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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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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그린 따뜻한 가족소설 펴낸 최인호

“30년 만에 발견한 어머니 편지 읽으며 가슴으로 울었어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 ■ 사진·지재만 기자

2004. 06. 10

환갑을 앞둔 소설가 최인호씨가 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가족소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에 담았다. ‘용천의 열차사고처럼 각자 운전하는 고독의 열차가 폭발하지 않도록 가족에게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가 들려주는 가족에 얽힌 뭉클한 사랑 이야기.

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그린 따뜻한 가족소설 펴낸 최인호

회색 머리카락의 만년 청년작가 최인호씨(59)가 가족소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새로 펴냈다. 내년이면 환갑이 되는 그가 뒤늦게 부르는 사모곡이 처연했기 때문일까. 그의 팬 사인회가 열렸던 지난 5월15일 서울 강남영풍문고에는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소중한 사람들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를’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등 뒤로 한 채 사람들에게 열심히 최인호 이름 석자를 적어주고 있었다.
사인회를 마친 후 그는 가랑비에 온몸을 내놓고 시거를 피워 물었다. 그의 날숨에서 연기가 계속 섞여나오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의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누군가 인생을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고 비유한 말이 떠올랐다. 찰나와 같은 인생 여정에서 영겁의 가슴앓이를 하는 보헤미안 최인호. 양복저고리를 한 손에 걸친 그에게서 여행의 절정을 거친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느긋함이 느껴졌다.
그는 최근 뒤늦게 그의 ‘가슴’에 배달된 편지 한통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참회록처럼 써내려갔다고 한다.
“어느 날 집안 정리를 하던 아내가 ‘당신한테 아주 반가운 선물 하나 줄까?’ 하더니 빛 바랜 편지 한통을 건네줬어요. 펼쳐보니 30년 전에 어머니가 저에게 보낸 편지였어요.”
‘집에 대문에도 칠을 하고 지하씨(지하실) 문도 다시 하여 달라고 하연느냐. 정화체(정화조)는 잘 나그는지 걱정이다. 하수도를 그럿케 엉텅리(엉터리)로 하니 내가 보지 안아드라면 참 크린라 변햇지(큰일날 뻔했지) …(중략)… 나는 매일 편지 보는 것이 일과이니 종종 편지 보내라. 그렴면 난성 첨은 내가 떨니는 손으로 써셔 말리나 되연는지 짐작하여 보아라. 우리 다해, 경재, 멀리 미국서 할머니가 뽀뽀한다.’
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그린 따뜻한 가족소설 펴낸 최인호

지난 5월15일 강남영풍문고에서 그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소중한 사람들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를’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등 뒤로 한 채 사람들에게 열심히 최인호 이름 석자를 적어주고 있었다.


쉰살도 못 되어 숨을 거둔 남편 때문에 마흔여덟에 혼자 되신 그의 어머니 고 손복녀 여사. 열여덟에 결혼해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중 셋을 잃고 나머지 여섯명의 자식들을 키워 다 대학에도 보내고 소위 출세라는 것도 시켰다.
정작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못 나와 노인대학에 다니며 가까스로 한글을 깨친 후 두장의 편지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서툰 글씨로 자식의 안부를 물었건만, 수백 수레의 책을 읽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날린 아들은 늘 바쁘다는 핑계로 답장 한통 쓰지 못했다.
뒤늦게 그는 ‘아아.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긴 탄식을 내뱉지만 이미 어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딘 줄 아세요? 이 세뼘도 안 되는 ‘머리’에서 ‘가슴’까지가 가장 먼 거리예요. 30년 전 어머니가 저에게 보낸 편지는 이제야 제 가슴에 도착했어요.”
그는 어머니의 낡은 편지를 액자에 넣어 집필실 한쪽 벽에 걸어놓았다. 그는 액자에 시선이 머물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한숨을 내쉰다고 한다.
‘어머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는 30년 전에 어머니가 쓴 편지를 두고 ‘고독의 열차사건’이라 이름지었다.
“이북 용천에서 열차사고가 나서 우리가 각종 구호품을 보내주고 있잖아요.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온갖 요란한 사건 때문에 집에서 부모님이나 아내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용천의 열차사고처럼 각자 운전하는 고독의 열차가 폭발하지 않도록 늘 가족들에게 관심을 갖고 미리미리 구호품을 보내야 합니다.”

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그린 따뜻한 가족소설 펴낸 최인호

손여사는 그를 마흔살에 낳았는데, 그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의 어머니를 ‘구식 할머니’ 취급하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학교라도 찾아오시는 날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 “그 할머니가 니 엄마냐, 아니면 니 할머니냐?”를 물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늘 “할머니!”였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그는 학교 선생님이 어머니를 찾으면 “울 엄마는요, 강릉 외갓집 가셨어요” “울 엄마는요, 넘어져서 허리를 삐어서 꼼짝도 못하세요” 하고 핑계를 댔다고 한다. 한번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학교를 방문한 어머니를 멀리서 발견하곤 숨어버리기까지 했다. 쥐색 두루마기에 쪽찐 머리를 한 어머니가 창피했기 때문이다. 비록 철모를 때 일이지만, 그는 이런 과거를 돌이켜보면 ‘부모님을 사랑하라’는 진리의 말을 우습게 취급해온 자신의 태도가 몹시 한스럽다고 한다.
“칠순 잔치를 고급 호텔에서 하는데 음식을 다 드시고 난 어머니가 주섬주섬 핸드백 속에서 비닐봉지를 꺼내놓으시는 거예요. 집에 있는 개라도 갖다 준다며 성급하게 남은 음식을 챙기시는데 제가 거기에다 대고 ‘거참 왜 그러세요. 왜 그렇게 주책을 부리시는 거예요?’ 하고 짜증을 부렸죠.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그런 주책이 우릴 키워오신 것도 모르고….”
책을 쓰고 교정을 보는 매 순간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에 짧은 꿈처럼 다녀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많이도 울었다는 그. 이젠 ‘쥐’조차도 그에게는 어머니의 위대함과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쥐잡기’를 숙제로 내주고 그 증거로 꼬리를 잘라오라고 해요. 학교에서 쥐꼬리 두개 가져오라고 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쥐꼬리 두개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열성적 학부형 노릇을 하셨어요. 제가 성인이 된 후에도 쥐 잡을 기회만 있으면 손수 골프채로 쥐를 잡으셨죠.”
그는 이런 어머니의 태도를 지켜보며 ‘일찍 혼자 되셔서 욕구불만을 쥐잡기로 해소하시나’하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인생이 참 신기해요. 열여덟 무렵의 어머니 사진 보면 저렇게 신성한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변했을까 이해가 안 가죠. 결혼해서 자식 낳아보니까 그 마음을 알겠더군요. 처녀들보고 바퀴벌레나 쥐 잡으라고 하면 잡겠어요? 어머니들은 다 자식 때문에 그런 험한 일을 기꺼이 하시는 거겠죠.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땐 눈으로만 봤는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마음으로 보게 돼요.”
쥐를 잡고, 새벽마다 자식들이 먹을 밥을 짓고, 또 호텔 음식점에서 비닐봉지를 서슴없이 꺼내드는 어머니의 행동에 그는 ‘거룩한 일상’이란 이름을 붙였다.

아버지에게 신문소설 읽어주다 소설가 된 최인호
그래서일까. 인터넷 다음카페 ‘최인호 글사모(www. cafe.daum.net/choiinho)’ 회원인 주부 이정희씨(31)는 “이번 책을 보니까 마치 결혼한 여자가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듯한 각별한 감정이 담겨 있어 좋았어요. 또 다른 ‘여성’ ‘인간’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하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살아생전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묵주’다.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가 하도 손에 들고 기도해서 닳아버린 묵주를 그는 십여 년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마치 어머니의 분신처럼 묵주를 대했던 그다.
“호주머니 속에 그 묵주가 들어 있는 것이 느껴지면 저는 어머니와 손을 잡고 함께 걸어다니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두거나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잤지요.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을 때도 그 묵주가 제 손에 들려 있었는데 그만 그 소중한 묵주를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엄마의 묵주를 잃어버렸을 때의 절망감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쉰살이 넘은 제가 어린애처럼 울고 또 울었어요. 어머니를 또 한번 여읜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그린 따뜻한 가족소설 펴낸 최인호

초등학교 6학년이 되도록 어머니를 따라 여탕을 출입했기 때문일까. 그는 딸처럼 꽤 곰살궂은 구석이 있다. 말로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스스로를 욕하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단골 안마사’ 노릇을 도맡아 한 그다.
“키가 난쟁이처럼 작은 어머니라 다리는 30센티 자만큼이나 짧았어요. 어머니는 발가락의 매듭을 딱딱 소리나도록 꺾어주는 것을 좋아하셨죠.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저를 보면 ‘얘 아범아, 와서 다리 좀 주물러다우’하실 정도였어요.”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기억도 다리 주무르기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다리를 백번 두드릴 때마다 지금 돈 천원에 해당하는 돈을 주기로 약속을 하셨죠. 그런데 저한테 거금 오만원이나 되는 빚을 지시고 돌아가셨어요. 나비를 만지면 손에 묻어나는 가루처럼 부모님의 감촉과 체온이 제 손 안에 분명히 남아 있는데도 두 분은 제 곁을 떠나고 안 계시네요.”
어쩌면 그는 아버지 때문에 지금 작가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저녁 신문이 오면 다른 형제들을 제쳐두고 꼭 그를 불러 연재소설을 읽게 했다. 그가 큰 소리로 연재소설을 읽으면 베개를 베고 비스듬히 누워 있던 그의 아버지는 “참 좋다”고 했고 그는 덩달아 신이 났다고 한다.
아홉살 소년 최인호는 매일같이 아버지에게 소설을 읽어드리느라 소설 내용을 훤히 외우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연재소설이 끝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가끔 ‘그 연재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궁금해한다. 그러면 그의 가슴은 살아생전 아버지가 거처한 한옥의 방문으로 비쳐들던 붉은 석양빛이 되고 만다.
이순(耳順). 논어의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에서 나온 이 말은 나이 육십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뜻에서 나왔고 세상 사람들은 나이 ‘예순살’을 이순이라고 칭한다. 그가 내년에 이순이 된다는 것은 그가 삶을 순리대로 이해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도 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전 예고도 없이 정전되어버린 것처럼 인생이 캄캄할 때가 있어요. 큰누나를 잃었을 때 그랬어요.”
큰누나는 그에게 어머니 이상이었다. 몇 년 전 그는 미국에 사는 큰누나를 잃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른 비행기 안에서 절망했고 비행기 화장실에 숨어 들어가 수돗물을 틀고 혼자서 숨죽여 울었다고 한다.
그가 고등학교 때 큰누나는 하숙집을 하느라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교무실로 그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이런 말로 그의 기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선생님, 인호는 비록 지저분하게 옷을 입고 다니고 등록금을 남보다 늦게 내는 가난한 아이지만 그렇다고 극빈자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내 동생 인호를 함부로 보지 말아주십시오.’
그는 부모님과 큰누나 그리고 막내누이마저 땅 속에 묻었지만 가슴속에는 ‘영원의 집’을 짓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머물게 했다.

부모와 큰누나, 막내누이마저 땅에 묻었지만 가슴에 ‘영원의 집’지어 머물게 해
그는 30년이나 늦었지만, 어머니에게 영원히 부칠 수 없는 답장도 썼다.
‘어머니는 제 답장을 참으로 많이 기다리셨죠? …(중략)… 어머니, 어머니의 치마에서 나던 그 냄새를 요즈음 가끔 떠올립니다. 학교 갔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매달려서 어머니의 치마에 얼굴을 묻고 맡던 그 복잡했던 어머니의 냄새. 그 냄새가 이 중늙은이의 코에 생생하게 기억되어 떠오릅니다. 어머니,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중에서
이제 어머니에 대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많이 퇴색되어버려서 보고 싶다는 애틋한 감정은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작가 최인호. 그는 매일 아침마다 청계산에 오르며 ‘우리의 생이 소꿉장난 나온 낯선 골목길은 아닌가?’ 반문해보기도 한다고.
“언젠가 어머니께서 ‘인호야, 그만 들어와 밥 먹어라’ 하고 부르시면 소꿉장난하던 이 낯선 골목길을 떠나게 되겠죠. 이 골목길에 남아 있는 우리들은 먼저 집으로 들어가버린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슬퍼하고 있지만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이 골목길이 오히려 바람 불고, 쓸쓸하고, 무서운 낯선 곳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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