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미쓰요는 아내가 죽을 때까지 문학과 생활의 가장 헌신적인 동반자였다.
아사히카와 영림출장소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결핵 환자들을 위한 잡지 <무화과> 발행인으로부터 훗다 아야코를 위문해줄 것을 부탁받았다. 단순히 위문을 부탁받은 것이었지만 아야코가 여자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성교제나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결핵에 감염되어 임파선 결핵을 앓은 경험이 있었다. 47년부터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55년에는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어떤 고통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가정을 가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운 좋게 체력이 주어진다 해도 제멋대로인 내 성격에 결혼생활은 번거로울 뿐이라는 생각도 깊었다.
하지만 그녀를 세번째 방문했을 때, 나는 “신이시여, 나의 생명을 훗다씨에게 주어도 좋으니, 아무쪼록 훗다씨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이듬해 나는 아야코에게 우리 두 사람간의 교제에 관한 긴 편지를 썼다. 그러나 현실은 어려웠다. 상대는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이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였고 언제 나을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57년 어느 여름날, 그녀는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불쾌한 미열이 여전히 남아 있긴 했지만 각혈도 하지 않았고 식은땀도 가라앉아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1년 후 그녀는 어머니의 식사 준비를 도울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가족들에게 나와 아야코와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3일 살고 죽더라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인정해주었지만 어머니는 몸이 약한 사람끼리의 결혼을 걱정했다. 장기간 결핵을 앓고 있던 사람끼리 결혼한다고 했으니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의 수명이 그녀보다 길다면 그 반을 그녀에게 나누어주소서”
59년 1월25일. 나와 아야코는 아사히키와 로쿠조 교회에서 약혼식을 치렀다. 결혼을 앞두고 그녀는 초대할 사람의 수와 회비, 축사나 사회자, 초대장의 문안 등등 결혼준비로 분주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결혼식 보름을 앞두고 그녀가 갑자기 39도의 고열로 쓰러졌다. 하지만 결혼식 하루 전날 그녀의 열이 마치 거짓말처럼 내렸다. 결혼식날 순백의 웨딩드레스에 몸을 감싼 서른일곱의 신부, 아야코는 마치 빛을 발하는 듯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아야코는 네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유년시절에 대하여 쓴 <잡초의 노래>, 소녀시절을 회상한 <돌멩이의 노래>, 청춘시절을 전한 <길은 여기에> 그리고 <이 질그릇에도> 이렇게 네권이다. 특히 <이 질그릇에도>는 ‘우리 결혼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붙여, 결혼초부터 시작하여 소설 <빙점>이 당선되기까지 9년에 걸친 생활이 쓰여 있다. 그녀는 결혼 첫날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도를 마친 서로의 눈에는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드디어 미우라는, ‘피곤할 테니 오늘은 편히 쉬도록 해요’라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배려해주었다. 그리고 내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키스도 없이 자신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도 조용하고 너무도 경건한 밤이었다.”
우리의 신방은 실내를 개조한 단칸방이었다. 겨우 9장의 다다미가 깔려 있고 집주인과 한집에 살아야 했지만 ‘좁으면서도 즐거운 우리집’이었다. 라디오 한대 없는 가난한 출발이었지만 우리는 늘 함께였다. 아야코가 작품활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항상 행동을 함께하게 되었다. 그무렵 나는 “만약 나의 수명이 그녀보다 길다면 그 반을 그녀에게 나누어주소서”라는 기도를 변함없이 드리곤 했다.
신혼생활은 즐거웠다. 아야코가 매일 싸준 도시락에는 그녀의 메모가 적힌 쪽지가 들어 있기도 했고, 빨갛게 절인 생강으로 하얀 밥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신혼시절 그녀는 자신은 별로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내게 자주 바나나를 사다 주었다. 혼자 게걸스럽게 먹던 나는 바나나가 비싸기 때문에 어느 가정에서도 쉽게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고 매사 솔직한 성격이었다. 심지어 별것 아닌 일에도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해서 나는 그녀에게 ‘조아리 엄마’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불쾌한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사과하곤 했던 그녀는 종이에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써서 천장에 붙여두곤 했는데, 3일만 지나도 천장에 붙은 종이가 무슨 일 때문에 붙인건지 잊어버려 나에게 묻곤 했다. 용서해도 쉽게 잊지 못하는 나와는 전혀 반대였다.
또 그녀는 단가를 지을 때도 거의 퇴고하지 않은 채 꾸밈 없이 읊기를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은 퇴고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쓰는 조잡한 문장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아야코는 결코 소설을 대강 쓴 적이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경리적인 사무에 흥미가 없다는 것. 경리사무는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61년 그녀가 잡화점을 시작했을 때도 장부정리는 내몫이었다. 아야코가 글을 쓰게 되면서부터 기록하는 것은 나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인세나 수입을 기록하는 정도여서 잡화점을 할 때보다 단순했지만 아야코의 입장에서는 내가 꽤 능력 있어 보였던 것 같다.
아야코가 13년에 걸친 투병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핵으로 인해 7년간 척추 카리에스를 앓은 몸이었고, 서른일곱살의 늦은 나이에 임신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63년 아야코는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그해 정월 초하루, 아야코의 친정으로 신년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우리는 아사히 신문에서 1천만엔이라는 상금이 걸린 소설 공모 소식을 보았다.
아야코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일찍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62년 월간지 <주부의 벗> 1월호에 ‘태양은 다시 지지 않는다’라는 수기가 당선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하야시다 리츠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아사히 신문 공고를 본 다음날, 아야코는 하루 만에 완성한 줄거리를 다음날 내게 들려주며 써도 좋겠냐고 물었다. 그때 아야코는 라스트신을 먼저 생각하고 주인공 요코의 유서를 쓰고 있었는데, 그 유서에 “나의 마음은 얼어버렸다”라고 쓰여 있어서 내가 제목을 ‘빙점’이라고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근사한 제목이라며 좋아했다.
잡화점을 그만둘 수 없었던 아야코는 가게문을 닫은 후 저녁 10시부터 새벽 1~2 시까지 소설을 써 나갔다. 추운 겨울에는 꽁꽁 언 잉크에 만년필을 찔러가며 집필에 몰두했다. 마침내 63년 12월 31일 오전 2시, 드디어 소설 <빙점>이 완성되었다.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이 질그릇에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렇게 해서 12월31일 오전 2시, 결국 소설 <빙점>은 완성되었다. 복사는 2백장 정도, 마침내 빠뜨리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어쨌든 의지가 약한 사람의 전형인 내가 1천장 가까이 되는 장편을 완성한 것이다. (중략) 골판지 상자에 50장씩 철한 원고를 신중하게 쌓았다. 원고는 도중에 눈을 맞거나 비를 맞아도 젖지 않도록 비닐봉지에 싸서 넣었다. 명찰도 비닐로 씌웠다. 그 원고가 든 소포를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하였고, 아침이 되어 남편 미우라가 아사히 신문사 본국까지 제출하러 가주었다. 12월 31일 소인이 있다면 유효할 것이다. 그 소인을 두번, 선명하게 받아 제출하고 왔다고 미우라는 내게 말했다.”
7월10일, 소설 <빙점>이 1위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와 아야코는 잡화점을 정리하기로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소설의 줄거리에 대해 아야코가 나와 상담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고작 나의 재능을 가지고 상담을? 말이 안 된다. 소설 <천북원야>의 주인공 다가노의 딸인 야에에게 정이 들어, 야에만은 살리자고 그렇게 부탁했지만, 아야코는 야에를 허무하게 바다에 빠뜨려버렸다. 그녀의 소설은 어떻게 전개될지 나로서는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아야코의 원고 청탁이 늘어나면서 나는 회사를 퇴직했다. 아내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아야코는 <빙점> 한권을 출판했을 뿐이었다. <양치는 언덕>의 출판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해 <신도의 벗>이라는 일본 기독교단체 출판국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시오가리 고개>를 쓰기 시작했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내를 돕기 위해 남자가 오랜 세월 해오던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걱정스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로선 남편이 밥을 짓든, 차를 끓이든, 서로가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야코는 소설을 쓰게 되고, 강연에 초청받게 되었어도 건방진 기색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결혼 36년 동안 나를 대하는 자세가 눈물겹도록 일관되게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TV를 간절히 원한 그녀에게 “필요없다”고 미루다가 10년이나 지나서야 사줄 만큼 나밖에 몰랐던 것은 내쪽이었다. 그 사이 <빙점> <양치는 언덕> 등 그녀의 소설이 TV 드라마로 방영되었지만 아야코는 친정집에 가서 봐야 했다.
아내의 집필 돕기 위해 직장 그만두고 구술 필기에 매달려
소설 <시오가리 고개>의 연재를 시작하고 10개월이 지났을 때, 아야코는 내게 말하는 대로 원고를 써주지 않겠냐고 했다. 66년부터 아야코와 나는 구술 필기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70여권의 작품이 대부분 구술 필기로 세상에 나왔다. 1권당 평균 3백 페이지로 본다면, 원고지 2만장은 나의 펜으로 썼다는 계산이 된다.
언젠가 “문학작품은 문자를 한자 한자 돌에 새기듯 쓰는 것이므로 구술 필기는 진정한 문학작품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한 아야코에게 구술은 정말로 적당한 수단이었다. 가끔 괴로웠던 것은 그녀가 구술하고 있는 도중에 졸음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야코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냉수로 얼굴을 씻곤 했다.
원고를 퇴고할 때도, 그녀의 지시에 따라 가필이나 삭제를 했다. 처음에 가필 수정은 그녀 스스로 연필을 움켜쥐고 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읽은 것을 들으면서 그녀가 “그 부분 이렇게 고쳐주세요” “다음 행은 전부 지우시고” 등등의 말로 원고를 다듬어갔다.
아야코는 취미가 적은 사람에 속한다. 그런 경향은 그녀의 소설에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야구에 대한 현대소설을 쓸 경우, 야구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모르고 쓰게 되면 이야기가 이상해집니다.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편이 무난합니다”라는 게 그녀의 설명. 때문에 아야코의 소설에는 야구뿐 아니라 골프, 마작 등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단 3분을 연설해도 메모를 하는 아야코는 모든 일을 건성으로 하지 않았다. 다도를 1년밖에 배우지 못했지만 <센노리큐와 그 아내들>을 쓸 때, 다도의 대가 후지오 에이지로 선생은 “다도에 관해 전혀 틀린 부분이 없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녀의 흥미는 오로지 문학적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소학교 5학년 때 이미 노트 한권에 시대소설을 쓴 적이 있다고 했다. 특히 13년에 걸친 요양중에 많은 서적을 읽었던 그녀에게 취미의 전부는 독서처럼 보였다.
결혼생활 동안 아야코는 많이 아팠다. 67년 그녀의 목에 악성질환이 발병했지만 다행히 <빙점>을 완성할 무렵 뜸 치료법으로 회복되었다. 80년 아야코는 얼굴의 대상포진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그후로도 혈소판 감소증, 만성 편도선염, 심장발작 등 수많은 병마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82년 직장암 수술에 이어 91년에는 난치병으로 불리는 파킨슨병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아야코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내복조차 입을 수 없었다. 혼자 눕거나 화장실에 가는 일도 그녀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병에 걸렸음에도 그녀는 언제나 숲처럼 조용했다. 짜증 한번 내는 일 없었다. 성질 급한 나에게는 그녀의 모습은 커다란 훈련이 되었다.
우리의 결혼식 축사는 “결혼생활은 즐거운 것뿐만 아니라 괴로운 일도 있지만 둘이서 협력해 나갈 때 극복할 수 있다”였다. 내가 아야코에게 협력하는 것은 극히 적지만, 남은 인생을 더 많이 그녀에게 협력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그녀로 인해 좋은 것들을 실로 많이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야코와 결혼한 것은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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