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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여자복싱 세계챔피언 이인영의 용기 있는 고백

“권투 덕분에 알코올 중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 기획·구미화 기자 ■ 글·박진숙 ■ 사진·김성남 홍중식 기자

입력 2003.11.10 15:11:00

최근 자서전 ‘나는 복서다’를 통해 중증 알코올중독이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 복서 이인영.
지난 9월말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여자복싱 세계챔피언 타이틀전에서 그는 남성 못지않은 파워가 실린 펀치를 날리며 마침내 세계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정상에 선 그를 만났다.
한국 첫 여자복싱 세계챔피언 이인영의 용기 있는 고백

여자 나이 서른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여성 복싱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이인영 선수. 그는 지난 9월27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칼라 윌콕스(34·미국)를 9회 1분40초 만에 KO로 누르고 세계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권투에 입문한 지 2년1개월 만의 쾌거다.
사실 그는 최근의 경기 불황 여파로 마땅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지난 6월과 7월 두 차례의 세계타이틀 도전 기회를 놓쳤다. ‘이번엔 시합을 할 수 있겠지’ 하고 마음을 단단히 여미면 경기가 무산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어렵사리 마음을 추스르고 연습에 몰두하면 또 무산 소식이 들려오는 바람에 무척 지루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고.
그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탓일까. 그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매서운 눈으로 상대선수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초반엔 가벼운 탐색전을 벌이는 게 일반적인데 그는 모든 것을 생략한 채 경기를 난타전으로 몰고 갔다.
“칼라 윌콕스 선수는 근육이 단단하고 맷집이 좋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겁을 먹었죠. 식은땀이 줄줄 났어요. 체중을 너무 많이 감량한 것도 불리한 점 중 하나였고요. 초반 난타전에서 정통으로 몇대 맞기도 했는데 의외로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아프긴 한데 별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거든요(웃음). 그 다음부터는 상대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였지요.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맷집이 좋은 선수인데도 휘청거리더니 그만 그로기 상태가 되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상대선수가 시합을 마치자마자 ‘이 땅을 빨리 떠나고 싶다’고 했대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니까 마음이 짠해요.”
링 위에서는 무너뜨려야 하는 적이지만 시합이 끝나면 언제나 자신의 돌주먹에 쓰러진 상대선수를 먼저 걱정하는 그다. 경기가 끝난 후 땀 흘린 만큼 정직한 주먹을 주고받은 그들은 서로 격려하는 감격의 포옹을 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열전이 벌어졌던 사각의 링 위에서 마침내 그의 양손이 번쩍 들어올려지던 순간,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그의 어머니는 링으로 뛰어들어 딸을 안았다. 지난해 한국 챔피언전을 치를 때만 해도 어머니는 시합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어머니도 단련이 되시나 봐요. 그날은 한복을 곱게 새로 맞춰 입고 응원을 오셨더라고요. 한복값을 챙겨드리지 못한 게 죄송해요. 챔피언전 대전료가 생각만큼 많지 않거든요. 앞으로 방어전을 하게 되면 지금보다 돈을 많이 벌 테니까 그때 꼭 효도하려고요. 제가 어머니 속을 어지간히 썩인 게 아니거든요.”

한국 첫 여자복싱 세계챔피언 이인영의 용기 있는 고백

이인영 선수는 남자 선수 못지 않은 파워를 가진 펀치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그가 이처럼 어머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자서전 ‘나는 복서다’에서 그는 10년간 알코올중독자로 지냈다는 사실을 밝혔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약주를 즐기는 아버지를 대신해 술 심부름을 다녔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막걸리가 가득 담긴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홀짝홀짝 몰래 마셔보니 맛이 기막히더라는 것. 그때부터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해 고등학생 시절엔 물병에 소주를 담아 가지고 다니며 몰래 마시고 수업시간엔 술에 취해 잠들어 있기 일쑤였다.
성인이 된 뒤에는 음주행각이 더욱 거침없어졌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 써대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술은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수준이었다. 그가 술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 건 아버지와 오빠의 청천벽력 같은 죽음 때문이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어머니에게 손찌검까지 했지만 막내딸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던 분이다.
“아버지가 폐암으로 앓아누우셨는데도 철이 없던 저는 서울 구경한다고 친구들과 집을 나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 꿈에 흰옷을 입은 아버지가 검정옷을 입은 저승사자에게 둘러싸여 계시더라고요. 아침이 되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글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3년 후엔 집안의 대들보였던 큰오빠마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어이없이 세상을 떴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고, 학원을 운영하던 작은오빠도 부도를 냈다. 크나큰 상실감에 빠진 그는 술을 입에 부어넣고 아무데나 쓰러져 잤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 로비나 터미널 대합실, 공원 나무 밑 등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겐 더 이상 술 마시는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그저 술 자체가 목적이 돼버렸다. 위로삼아 곁에 뒀던 술이 점차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지켜보던 가족들은 그가 술을 끊을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술을 살 돈을 몽땅 뺏어버리기도 하고, 꼼짝 못하게 방안에 가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술병을 떼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중증 알코올중독’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뿐이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가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은 그에게 일을 시키자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술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형부의 권유로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남자도 하기 힘들다는 트럭 운전.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50㎏짜리 콩자루를 하루에도 몇백개씩 옮겨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여자는 안된다”는 회사측의 만류에 그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고 하루 이틀 일을 하다 보니 재미도 있었다고 한다. 그를 지켜보던 동료들도 나중에는 “남자보다 낫다”는 칭찬을 하며 그를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됐다. 하지만 술을 끊지는 못했다. 오히려 고된 몸을 달래기 위해 술을 더욱 찾게 됐다. 작업장에서는 일이 끝나면 으레 술자리가 벌어졌고, 그 술자리를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그러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는 위험천만한 일도 생겼다. 그렇게 젊음이 술과 함께 저물고 있었다.
“2001년 8월을 잊을 수가 없어요. 거래처에서 낮술을 하고 속이 좋지 않아 일찍 집에 들어왔는데 텔레비전에서 여자권투 세계타이틀 매치를 중계방송하더라고요. 킴 메서와 상대선수의 대결을 보면서 ‘이거다’ 싶었죠. 다음날 권투가 너무 하고 싶은 마음에 셋째언니와 집 근처에 있는 체육관을 찾았어요. 그렇게 시작한 권투가 제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죠.”

한국 첫 여자복싱 세계챔피언 이인영의 용기 있는 고백

땀을 줄줄 흘리며 운동을 하다 보니 술생각이 절로 사라졌다. 금단현상도 없이 자연스럽게 술을 끊을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체육관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그를 지켜보았던 김주병 관장(53)은 그가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김관장은 “흐트러진 모습을 단 한번도 보인 적이 없어서 몰랐다”며 이선수의 자서전을 읽고 비로소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침이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술자리를 과감히 뿌리치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그를 직장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10개월 동안 일이 끝나는 대로 체육관으로 향하던 그는 밤에만 짬을 내 운동을 하는 게 성에 차지 않아 마침내 서른 나이에 프로에 입문했다.
“출판사의 권유로 자서전을 쓰면서 부끄러운 과거를 말하기가 힘들었어요. 하지만 저와 비슷한 생활을 했던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솔직하게 썼어요. 다 말하고 나니까 지금은 후련해요. 예전에 기자들이 ‘술도 가끔 한잔씩 하느냐’고 물으면 ‘전혀 못합니다’ 하고 대답하면서도 무척 찔렸거든요(웃음).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지금은 깨끗한 생활을 하니까 당당해요.”
그의 책을 읽고 연락을 해오는 알코올중독자도 있다. 그의 솔직한 모습에 팬클럽 회원들이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한편 알코올중독이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너무 부각되면서 권투선수의 이미지를 깎아내린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러나 저녁마다 돋보기를 쓴 채 막내딸의 자서전을 읽어 내려가는 어머니를 보면 잘한 일인 것도 같다고.
7전7승(3KO)의 전승가도를 질주하고 있는 그는 올해 안에 한두 차례 방어전을 치를 계획이다. 세계챔피언이 됐지만 그에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물이 새는 지하방에서 살고 있고,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10km씩 로드워크를 하는 일상도 똑같다.
“권투를 좀더 일찍 시작했다면 좋았겠지만 후회는 없어요. 어릴 때 시작했으면 쉽게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힘든 일과 실패를 겪어봐야 성숙해지는 것 같거든요. 저라고 언제까지 이기기만 하겠어요. 타이슨도 지는데. 지면 깨끗이 승복하고 질질 짜는 모습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런 걸로 ‘죽네 사네’ 하면 안되죠. 정정당당하게 시합을 즐기면 되는 거니까요.”
복잡한 것은 도무지 성격에 맞지 않는다며 그는 털털한 웃음을 지었다. 결혼에 관해 묻자 “마흔살이 될 때까지 권투를 하고 싶다”며 아직은 결혼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한다. 영락없는 시골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어디에서 그런 투지와 승부근성이 나오는지 신기했다. 어두웠던 과거를 딛고 일어선 그에게 앞으로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여성동아 2003년 11월 4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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