서 약간 위쪽을 보세요. 녹색의 기다란 에펠탑이 보이나요? 그 에펠탑을 둘러싸고 갖가지 표정으로 어우러진 반사광이 화려한 추상 풍경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밝은 색과 어두운 색,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 선명한 색과 흐릿한 색 등 그 어우러지는 모습 또한 매우 명랑하고 율동적입니다. 마치 경쾌한 음악을 듣는 것 같지 않습니까? 들로네는 바로 그 음악을 생각하며, 그 음악에 취해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들로네는요 로베르 들로네(1885~1941)는 오르피즘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오르피즘은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무지개 빛깔을 띠듯 사물의 모든 색을 원색들로 분해해 표현하는 화풍을 가리키는 말. 처음에는 사물의 형태를 해체하는 입체파로 출발했으나, 이후 색채의 해체에 관심을 가지면서 러시아 출신의 부인 소니아와 함께 오르피즘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 ‘에펠탑’ 연작 등 화사한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을 남겼으며 현대 추상미술을 창시한 칸딘스키, 마르크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 더∼ 오르피즘은 들로네의 색채 구사가 매우 음악적이라 하여 시인 아폴리네르가 들로네의 미술에 붙여준 이름입니다. 오르피즘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시인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이용해 만든 말입니다. 오르페우스가 하프를 타면 심지어 말 못하는 짐승들까지 감동을 받았다고 하지요. 오르페우스의 음악처럼 생생한 음악적 감동을 주는 그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네덜란드 시민들의 집단 초상화렘브란트의 ‘야경’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렘브란트(1606~1669), 야경, 1642, 캔버스에 유채, 363×438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그린 ‘야경’이라는 집단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경단을 조직해 자신들의 땅과 재산을 지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지요. 그림은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사방으로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생기 있게 다가옵니다. 그들의 무기 역시 조용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날이 밝으면 경계가 다소 누그러지겠지만,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통스럽게 되찾은 자신들의 땅과 이웃, 재산을 다시 잃거나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더욱 강한 나라를 만들겠지요. 렘브란트는 이와 같은 결의를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모델들은 자발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인 만큼 작품 제작 비용도 모금을 통해 렘브란트에게 지불했다고 합니다. 물론 작품이 완성됐을 때 어둠으로 인해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거나, 얼굴이 가려진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고 하네요. 바로 이 부분이 집단 초상화를 제작할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모델이 된 이들은 모두 자신이 두드러져 보이기를 원하지만 화가는 전체의 구도와 완성도를 위해 인물 표현에 차이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어쩔 수 없이 인물들의 비중이 달라집니다. 렘브란트는 공평한 화면 배분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칫 그림이 개인 초상들을 모아 짜깁기한 것처럼 초점도 없고 감동도 없는 어설픈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는 욕을 먹을지언정 그 차이를 극적으로 살려 진정으로 감동이 넘치는 집단 초상화를 제작했습니다. 위대한 화가들은 결단력도 남다른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는요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반 린(1606~1669)은 1633년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호평을 받으면서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1642년 그린 ‘야경’을 끝으로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그는 같은 해 아내 사스키아와 사별하면서 죽는 날까지 경제적·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 신부’ ‘엠마오의 그리스도’ 등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상당수는 1642년 이후 제작되었다. 그의 그림은 명암의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한 가지 더∼ 서양 초상화의 출현 연대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초상화가가 등장한 것은 홀바인 등이 활동한 16세기부터지요. 물론 그 이전에 다 빈치 등의 대가가 초상화를 그렸지만 모두 전문 초상화가는 아니었습니다. 전문 초상화가의 등장은 궁정에서 궁정화가를 고용하고 궁정 초상화 및 귀족 초상화가 본격적으로 그려진 16세기부터입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담은로세티의 ‘베아타 베아트릭스’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로세티(1828~1882), 베아타 베아트릭스, 1864~1870년경, 캔버스에 유채, 86.4×66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초상화의 모델이 된 사람이 죽은 뒤에 그린 그림을 ‘사후 초상’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 그리는 초상화도 많지만 죽은 다음에 그리는 초상화도 많습니다. 특히 돌아간 이에 대한 그리움이 큰 친지나 후손들이 사후 초상화를 많이 의뢰합니다. 로세티가 그린 ‘베아타 베아트릭스’도 사후 초상화입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시달, 바로 로세티의 부인입니다. 부인이 죽고 난 뒤 그 아픈 마음과 애절한 사랑을 담아 표현한 그림이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으나 엘리자베스 시달이 살아 있을 때는 서로 다툰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시달은 아이를 유산해 마음의 상처가 컸는데 남편인 로세티는 그런 부인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자신의 즐거움만 좇았다고 하네요. 상심한 엘리자베스 시달이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 죽게 되자 로세티는 그제서야 가슴을 치며 지난날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 슬픔과 한을 담아 그린 그림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석양이 지는 화면을 배경으로 기도하듯 조용히 눈을 감은 엘리자베스 시달. 엘리자베스 시달의 뒤쪽으로 피렌체 시가지가 어렴풋이 보이고, 왼편으로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오른편으로 녹색 옷을 입은 남자가 보입니다. 바로 베아트리체와 단테입니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책을 쓴 피렌체의 유명한 시인입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지요. 그런 베아트리체가 일찍 죽는 바람에 단테는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 그림은 그 사실을 상기시켜 로세티 자신과 엘리자베스 시달의 사랑이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과 같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비록 함께 사는 동안 다툼도 많았고 이제 영원히 헤어지게 됐지만 두 사람 사이를 이어준 사랑만큼은 앞으로도 영원히 퇴색되지 않고 빛날 것이라는 염원을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뒤늦게나마 사랑하는 아내를 기리는 마음이 애틋하게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로세티는요 댄티 게이브리얼 로세티(1828~1882)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었다. 신화나 성서, 문학작품 등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수채화나 소묘 작품을 주로 그렸는데 ‘단테의 꿈’ ‘프로세르피나’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1862년 결혼 2년 만에 아내 엘리자베스 시달이 죽은 뒤에는 사실상 미술 활동을 중단하고 시 쓰기에 몰두했다.
한 가지 더∼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낭만주의 회화가 크게 발달했습니다. 그 그림들을 ‘빅토리아조 회화’라고 부르는데 로세티는 그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베아타 베아트릭스’에서 나타나는 로세티의 시적이고 감상적인 태도, 우아한 붓놀림이 빅토리아조 낭만주의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다리 춤’을 인상적으로 그린로트레크의 ‘춤추는 잔 아브릴’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로트레크(1864~1901), 춤추는 잔 아브릴, 1892, 판지에 유채, 85.5×4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19세기 프랑스 화가 로트레크는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주점과 카바레에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술집에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나 무용수들이 춤추는 광경을 유심히 관찰한 뒤 그것을 화폭에 담기 좋아했기 때문이죠. 그에게는 꽃이나 자연풍경보다 이런 밤 풍경이 더욱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유명한 무용수 잔 아브릴의 초상을 많이 그리게 된 것도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를 자주 출입했기 때문입니다. ‘춤추는 잔 아브릴’은 아브릴의 장기라 할 수 있는 ‘다리 춤’을 인상적으로 포착한 작품입니다. 그림 속 잔 아브릴은 흰 블라우스에 흰 치마를 입고 검은 스타킹을 신었습니다. 흰 스커트가 출렁출렁 물결치는 가운데 검고 가녀린 다리가 난초 잎처럼 흔들립니다. 다리를 쫙 벌리거나 곧게 뻗어 올리는 동작들은 아브릴에게 ‘누워서 떡 먹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림에서처럼 한 발을 치켜들고 앞뒤로 마구 흔드는 것 또한 그의 장기 중 하나였습니다. 얼마나 역동적으로 춤을 추었던지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까지 생겨났다고 하는군요. 그림에서 로트레크가 배경을 거친 터치로 흔들리듯 그린 건 아브릴의 열정과 역동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충 그린 것 같은 터치가 사실은 잔 아브릴의 개성을 적절히 담아낸 표현이었던 것이죠. 잔 아브릴이 처음 춤을 배운 이유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청소년기에 근육이 자신도 모르게 실룩대는 신경성 질병을 앓아 그것을 치료하려고 춤을 배웠는데, 결국 그것이 직업이 되었고 나중에는 대단한 명성까지 얻었습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로트레크는요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겪은 두 차례의 사고로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추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술집과 매음굴, 서커스홀 등의 정경을 주로 그렸다. 과장된 묘사와 풍자적 접근으로 이들의 삶을 흥겹게 표현한 것이 특징. ‘물랭 루즈에서’ ‘치장’ 등이 대표작이다.

한 가지 더∼ 파리 북부에 자리한 몽마르트르는 19~20세기 초 카바레 등 환락가와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몰려 있던 곳입니다. 로트레크뿐만 아니라 피카소와 반 고흐, 위트릴로, 모딜리아니 등의 아틀리에가 이곳에 있었고, 당시 젊은 예술가들의 집합소였던 ‘라팽 아질’과 같은 카페들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몽마르트르의 테르트르 광장에 가면 화가들이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옷을 잘 차려입은 아내를 클로즈업~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마티스(1869~1954), 모자를 쓴 여인, 1905, 캔버스에 유채, 81×60cm,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당신의 그림을 어린이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하고 한 기자가 마티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티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보기에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말해줄 겁니다.”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는, 예술은 위대한 어떤 것이거나 우리에게 교훈과 가르침을 주는 것이기 이전에 우리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좋은 그림은 일단 보는 즐거움을 주어야 합니다. 마티스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엇보다 색을 잘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색을 억누르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어 시원한 조화를 꾀하면 우리의 눈과 마음도 해방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색채를 자유롭게 풀어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모자를 쓴 여인’입니다.
화폭에는 옷을 잘 차려입고 그럴듯하게 포즈를 취한 여인이 클로즈업돼 있습니다. 바로 마티스의 부인입니다. 이런 구성은 이전의 초상화에서도 무수히 보아오던 것들이지요. 그러나 화가가 사용한 색채를 보면 마치 불협화음으로 이뤄진 음악을 듣는 듯 생소한 기분이 듭니다. 인물의 얼굴이 살색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관계 없는 녹색, 하늘색 등으로 뒤덮여 있는가 하면, 얼굴에 쓰인 색들이 배경에도 버젓이 칠해져 있습니다. 사물의 고유 색은 그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그림이 추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마티스의 색이 우리가 지닌 고정관념과 대치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밝고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것은 색이 형태로부터 해방돼 그 잠재력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초상화를 그릴 때도 색채가 충만한 그림을 그린 마티스는 색이 인간에게 주는 기쁨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티스는요 20세기 미술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원래 법률을 공부했으나 20대 초반 파리 장식미술학교에 다니면서 화가로 진로를 바꿨다. 붉은색, 푸른색 등 원색을 많이 사용하고 기하학적인 선으로 인물을 표현해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 1912년 모로코 등지를 여행한 뒤에는 기존의 특색에 아라베스크나 꽃무늬 같은 장식적 요소를 더해 특유의 화려하고 대담한 화풍을 완성했다. ‘붉은 방’ ‘춤’ 등이 대표작이다.
한 가지 더∼ 야수파는 색채를 회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본 화파입니다. 마티스가 이끌고 뒤피, 브라크 등이 참여한 ‘야수파미술운동’은 20세기 초 서양 회화에 색채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지를 각인시켰습니다. 초상화를 그릴 때도 그 사람의 분위기나 기질, 주변 환경의 영향을 모두 색채로 표현해 매우 강렬한 인상의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화가의 꾸밈없는 그림반 고흐의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반 고흐(1853~1890),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1889, 캔버스에 유채, 51×45cm, 시카고, 리 B 블록 컬렉션


‘해바라기’로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습니다. 지금껏 남아 있는 반 고흐의 자화상은 모두 35점이지요. 반 고흐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기 어려워서였습니다. 결국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요.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은 반 고흐가 아주 슬픈 일을 겪고 난 뒤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반 고흐에게는 고갱이라는 화가 친구가 있었습니다. 반 고흐는 고갱을 무척 좋아했지만 두 사람은 성격이 맞지 않아 늘 티격태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갱이 더 이상 반 고흐와 같이 지낼 수 없다며 그동안 함께 쓰던 아틀리에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화가 난 반 고흐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고 말았지요. 친구도 떠나버리고 한쪽 귀마저 잃어버린 반 고흐. 돌아볼수록 스스로가 처량했겠지요. 하지만 반 고흐는 그런 처량한 모습도 숨김없이 화폭에 담았습니다. 화가는 진실을 그리는 사람인 까닭에 자화상조차 실제보다 멋있게 꾸며 그릴 수는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런 슬픔 속에서도 화가는 다시금 창작 의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어떤 순간에도 그림을 포기하는 법이 없답니다. 배경의 붉은색이 그 뜨거운 열정을 잘 말해주고 있지요.
반 고흐는요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화가가 되기 전 화상 점원, 전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초기에는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사실주의적인 어두운 느낌의 그림을 그렸지만, 1886년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에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 색채가 변화하는 자연을 묘사하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타는 듯한 색채와 꼼꼼한 필촉이 두드러지는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나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 가지 더∼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그린 그림을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자화상은 옛날부터 나타난 초상화의 한 형식이지만, 서양의 경우 르네상스 이전에는 많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화가들 대부분이 주문을 받고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는데, 아무도 사지 않을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는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예술가가 천재 대접을 받기 시작한 15~16세기부터는 자화상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많이 그려졌습니다. 서양에서 근대적 자화상의 시조로 꼽히는 이는 16세기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입니다.

엄숙한 결혼식을 치르는 신랑 신부의 모습을 담은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
아이와 함께 보는 명화 16

에이크(1390~1441), 아르놀피니 부부, 1434, 나무에 유채, 81.8×59.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는 결혼식을 치르는 신랑과 신부를 그린 그림입니다. 교회나 예식장이 아닌 가정집에서 식을 치르는 것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데 이 무렵에는 이처럼 집에서도 결혼식을 치르곤 했다는군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신랑은 왼손으로 신부의 손을 잡고 오른손을 들어 선서를 하고 있습니다. 검은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겠다는 맹세이지요. 두 남녀의 표정에서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화가는 배경의 사물을 통해서도 선서의 내용을 관객에게 친절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부부 사이의 개는 충성심, 곧 부부간의 정절을 나타냅니다. 벗어놓은 신발은 결혼 서약의 신성함을, 벽에 걸린 묵주와 거울은 순결을 상징하지요. 창틀의 과일은 선악과를 상기시켜 원죄 이전의 아담과 이브를 지향하게 합니다. 샹들리에에 켜 있는 단 한 개의 촛불은 눈동자처럼 우리를 살피시는 하느님, 혹은 하느님의 가호를 나타내지요. 이처럼 화가는 평범한 사물을 통해 그림의 주제를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징들을 이용해 관객들에게 이 부부가 결혼을 얼마나 소중하고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증인들이죠. 이 그림에는 증인과 하객이 그려져 있지 않군요. 증인은 어디 있는 걸까요?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 부부 사이로 두 남자가 아주 작게 비치는 게 보입니다. 그들이 바로 증인들이지요. 그들은 그림 앞쪽(바깥쪽)에 있어 화면에는 보이지 않고 거울에만 비친 것입니다. 화가의 기지가 돋보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 에이크는요 네덜란드의 화가 집안에서 태어난 얀 반 에이크(1390~1441)는 형 휘베르트와 함께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손꼽힌다. 회화에 유채화를 처음 도입했기 때문이다. ‘대법관 롤랭과 성모 마리아’ ‘겐트의 제단화’ 등 세밀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종교화와 초상화를 주로 제작했다.
한 가지 더∼ ‘상징’은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관념이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다’라고 할 때 평화라는 관념이 비둘기라는 사물에 실려 표현된 것이지요. 얀 반 에이크를 비롯해 옛날 화가들은 상징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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