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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노 작가의 새로운 발걸음

76세의 나이에 청계천 복원 운동 나선 <토지> 작가 박경리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2. 12. 17

일찍이 ‘생명’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소설가 박경리씨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복원 운동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문명 비판적인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지 벌써 2년, 이제 너무 늙은 탓인지 문장 하나 손보는 데만도 하루가 걸려 ‘글쓰기’의 진전을 못 본다며 탄식하는 노작가가 만년에 꾸는 또 하나의 꿈.

76세의 나이에 청계천 복원 운동 나선  작가 박경리

2001년 여름, 토지문화관을 찾은 김명자 환경부장관과 다정한 포즈를 취한 박경리씨.

박경리씨(76)가 아무 연고도 없는 강원도로 들어간 건 1980년이었다. 그는 원주시 단구동에 집을 마련하고, 대문을 걸어 잠근 채 <토지> 집필에만 매달려왔다. 94년 <토지>를 마무리지을 때까지 그는 풀을 뽑을 때도 홀로 뽑고, 들을 거닐 때도 홀로 걸었다. 혼자만의 사색,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바람, 돌, 그리고 숲속의 새들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천연적인 생태주의자로 살았다. 그 삶의 소산이 바로 <토지>다.
그러나 <토지>의 산실로서 그의 숨결, 손길이 밴 그 집은 택지 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헐리고 말았다. 토지공사가 기증한 40억원으로 건물을 짓고, 그가 토지 보상금으로 받은 7억5천만원을 운영기금으로 삼아 99년 6월 문을 연 ‘토지문화관’은 이제 ‘지식인들이 모여 앉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그옆에 사택을 짓고 울타리를 쌓았다. 간혹 문학강의를 위해, 행사를 위해 사립문을 열고 나오지만 그는 자연 속에 은둔해온 삶의 틀을 깨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최근 여러 지면을 통해, 방송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청계천 복원 문제 때문이다.
“작가 인터뷰라는 건 부질없는 짓이에요. 글을 쓰는 작가가 말로 무얼 더 말해? 작가는 얼굴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러니 인터뷰를 안하는 게 당연하지. 다만 환경에 대한 문제라면 내가 나서서 이야기하려고 해. 이제 나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인데,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지금 세상이 잘못 돌아가. 후손에게 물려줄 것까지 당겨다 쓰기 바빠요. 이러면 안되거든.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지금은 몸이 안 좋아 돌아다니기도 힘들지만 건강이 괜찮아지면 환경 문제도 이야기하고 문학 강의도 할 거예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기 전에 내가 가진 거 다 전하고 가야지.”
청계천 복원 논의가 한창이지만, 청계천 복원 아이디어가 어떻게 시작됐고 구체화됐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건 91년쯤 이희덕 연세대 교수(한국사)였다. 그에게서 이 아이디어를 들은 노수홍 연세대 교수(환경공학부)는 97년 가을, 박경리씨와의 대화를 통해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 1회 청계천 살리기 심포지엄’이 열린 것도 지난 2000년 9월 토지문화관에서였다. 박씨는 청계천 복원 운동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셈.
“뜻있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나보고 도와 달라고 하니까 나선 거예요. 이런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하거든. 처음엔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명박 시장이 어떻게 우리 모임에 와서 이야기를 듣고 공약으로 추진하게 된 거예요. 사실 우리도 이렇게 빨리 실행에 옮길 줄은 몰랐어요.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청계천 복원은 반드시 해야 해요. 해야 하는데 졸속이 돼서는 안되는 거지.
청계천은 북악과 인왕, 남산에서 흘러온 물들이 모여서 서울의 한복판을 흐르는 겁니다. 서울이 우리의 얼굴이라면 청계천은 그 중심인데, 가장 중요한 그 자리가 쓰레기통이 되었어요. 서울에는 문화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어요. 청계천이 복원되면 남산과 북한산의 생태계가 이어지고 인사동과 그 주변의 옛 궁궐터, 남산의 한옥마을이 서로 연결돼요. 지금 서울에서 제일 활력 넘치는 데가 동대문 일대인데, 그옆으로 물이 흐르고, 천변에 나무숲이 울창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좋을지….”

76세의 나이에 청계천 복원 운동 나선  작가 박경리

강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99년 6월 문을 연 토지문화관 전경.

어떠한 희생이 있어도 청계천 복원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많은 이해 집단들이 충돌할 것이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할 터다. 그러나 ‘살려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변함이 없다. 언제나 이기심이 문제였다. 서로가 이익을 취하기 급급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파헤쳤고 콘크리트 담을 쌓았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모든 무생, 유생,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청계천 되살리기’는 그런 새로운 패러다임의 표상이 될 기념비적 과제다. 때문에 그는 기력이 달리는 노구를 이끌고 전면에 나선 것이다.
사실 환경에 대한 그의 관심, 애정은 연원이 깊다. 모두가 개발과 건설에 정신없던 시절에도 그는 홀로 외로이 외쳤다. “물을 수입해 먹더라도 지하수를 건드려선 안된다”고 말했던 게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최근 나남 출판사에 의해 재발행된 <토지> 2002년판 서문에서 박경리씨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정리해놓았다.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고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토지>를 완간하고 8년간 펜을 놓았던 그는 2년전 다시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작가는 펜을 놓을 수 없는 것일까?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데도 욕심이 끝이 없어 원고 한장 놓고 한 글자 고치면 하루가 가는 생활이 이어져 언제 탈고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나이가 드니 글을 쓰는 손이 한없이 더디다고 그는 푸념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사람도 잘 안 만났어요. 저번엔 토지문화관에서 박완서씨 강의가 있어서(토지문화관에서는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의 문학 이야기’라는 공개 강의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7월 27일 그의 강연으로 시작된 이 강연은 9월 28일엔 박완서씨, 10월 26일엔 김춘수씨의 강연이 있었다) 잠깐 인사를 하러 나갔었지. 박완서씨가 왔는데 내가 안 나가볼 수 없잖아. 그외엔 잘 나가지도 않고 있었어요. 사람을 만나면 여러가지로 번잡스러워서 힘들어요.”
더욱이 요즘 그의 신경을 긁는 것이 하나 또 있다. 바로 토지문화관의 운영 문제이다. 토지문화관은 지난 99년 6월 개관 이후, 국내 지식인들의 집결소로 그 위상을 잡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각종 행사, 세미나, 심포지엄이 줄지어 토지문화관에서 열리고 있다. 기금 운용으로 운영비를 충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각종 행사가 그 한계를 넘어선 지경. 더욱이 창작실 제공에 따른 제반 경비도 만만치 않다. 현재 그의 딸인 김영주씨가 관장을 맡고 있어 규모 있게 살림이 꾸려지고 있지만 자칫 토지문화재단 임원들의 사비가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그는 걱정했다.
“젊을 때는 누군가 사람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고 그게 나에게 상처가 됐어요. 이제는 이 늙은이에게야 뭐라고 하든 어떻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대신 세상이 바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면 화가 치밀어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풀 하나 뽑고 종 하나 살리고, 새가 지나가다 먹을 수 있는 열매나무 심는 일뿐이에요. 하지만 책임 가지고 살아야 할 사람들 만나면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어. 똑바로 정신차리고 하라고. 정말 정신차리고 해야 해.”
짧은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문앞으로 배웅을 나오며 거듭 “똑바로 정신차리지 않으면 후대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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