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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동네이야기

문예지에 생생한‘문단 이면사’ 연재하는 소설가 김국태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김지현 ■ 사진·지재만 기자

2002. 11. 21

“그 시절 겪은 일들을 다 쓰면, 문인들 사이에 난리날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인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사는 우리 독자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다. 그 속엔 그의 문학과 일생을 이해할 열쇠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20년 넘게 문학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그 자신 소설가이기도 한 김국태씨가 동료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문예지 <현대문학>에 문단 이면사를 연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가 전해주는 흥미진진한 문인들의 감춰진 모습들.

문예지에 생생한‘문단 이면사’  연재하는 소설가 김국태
소설가이자 민주당 김근태 고문의 형이기도 한 김국태씨(64). 그가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에 ‘현대문학 편집실 창에 비친 시인·소설가’라는 제목으로 문단 이면사를 연재하고 있다. 그가 <현대문학>에서 일할 당시 경험했던 문인들의 모습을 구어체로 풀어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세상에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문인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재현된다. 현재 그는 <현대문학> 9월호에 ‘열등감을 껴안고 살았던 작가 오영수’ 편을, 10월호에 ‘고치 짓는 누에가 실을 잣듯 詩를 뽑아낸 서정주’ 편을 실은 상태다. 지금은 소설가 선우휘 편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이미 발표한 오영수, 서정주 편을 읽고 있으면, 마치 편안한 찻집에서 그와 마주 앉아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만큼 그가 이야기하는, 사석에서 바라본 문인들의 모습은 흥미롭고, 독자들에게 알려진 모습과 달라 놀라움을 준다.
김씨는 현대문학상,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받은 우리 문단의 중진이다. 65년부터 81년까지 <현대문학>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고, 문학잡지 일을 그만둔 뒤에는 외국어대, 추계예대에서 문학을 강의했다. 현재는 소설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다.
김씨와 인터뷰하기로 한 날 오전, 약속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고 한참 뒤에야 들리는 목소리. 그는 오전까지 술을 마셨다고, 약속 시간을 미루자고 했다. 술을? 만나자마자 술 얘기를 꺼낸 건 그의 원인 제공탓(?)이 크다.
“아직도 이 늙은이가 3차 정도는 하지. 옛날에는 5차까지 갔어.”
멋은 흥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흥을 바탕으로 정신적 육체적 활동이 미적으로 나타난다. 문학에서 술은 흥을 돋우는, 일종의 묘약이 되곤 한다. 박목월이 그의 시 <목마와 숙녀>에서 노래하듯,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얘기’하지 않는가. 이런 의미에서 김씨는 여전히 ‘문학’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술 마시다가도 통행금지 5분 전만 되면 ‘땡’하고 사라지던 소설가 황순원
“어떤 술을 제일 좋아하냐”고 묻자, “술은 단연 소주가 좋지” 하고 호방한 답이 돌아온다. 술 얘기 끝에, 그는 소설가 황순원을 추억하기 시작했다. 왕년에 그에게 술을 가장 많이 사준 이가 황순원 선생이라고 한다. 그는 황순원과 회현동 참새구이집에서 당시 통행금지 시간인 자정까지 정종을 마시곤 했고, 술자리가 파하면 언제나 총알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해야 했다.
“그 분이 회현동에 사셨는데 함께 한참 술을 마시다가 통행금지 5분 전만 되면 잘 가게, 하고는 당신 집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거야. 그러고 나면 난 환장하지. 허둥대며 집에 가느라 말이야.”
회현동 부근 택시 운전사들 중 김씨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황순원은 그를 자주 난감한 지경에 빠뜨렸다. 그때를 회상하는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번진다. 그는 소설가 황순원 편에 그 시절 술자리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소개할 참이라고 했다. 내친 김에 문인들의 술버릇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상하게 시인들이 술주정이 심해. 시인들 몇이 끼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 평소에 하고 싶은 얘기들을 다하지 못해 그런지….”
소설가들은 산문으로 할 말을 다 토해내서 그런지 술자리 끝에 뒤탈이 없는데, 시인들은 운문으로 모든 걸 축약해서 말하기 때문에 속에 쌓인 게 많아서인지 유독 술주정이 심하다는 것. 김씨는 현대문학 편집장 시절, 술 취한 시인들을 겨우 달래 택시 태워 보낸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했다. 문인들 중 누가 제일 술주정이 심하냐고 물으니, “그건 말할 수 없다”면서 푼푼히 웃어 보일 뿐이다. 대신 <현대문학> 10월호 서정주 편에는 서정주의 술주정에 대한 일화가 짤막하게 소개되어 있다. 시인 서정주가 술에 취해 경회루에 있었던 펜클럽 연회와 명동 한복판에서 단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문단에서는 이미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 김씨는 “그 시절 겪은 일들을 전부 쓰면 문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외에도 웃지 못할 사건들이 많았다. <현대문학>에서 ‘미당(未堂)’이 잘못 인쇄되어 ‘말당(末堂)’으로 둔갑한 사건. 그야말로 ‘一’자 하나가 말썽을 일으킨 셈이다.
“서정주 일화 하면, 이 말당 사건도 유명하지. 덕분에 서정주 선생에게 단단히 사과를 해야 했어. 이 사건은 당시 여러 지면에서도 오르내렸고 말이야. 옛날에는 이런 인쇄사고가 비일비재했어. 분명 실수 없이 인쇄했다고 자신했는데, 지면에 나오면 활자가 둔갑해 있는 거야. <현대문학(現代文學)>의 대(代)자가 큰 대(大)자로 인쇄되어 나간 적도 있었다니까.”
<현대문학> 9월호의 오영수 편 서두에 보면, ‘김수영 시인 누이동생이며 장차 한국 모든 남류 문단인들에게 열렬한 애인으로 부상하던 김수명’씨에 대한 얘기가 짧게 소개되어 있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대체 그녀가 누굴까.

문예지에 생생한‘문단 이면사’  연재하는 소설가 김국태
“키 170cm에 아주 미인이었어. 그녀가 종로 거리를 걸어가면 행인들이 한번씩은 다 쳐다봤지. 나도 그녀에게 반했으니까.”
김수명씨를 떠올리는 김씨의 눈빛이 돌연 흐려진다. 그와 김수명씨는 <현대문학>에서 함께 일했고, 한때 결혼까지 할 뻔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사윗감 집의 형편은 어떤지,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하고, 이른바 정탐을 목적으로 그의 집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 또한 문단에서 ‘짠돌이’로 유명했던 시인 김수영이 그에게 아리랑 담배와 설렁탕, 소주를 사며 그와 자신의 여동생이 맺어지기를, 뒤에서 은근히 바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와 왜 결혼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 질문에는 묵묵부답이다. 당시 문단에서 ‘최고의 여인’으로 손꼽히던 그녀가 현재까지 미혼으로 지내고 있는 것은 그 시절, 지독한 사랑의 좌절 속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탓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그녀의 연애담은 이미 문단에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더는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며 김씨는 말을 아꼈다. 김수명씨 얘기 외에도, 문단에는 알게 모르게 연애담이 많다고 했다.
연애담을 써도 최소한 예의는 잃지 않게 쓸 생각
“남녀가 부딪히는데 왜 연애사건이 없겠어. 박경리가 누구랑 연애했는지도 다 아는데….”
김씨는, 앞으로 연재하는 글에 자신이 알고 있는 연애담에 대해서도 쓸 작정이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잃으면서까지 쓰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일반인이 연애하는 거나 문인이 연애하는 거나 다를 게 없어. 다만 감성이 많이 개입된다는 게 좀 다를까. 이런 게 일반인들 눈에는 이상하게 비칠지 모르지만, 결국은 일반인이나 다를 게 없어.”
김씨는 소설가 고 이범선이 가장 성정이 고결했다고 추억했다. 일부 짓궂은 문인들이 여자와 잤던 얘기를 실명을 거론하며 떠벌여도, 그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고 상대한 여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굉장한 멋쟁이셨지. 문단에서 멋쟁이로 통하는 이를 꼽으라면 평론가 이헌구 선생과 이범선 선생을 꼽을 수 있었어. 특히 이헌구 선생은 날씬하고 깔끔한 신사로 통했는데 베레모가 아주 잘 어울리는 양반이었지.”
김씨도 모자를 즐겨 쓰는 편이다. 그는 언젠가 이헌구씨의 베레모와 같은 모자를 쓴 적이 있었는데 주변에서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그래서 어느 날은 중절모로 바꿔 썼더니, 소설가 남정현씨가 “공항에서 막 내린 이 같다”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씨는 오늘날까지 모자는 중절모를 고집한다.
김씨는 앞으로 <현대문학>에 연재할 글에 문인들의 사사로운 일상사 외에,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소설가 박태원도 소개할 예정이다.
“요즘 글을 보면 국적불명의 문장이 너무 많아.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많다는 얘기지. 글에서 감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 갖고 글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 요즘 젊은 작가들, 기초가 너무 안돼 있어.”
김씨는 젊은 작가들의 문장력을 질타하면서, <천변풍경>을 쓴 소설가 박태원을 떠올렸다. 박태원은 장문을 쓰곤 했지만,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문장을 구사했다고 한다. 그는 서투른 문장이 가득한 작품은 절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또한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문장으로 구성된 글을 많이 읽어야 하고 또 좋은 문장을 선생님으로 삼아 부지런히 문장 수련을 해야 한다고 일렀다. 아울러 그는 문단 이면사를 연재하되, 문인들의 신변잡기적인 내용에 머물지 않고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을 쓸 작정이라고 했다.

김씨는 어떤 계기로 소설가가 되었을까. <현대문학>에서 근무하던 시절, 김씨는 낮에는 잡지사 일, 밤에는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 바쁜 생활중에도 문인들의 술자리에는 언제나 참석했는데,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이면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늘 나도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현대문학> 사무실에서 일하던 중 원고지를 뜯어 코를 푼 적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옆 사무실에 있던 어느 시인이 와서 본 거야. 그가 ‘김형은 글을 안 쓰니까 원고지가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글 쓰는 사람들에게 원고지는 성스러운 것이다’라며 대뜸 쏘아붙이지 않겠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그래서 결심했지. 그래 나도 써보마!”
그 날 이후 김씨는 술도 딱 끊고 방바닥에 엎드려 길고 긴 습작에 들어갔다. 그는 여덟편의 습작을 마치고, 아홉편째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는 글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정치가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자신의 내면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정치적 성향을, 누구보다도 김씨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꿈이 있었지. 하지만 문학을 하면서 정치인의 꿈을 접었어. 예전에 조연현, 김동리가 서로 문인협회 이사장이 되겠다고 오기싸움을 했었거든. 그것을 보고 문단 정치가 얼마나 보기 싫은 행동인지 깊이 깨달았어. 그래서 아직까지 문인단체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어.”
김씨는 이러한 문단의 권력 싸움에 끼어 들지 않는 것이 <현대문학>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꼬장꼬장한 그에게 그렇다면 문인 중 불의를 가장 못 참는 사람이 누구였냐고 물었다.
“박두진 선생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분으로 유명해. 문화공보부에서 그 분께 금관훈장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걸 단번에 거절했어.”
시인 박두진은 말수가 적고 목소리가 아주 가늘었지만, 금관훈장을 거절하는 태도는 아주 단호했다고 한다. 문화공보부에서 훈장수여식에라도 참석해달라고 졸랐지만, 박두진은 그것 또한 냉정히 거절했다. 결국 문화공보부 직원이 훈장을 들고 박두진의 집을 찾았고 그 금관훈장을 몰래 두고 가려고 했으나 박두진은 이내 “그걸 왜 놓고 가느냐. 당장 가져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김씨는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 보인다. 알고보니 그는 젊은 시절 못하는 운동이 거의 없었다고. 그중에서도 축구와 농구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프로의 실력이라고 자부하는 탁구 얘기 끝에 그는 짧은 소매를 걷고 팔을 구부려 보였다. 이윽고 그의 팔죽지에 잘 익은 복숭아를 닮은 알통 하나가 불룩 솟았다. 그것은 그가 현재 얼마나 건강한지, 이제부터 그가 보여줄 글이 얼마나 힘있고 탱탱할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걷었던 소매를 내리고, 이내 셔츠 주머니에 들어있던 시신 기증증을 필자 앞에 내밀었다. 여러 해 전, 대학병원에 시신을 기증했을 정도로 그는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
“나라고 왜 생에 대한 애착이 없겠어. 하지만 이쯤 살았으면 미련 없어. 난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야. 내게 죽음이 찾아오면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면 좋겠어.”
김씨는 시신 기증증을 셔츠 주머니 속에 도로 넣으며, 넉넉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여기에 설렁탕을 맛있게 하는 집이 있어. 거기서 저녁과 함께 소주 한잔 하지.”
김씨는 중절모를 고쳐 쓰고는, 어지럽고도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유리 강북구청 앞, 거리 양쪽에 가득 들어찬 음식점들 사이로 걸어가는 김씨의 뒷모습에서 술과 함께 시를 쓰던 당나라 시인 이태백을 본 듯, 풍요로운 예술가의 멋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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