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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역경을 딛고

뇌종양 이기고 장애인농구 지도자로 사는 전 농구 국가대표 이원우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신체장애, 언어장애도 다시 농구공을 잡으며 이겨냈습니다”

■ 글·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사진·정경택 기자

2002. 12. 18

이충희, 김현준, 박수교 등과 함께 80년대 한국농구를 주름잡던 농구스타 이원우. 그가 두 차례에 걸친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생긴 신체장애와 언어장애를 극복하고 지난 11월1일 폐막된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에 휠체어농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참가,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어 감동을 주었다. 역경을 이기고 제2의 인생을 사는 이씨의 감동사연.

뇌종양 이기고 장애인농구 지도자로 사는 전 농구 국가대표 이원우

지난 11월1일 부산 금정체육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 휠체어농구 결승전. 예선전에서 75대 72로 이긴 바 있는 호주팀과 다시 맞붙은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은 금빛 희망을 꿈꾸었지만 결국 51대 69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치며 선수들을 독려하던 이원우 감독(46)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수들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병마를 이기고 제 2의 농구인생을 시작한 후 첫 성과를 올렸다는 기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80년대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이충희, 김현준, 박수교 등과 함께 한국농구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가드 이원우. 당시 농구대잔치에서 소속팀 현대를 3차례나 우승으로 이끄는 등 386세대의 기억 속에 농구스타로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가 은퇴한 지 8년 만에 휠체어농구팀 감독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뇌종양이라는 무서운 암을 두 차례나 극복하고,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신체장애와 언어장애를 딛고서.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비전 휠체어농구팀 연습장을 찾았을 때 이씨는 한창 선수들을 야단치고 있었다. 그동안 4개월 가까이 국가대표 코치와 감독 일을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선수들이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게 한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선수들을 질책하고 다시 훈련을 시키는 그의 말투는 어눌했고, 몸짓 또한 약간 부자연스러워 보였지만 농구공을 향한 눈빛과 선수들을 독려하는 우렁찬 목소리는 예전 선수시절 그대로였다.
“아직 몸이 온전하지는 않아요. 말도 어눌하고요. 수술 후유증 때문이죠. 의사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지만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남편은 죽었을지도 몰라요. 농구가 남편에게 삶의 의욕을 다시 불러일으킨 거죠. 보세요, 얼마나 얼굴에 화색이 도는지.”
이씨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 박혜숙씨(46)의 이야기다. 훈련이 끝난 후 이씨를 만나 그동안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아내의 이름도 모를 정도로 기억력 상실했지만 농구용어는 완벽히 기억
그에게 처음 시련이 찾아온 것은 94년 9월24일. 그의 생일날이었다. 그해 봄 농구코트를 떠나 현대그룹 홍보실에서 일하던 그는 퇴근길에 들른 대중목욕탕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갔다.
언제나 건강했고 평소 몸에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하던 그였기에 처음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는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검사결과는 뇌 한가운데 탁구공만한 혹(종양)이 있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의사가 “종양이 이렇게 커질 때까지 어떻게 아무런 증상을 느끼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씨는 여덟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났다.
“수술후 6개월간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몸을 추스린 후 다시 직장생활도 했어요. 97년부터는 대전고에서 절 코치로 불러 다시 농구공을 잡기도 했어요. 수술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에 조금 마비가 오긴 했지만 농구코트에 다시 선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어요.”
하지만 시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지날 무렵 다시 농구공을 놓아야 했다. 처음 종양이 자란 곳이 신경조직이 몰려있는 곳이라 자칫 잘못해서 신경조직을 건드리면 몸에 마비가 올 수도 있어 과감하게 도려내지 못하고 종양만 잘라냈는데 암세포가 남아 다시 자란 것이었다. 2000년 봄, 다시 2차 수술을 해야만 했다.
“첫번째 수술은 멋모르고 얼떨결에 한 것이라 두려울 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두번째 수술실에 들어갈 때는 정말 내가 암이구나, 과연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 싶어 무섭더라고요.”
1차 수술 때와 달리 이번엔 머리에 네 군데나 구멍을 뚫고 쇳덩어리까지 박았다. 수술전 의사는 “이번엔 종양 주위를 과감하게 잘라낼 것이다. 그래서 몸에 마비가 올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각오했던 것보다 수술후 몸의 마비증상이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전혀 생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아내의 얼굴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집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집사람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또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호칭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거예요. 머릿속에선 뭔가 말이 뱅뱅 돌면서 입으로는 안 나오는데 어찌나 답답하던지.”
수술 후유증으로 기억력이 현저하게 사라졌다. 주소는 물론 글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과를 보여주어도 ‘사과’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등 사물과 이름을 전혀 연결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딸 혜민이(19)와 아들 현수(14)의 이름도 헷갈렸다. 혜민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름은 현수를 부르는 식이었다. 언어영역에 문제가 생기니까 이해력이 떨어져 조금만 복잡한 이야기를 하면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답답해서 미치려고 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당황스러웠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대부분의 사물 이름을 잊어버렸는데도 농구를 비롯한 스포츠용어는 다 기억을 하고 있는 거예요.”

뇌종양 이기고 장애인농구 지도자로 사는 전 농구 국가대표 이원우

선수시절의 사진(왼쪽부터 이충희, 박수교, 이원우). 이씨의 가족사진 (오른쪽).

자칫 절망감에 좌절할 수도 있었던 이원우씨를 다시 코트로 이끌어준 사람은 아내 박씨다. 암이 재발했다는 말을 듣고 좌절해 있던 이씨에게 박씨는 다시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싶었다. 그러던중 우연한 기회에 휠체어농구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씨는 이씨를 데리고 휠체어농구대회가 열리는 농구장을 찾았고 그곳에서 이씨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농구를 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장애를 이기고 슛을 던지는 그분들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아, 이들도 농구를 하는데 내가 이대로 좌절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힘 닿는 대로 이들을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는 관계자를 찾아가 자신이 휠체어농구팀을 지도할 수 있는지 물었고, 그렇게 해서 연대세브란스병원에서 자활치료를 받는 척수환자들로 구성된 서울비전팀을 소개받았다. 그후 2차 수술을 받기 위해 잠시 쉬기도 했지만 수술이 끝나자마자 돌아와 언어치료를 받으면서 선수지도를 계속했다.
물론 힘든 점도 많았다. 우선 그의 말이 어눌하고 어려운 말은 못 알아들어 선수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언어장애는 농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극복했다. 박씨는 남편이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언어치료 효과가 훨씬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가르치려면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휠체어농구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이씨였기에 가르치는 것도 어려웠다. 선수들은 어려운 농구 전문용어를 못 알아들어 우왕좌왕했고, 이씨 역시 일반 농구와 휠체어농구의 기술이 달라 가르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선수들과 함께 기술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부족한 점을 채워나갔다.
“척수를 다친 환자들은 하체를 전혀 못쓰는 것은 물론 상체를 움직이거나 팔을 드는 것도 무척 힘들어요. 그런데 훈련을 통해 거의 팔을 못 올리던 선수가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슛을 쏘고, 휠체어를 굴리지도 못하던 선수가 휠체어를 자기 발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마음이 뿌듯하죠.”
그의 열정 때문일까, 처음엔 득점이 20점대에 머물던 팀이 이젠 평균 득점 40점대를 기록하는 중위권팀으로 도약했다. 선수도 5명뿐이어서 한명이라도 부상을 당하면 선수구성이 안돼 경기를 포기해야 했는데 지금은 7명으로 늘었다.
“지난 4월에 열렸던 휠체어농구대회에서 상위권인 제주팀과 연장전까지 갔어요. 휠체어농구대회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연장전에서 한 선수가 5반칙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4명이 싸워 결국 졌어요. 하지만 선수들은 다음엔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에 항상 감사
그는 앞으로 선수들을 더 열심히 가르쳐서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선수들도 우리 팀에서도 국가대표가 나와야 한다는 의욕이 강해 그 꿈을 이루고 싶은 게 감독으로서의 소망이라고 한다.
이씨의 제2의 농구인생 뒤에는 아내 박씨의 헌신적인 내조가 뒷받침되었다. 휠체어농구로 이씨를 이끈 것도 박씨이지만 지금도 가장 적극적인 후원자이기 때문이다. 동갑내기인 이씨 부부는 원래 양가 부모님이 동네 친구였다고 한다. 어느날 술을 마시다 ‘우리 사돈 맺읍시다’ 하고 의기투합한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지 한달 만에 약혼을 하고 다시 한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이씨는 투병생활로 수입이 전혀 없는 상태. 박씨 역시 이씨 뒷바라지와 아이들 뒷바라지, 살림을 하느라 직업을 가질 여력이 없다. 수입이 없는데 어떻게 생활하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그동안 모았던 것을 까먹으면서 산다”며 웃었다. 박씨의 근검절약정신은 농구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 지금이야 농구선수들도 억대 연봉을 받지만 이씨가 선수로 뛸 무렵엔 평범한 월급쟁이 수준이었다. 박씨는 80년대 당시 한달에 9만원만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전액 저축을 하는 등 알뜰히 모았다. 아이를 키울 때도 옷과 신발을 얻어다 입히고 구멍이 나면 기워서 다시 신기고 입혔다. 남편 모르게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부업을 해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도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밴 것 같아요. 지금도 낭비를 안하고 기본적인 생활만 하니까 남편 병원비 외에는 크게 들어가는 돈이 없어요. 제 계획은 아이들에게 한푼도 물려주지 말고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쓰자는 거예요. 그동안은 남편이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게 하고 싶어요. 그 다음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죠.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잖아요. 경제적인 것에 너무 연연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남편이 돈 때문에 언어치료를 중단하고, 또 2차례에 걸친 수술과 항암치료로 인해 극도로 약해진 체력을 단련하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못하고 있는 게 마음이 아픈 눈치였다.
“남편뿐 아니라 우리 선수들이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척수장애인들은 상체만 쓰기 때문에 더더욱 상체의 근력을 키워줄 운동이 중요하거든요.”
이들은 1남1녀를 두었는데, 아이들도 아빠를 닮아 둘 다 농구를 잘한다. 고 3인 큰딸 혜민이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IMF로 여자실업팀이 잇따라 해체되는 등 미래가 불투명하자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게 했다. 중학교 1학년인 작은 아들인 현수는 현재 농구선수로 뛰고 있다.
“아직 몸집이 작고 악바리 근성이 부족해 걱정이에요.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니까 하고 싶어 하는 한 밀어줘야죠. 사실 그 아이에게 가장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일곱살 때 아빠가 쓰러지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 한글도 깨우쳐주지 못하고 학교에 보냈어요. 그래서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제가 남편을 쫓아다니느라고 아이에게 소홀히 했는데, 그래도 혼자 잘 커서 미안하면서도 대견하죠.”
이씨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진단을 받고 약을 먹으며 투병중이다. 하지만 이씨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농구공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코트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집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제 아내는 제가 코트에 서있는 모습을 누구보다도 좋아하거든요.”
인터뷰를 마칠쯤 그는 두가지 바람을 피력했다. 하나는 장애인들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세상에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운동을 하면 장애의 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의욕이 솟을 것이라고 했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서울비전팀 주장 안정백씨도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농구를 배우고 싶은 척수장애인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저에게 전화(011-277-6033)를 주세요”하고 부탁했다. 연습은 매주 수·금요일 오후 2시부터 광진구에 있는 정립회관 체육관에서 한다.
이씨는 또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휠체어농구팀을 지도해보니까 ‘더불어 사는 사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겠더라고요. 특히 우리 팀은 교통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들이에요. 우리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걸 몰라요. 또하나 아쉬운 것은 일반 선수들은 국가대표로 선발되면 회사에서 적극 지원을 해주고 관심도 높아요. 그런데 장애인선수들은 국가대표에 선발되면 지원은커녕 회사에서 ‘일에 지장을 주니까 사표 쓰고 출전을 하라’고 할 정도예요. 그런 차별과 무관심만큼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몸이 아픈 후 과거 함께 운동을 했던 절친했던 동료들조차 만나는 것을 꺼린다는 이원우씨. 이미 그의 몸과 마음은 휠체어농구에, 아니 장애인에 대한 사랑에 흠뻑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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