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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창업 성공비결

9평 가게에서 떡 팔아 강남에서 빌딩 산 홍일태·공미정 부부

“고객을 감동시키는 작은 아이디어가 불경기에도 큰 돈 모으게 만들었어요”

■ 글·구미화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2004. 10. 04

서울 신사동 광림교회 옆에서 11년째 떡집을 운영하고 있는 홍일태 사장. 전북 정읍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낙원동에서 떡 만드는 기술을 배운 그는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강남에서 9평짜리 떡집을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됐다. 홍일태·공미정 부부가 털어놓은 성공비결.

9평 가게에서 떡 팔아 강남에서 빌딩 산 홍일태·공미정 부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토요일 오후. 서울 압구정역 부근의 ‘건강떡집’에 들어서자 안주인 공미정씨(35)는 포도즙으로 곱게 물들인 쌀 반죽을 얇게 밀어 동그랗게 잘라낸 뒤 땅콩, 팥, 유자로 만든 소를 넣어 말고 있었다. 거기에 씨를 뺀 대추를 가늘게 썰어 꽃 모양으로 만든 것과 호박씨를 얹으니 연분홍 비단 위에 장미를 수놓은 듯 예쁜 포도말이떡이 된다.
“주문받은 떡을 만들고 있어요. 사진을 찍으려면 떡이 좀 있어야 하는데 떡이 다 팔려서 어떡하죠? 떡집에 떡이 없어서(웃음).”
길가로 향한 가판으로 눈을 돌리니 정말 남아 있는 떡이 서너 접시뿐이었다. 시계 바늘은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공씨는 휑한 가판을 확인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을 더욱 상냥하게 배웅했다.
가게 안이 시끌벅적해지자 다락방에서 홍일태 사장(41)이 내려왔다. 20년 가까이 새벽 3~4시경부터 하루를 시작해온 그는 가게가 비교적 한산해진 틈을 타 잠시 눈을 붙이곤 한다.
주인 부부와 종업원 세 명이 함께 움직이기에도 비좁은 작은 규모지만 ‘건강떡집’은 강남에서 떡 맛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인절미에 호두와 잣, 팥, 대추를 버무린 소를 넣어 검은깨, 녹두 고물을 입힌 ‘건강떡’은 건강떡집의 트레이드마크. 쑥인절미에 유자와 땅콩, 팥, 잣으로 만든 소를 넣고 깨를 묻혀 만든 깨송이떡은 고소하고 상큼한 맛으로 젊은 고객들에게 인기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다양한 떡이 전국 각지의 잔칫집에 배달되고, 낱개로 포장한 떡을 세트로 만들어 선물용으로도 많이 팔린다고 한다. 요즘은 해외 유학생들에게 전해지는 양도 적지 않다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주문전화가 계속해서 걸려왔다. 경기 침체의 영향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주말이면 쌀 1~2가마를 쓸 정도로 매출이 꾸준하다고 한다.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강남의 고객들을 사로잡아 지금은 강남 한복판에 번듯한 오피스텔 건물까지 소유한 ‘부자’가 됐지만 이들 부부는 10년 전, 떡집에 필요한 기계는 물론 쌀과 팥, 콩 등 떡 재료 일체를 모두 외상으로 들여놓으며 그야말로 빚더미에서 떡 장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 낙원동 떡집 골목으로 흘러들어 떡 만드는 기술을 배운 홍 사장은 89년부터 형과 함께 일했다. 제과점에서 제빵 기술을 배운 형이 압구정동 소망교회 앞에 ‘상원떡집’을 열면서 그에게 동업을 제의한 것. 형과 형수가 알콩달콩 떡을 파는 모습을 지켜보며 독립을 꿈꿨던 홍 사장이 마침내 떡 가게 주인이 된 건 94년 2월. ‘상원떡집’의 손님이던 공씨와 지하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지 1년 2개월 만이었다. 평소 큰형이 “소망교회 앞에 떡집을 냈으니 너는 광림교회 앞에서 떡집을 하면 되겠다”고 말했던 누나의 말에 따라 광림교회 부근 가게자리를 찾았는데, 마침 교회 옆 치킨집이 급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하루 3~4시간씩 자면서 허리 펼 틈 없이 일해
“당시 통장에 2천5백만원 정도 있었어요. 결혼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가게를 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죠. 다행히 형님 내외가 마련해주신 권리금 6천만원과 저희 부부가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6천만원을 합쳐 1억2천만원으로 가게를 얻었어요.”
5년 전, 형이 “동업을 하자”고 제의했을 때 홍 사장은 “5년간 종업원으로 일할 테니 나중에 독립할 때 종자돈을 마련해달라”고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5년 뒤 형은 그 약속을 지켰다.

9평 가게에서 떡 팔아 강남에서 빌딩 산 홍일태·공미정 부부

해병대 전우회 행사 때 온가족이 함께 한 모습. 홍사장 부부는 매주 일요일을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는 날로 정했다.


형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가게는 마련했지만 떡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와 각종 재료를 구비할 돈이 없었다. 그는 형이 거래를 하던 기계회사를 통해 수천만원 상당의 기계를 외상으로 들여놓았다. 쌀과 팥, 콩 등 재료도 모두 상원떡집에 있으면서 거래했던 쌀집에서 외상으로 대주었다. 그때 신용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홍 사장은 지금도 하나의 직업을 선택하면 독립하기까지 최소한 5년은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년이면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주인의 입장과 손님의 입장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고, 그 기간에 형성한 인맥이 창업하는 데도 큰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빚으로 시작한 장사인 만큼 부부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종업원을 두지 않았다. 새벽 3시면 집에서 나와 전날 불려놓은 쌀로 떡을 만들고, 아침부터 낮 동안 아내는 떡을 팔고, 남편은 배달을 했다. 그리고 저녁이면 다시 떡 만들 재료를 주문하고, 다음날 쓸 쌀을 씻어 건져놓고, 주문받은 떡을 만들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하루 3~4시간밖에 못 자고, 허리를 펼 틈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일했지만 재료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품질을 믿을 수 있어야 단골이 생긴다는 생각에서다.
“지금껏 재료는 우리 농산물 중 최상품만 썼어요. 팥 하나를 준비하더라도 시중에 나와 있는 삶아놓은 팥을 사지 않고 국산 팥을 구입해 직접 불려서 쪄요. 쑥도 마찬가지예요. 음력 3월에 나온 쑥을 약쑥이라고 하거든요. 그때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사서 보관해요. 손님들이 약쑥이라는 것을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아요. 그건 저와의 약속이니까요.”
떡 가게가 자리를 잡으면서 일손이 부족할 때는 이웃 상인이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결혼식 뷔페용 떡 등 대량 주문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그런 와중에도 부부는 소량의 떡을 사가는 손님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소매로 파는 떡은 하루에 쌀 3~4말 분량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먹어본 사람들이 나중에 대량 주문을 하기 위해 다시 찾기 때문이다.
부인 공씨는 남편의 떡 맛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식과 덤을 아끼지 않았다. 당장에는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아이들에게도 따끈따끈한 떡을 맛보라고 권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머지않아 엄마 손을 잡고 다시 가게를 찾곤 했다. 선물세트를 대량으로 주문 받으면 공씨는 반드시 그 가족들이 먹을 떡을 덤으로 포장한다. 대개의 경우 남에게 선물할 떡을 주문하면서 정작 나와 내 가족이 먹을 떡은 선뜻 구입하지 못하기 때문. 부부의 넉넉한 인심과 상냥함은 고객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주문이 몰리면 일주일에 1천여만원의 매상을 올리기도 했다.
부부가 오로지 떡을 만들어 파는 데만 관심을 두는 동안 은행 잔고는 두둑하게 쌓여갔다. 2천~3천원짜리 떡을 팔다보니 대부분 현금 거래였는데 안주인 공씨는 그날그날의 수입을 세어보지도 않고, 재료비만 제외하고 모조리 은행에 넣었다. 그 결과 건강떡집을 연 지 3년 만에 신혼집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받았던 2천7백만원을 비롯한 모든 빚을 갚고, 소망교회 인근의 1억5천5백만원짜리 30평형 연립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다.
“제가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며 처가에 찾아갔을 때 장모님과 약속을 했거든요. 지금은 가진 게 없지만 떡 만드는 기술로 5년 안에 서울에 아파트를 마련하겠다고. 비록 아파트는 아니지만 집을 장만했으니 약속을 지키긴 한 거죠(웃음).”

신혼 초 알몸으로 술잔 부딪치며 서로에 대해 낱낱이 이해하고 동지가 돼
공씨는 평탄한 부부생활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재테크라고 말한다. 92년 봄, 떡집 종업원과 뷔페 예약담당 직원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홍 사장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 끝에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에 골인했다.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오빠와 남동생을 뒷바라지하고 있던 터라 결혼을 생각할 수 없었던 공씨는 “떡 만드는 기술 하나만큼은 최고니 내가 만든 떡을 팔아달라”며 끈질기게 청혼하는 홍 사장에게 끌려가다시피 결혼했다고 한다. 홍 사장에 따르면 결혼식 날까지도 공씨가 쌀쌀맞게 대했다고.

9평 가게에서 떡 팔아 강남에서 빌딩 산 홍일태·공미정 부부

하루종일 붙어지내는 두 사람은 서로를 왕 대접하며 고된 일을 견뎌왔다.


그런 두 사람이 ‘산적두목과 천상선녀’의 만남이라는 주위의 우려를 깨고 ‘닭살 부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신혼 초 충분한 ‘내적 치유’ 기간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일 저녁 남편이 저를 위해 요리를 했어요. 그냥 밥상을 차리는 수준이 아니라 저를 왕비처럼 대접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성껏 준비했어요. 병어를 요리해도 홍고추, 청고추로 예쁘게 꾸며서 찜을 하곤 했죠.”
결혼한 뒤에도 계속해서 형의 떡집에서 일을 한 홍 사장은 뷔페 일을 마치고 밤늦게 퇴근하는 아내를 위해 저녁밥상을 차렸다. 떡집을 연 뒤엔 3년간 떡집 뒷마당에서 김장을 담갔다. 정갈하게 차린 밥상에는 늘 해물볶음, 닭발구이 등 입맛 돋우는 술안주가 빠지지 않았는데 매일 저녁 아내와 소주잔을 부딪치기 위한 홍 사장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밥을 먹으면 꼭 술을 먹게 만들었어요. 부부가 됐지만 20년 넘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허심탄회하게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더군다나 팬티 한 장 걸치지 않고 있으면 거짓을 말할 수 없거든요(웃음).”
홍 사장은 아내와 술을 마실 때마다 알몸으로 술상 앞에 앉았다고 한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려면 몸과 마음이 완전하게 발가벗고 솔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처음엔 주저하던 공씨도 이내 알몸으로 그와 마주 앉았다. 자라온 환경과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들을 털어놓고 또 위로받으며 두 사람은 절대적으로 서로의 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특히 공씨는 거칠어 보이지만 순박한 남편이 “평생 누구한테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뒤로 꼬박꼬박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홍 사장은 “아내의 높임말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힘”이라며 허허 웃었다.
“남편이 한 재테크 중 가장 잘한 게 저를 만난 거래요. 저에게 확실하게 투자를 하니까 돈은 저절로 벌게 된 거죠(웃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꼭 붙어 있어야 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왕 대접하듯 끔찍하게 여기니 몸은 고되더라도 일이 즐겁고,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상냥하고 넉넉하게 인심을 베풀 수 있었다.
고객들에 대한 애정과 인심은 탄탄한 기업들조차 휘청하게 만들었던 IMF 한파를 거뜬히 이겨내게 만들었다. IMF로 고객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주문량도 줄어들자 동대문 등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긴 부부는 어느 날 여러 종류의 떡을 낱개로 포장해 케이크 상자에 담은 다음 예쁜 리본으로 포장해 시장 상인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경기가 나빠져 울적해졌을 상인들을, 작지만 정성이 담긴 선물로 위로하고 싶었던 것. 두 사람의 따뜻한 마음은 금세 금전적인 보상으로 돌아왔다. 동대문시장 상인들은 해마다 주요 고객들에게 갈비세트를 선물했는데 불경기로 적잖은 부담이 되자 떡 선물세트가 고객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가게당 5백 상자씩 주문이 들어왔고, 은행에서도 VIP고객을 위한 선물용으로 주문을 해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연말을 보냈다.



절약과 저축이 유일한 재테크 아이들에게도 건전한 경제관념 심어줘
가게가 번창하는 동안 아이도 셋이나 생겼다. 첫째 아들 경두(9)가 생기고 나서 신사동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했던 부부는 둘째 딸 가영이(6)를 낳을 무렵 논현동의 허름한 아파트를 구입해 세를 놓았다. 그리고 이듬해 막내딸 의송이(5)가 태어난 뒤 신사동 집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역삼동의 오피스텔 건물을 구입하는 데 투자했다.
올해로 떡 장사 11년째를 맞는 홍 사장 부부는 요즘도 고된 일을 계속하고 있다. 재산이 늘면서 손쉽게 돈을 불리고 싶은 욕구도 없지 않았지만 경제권을 쥐고 있는 안주인 공씨는 “일확천금의 운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며 오로지 저축과 보험에만 의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일이 힘드니까 남편이 간혹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좀 편하게 살아보자고 할 때가 있어요. 몇 년 전에도 남편이 5천만원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아는 선배를 통해 확실한 정보를 얻었다면서 이번에 투자하면 반드시 큰돈을 벌 수 있다고요.”

9평 가게에서 떡 팔아 강남에서 빌딩 산 홍일태·공미정 부부

은은한 포도향과 유자의 상큼한 맛이 일품인 포도말이떡을 만들고 있는 공미정씨. 공씨는 세 아이의 이름을 딴 떡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홍 사장이 한 달 동안 설득했지만 공씨는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될 운명”이라며 끝내 돈을 내주지 않았다. 홍 사장에 따르면 그가 투자하려던 주식의 값이 몇 달 새 15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하지만 투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다고. 그때 만약 큰돈을 벌었다면 아마도 떡 만드는 일을 그만뒀을 테고, 지금과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홍 사장은 오히려 10여 년 전과 다름없이 알뜰하고 검소한 아내가 자신을 붙들어준 것을 고마워 했다. 이들 부부는 비상시를 대비해 신용카드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수중에 현금이 없으면 물건을 사지 않고 돌아온다.
두 사람은 세 아이에게도 “돈은 땀의 대가”라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느라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게 미안해 홍 사장은 큰아들 경두에게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모두 갚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매일 1천원씩 용돈을 줬다. 용돈을 줄 때마다 조건을 반복해 말하자 경두는 고민 끝에 세뱃돈 등 아빠가 주는 용돈 이외의 수입을 은행에 저축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빚이 부담스러웠는지 스스로 “하루 용돈을 5백원으로 줄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더욱 기특한 건 지난번 대구지하철 참사 때 경두가 선뜻 적금통장을 성금으로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더니 너무 불쌍하다고 하더라고요. ‘네가 그렇게 안타까우면 도와주면 되지 않겠냐’면서 그동안 저금한 걸 학교에 성금으로 내라고 했더니 무려 1백16만2천원이 담긴 적금통장을 내놓더라고요. 물론 아까운 생각이 없지 않았겠지만 스스로 누군가를 도왔고, 그것으로 인해 칭찬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가 앞으로 바른 길로 가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해요.”
아이가 셋이나 되다보니 유치원 교사가 되기도 하고, 교수가 되기도 한다는 공씨는 아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대신 막내가 네 살 되던 해부터 학습지 교사에게 매일 1시간씩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도록 부탁했다. 구연동화로 재미있게 읽어주는 동화를 들으며 아이들은 책을 아주 재미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지난해부터는 교회에서 알게 된 대학생에게 부탁해 매주 한 번씩 아이들과 함께 서점에 가도록 했다. 공씨는 “처음엔 서점에 가는 이유조차 알지 못해 1시간을 지루하게 버티던 아이들이 이제는 원하는 책을 골라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며 흐뭇해 했다.
부부는 얼마 전부터 일요일엔 문을 닫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일요일을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부부는 아이들이 원하는 공연도 보고, 고속열차를 타보기도 했다고.
“일요일 저녁엔 아이들과 청계산에 올라요. 아이들이 힘들어 못 올라가겠다고 할 때도 있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힘든 것을 참아낼 줄 아는 정신력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상까지 올라가게 하죠.”
덕분에 주위가 산만하고 집중을 잘 하지 못했던 경두는 최근 수학경시대회에서 우수상을 타오는 등 성적이 부쩍 올랐다고 한다.
홍 사장 가족은 여전히 8년 전 구입한 다세대주택에 살고 있다. 창고 공간을 제외한 24평형 공간에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할머니를 포함해 여섯 식구가 살고 있는 것. 더 넓은 집으로 옮겨 갈 여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선뜻 이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떡 만드는 데 필요한 질 좋은 곡식을 보관할 창고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게도 마찬가지. 이미 여러 군데서 체인점을 만들자는 제의를 해왔지만 부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규모가 커지면 당장에 큰돈을 벌 수 있을지 몰라도 떡 맛을 보장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단골 고객들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늘 말해요. 장사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업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라고. 규모가 큰 것보다, 작지만 그 안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가게가 훨씬 좋은 것 아닌가요(웃음).”
최근 건강떡집의 성공스토리를 담은 ‘9평 가게로 백만장자되기’를 펴낸 두 사람은 세 아이가 훗날 엄마 아빠가 자부심을 갖고 일군 건강떡집을 물려받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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