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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가, 그리고 인간 이건희

초일류 기업은 어떻게 탄생했나

글 정혜연 기자

입력 2021.10.25 10:30:02

개발도상국의 작은 제조업 회사에 불과했던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낸 데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 ‘경제사상가’로서의 이건희 회장을 조명한 책이 출간됐다.
오랜 시간 삼성은 한국인의 자존심이자 자랑거리로 자리매김해왔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데 고(故) 이건희 회장이 크게 기여한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지난해 10월 25일 그가 타계한 뒤 대한민국 경제사에 남긴 거대한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노력이 계속돼왔다. 이 가운데 허문명 동아일보 기자가 펴낸 책 ‘경제사상가 이건희’는 제목 그대로 기업인이 아닌 사상가로서의 인간 이건희를 조명한다.

지금까지 이건희 회장을 다룬 많은 책은 오직 그의 리더십과 기업 경영 능력을 다루는 쪽에 국한돼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건희 회장에 대해 “시대를 앞서 읽은 예언자였으며,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지혜를 말해준 사상가”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 회장은 통찰력이 뛰어나고, 지식이 깊고 넓은 인물이었다. 경제·경영 전반은 물론 물리, 수학, 사회학 심지어 아동심리학까지 넘나들었고 한국과 일본의 문화, 역사에도 통달했다. 이 회장은 이러한 지식과 통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에 과감히 맞서 도전했고, 세계 변화의 속도만큼 빠르고 절박한 태도로 기업을 움직였다. 그의 눈은 항상 미래를 향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를 만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단순한 경영자로만 여기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에 관한 주변인들의 생생한 증언과 에피소드

책에는 오랜 시간 곁에서 그를 지켜봐 온 삼성맨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이 회장의 생전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1978년 삼성전관에 입사해 이건희 회장 취임 당시 비서실 운영팀 과장으로 ‘이건희 회장 비서실 1기’ 멤버였던 박근희 전 삼성생명 부회장(현 CJ 부회장)은 제조업 중심이던 한국의 기간산업을 디지털 정보산업으로 바꾸는 데 일조한 이 회장의 남달랐던 선구안을 기억하고 있다.

박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은 1980년대 말부터 ‘디지털 인력을 키워야 한다’거나 ‘소프트 경영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디지털’은 글로벌 시장에서 제품이 막 나오고 있었지만 ‘소프트 경영’이라는 말은 상당히 생소하고 추상적으로 다가왔다”고 증언한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도 “돌이켜보면 이건희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을 이미 1980년대부터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 이전에 사상가이자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운둔형 경영자’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 회장이 전면에 나선 때는 1993년이다. 당시 ‘신경영’을 선언하며 세상 밖으로 나온 이건희 회장은 숱한 명언을 쏟아냈는데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적 공황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만 심리적 공황은 한번 빠지면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경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지금처럼 변화가 궤도 없이 빨라지는 시대에는 모든 걸 뒤집어 바라보는 원점 사고가 필요하다” “진정한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그 힘은 밖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 등 그가 남긴 어록은 과거에 박제된 목소리가 아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건희 회장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주변 인물들과의 일화도 소개돼 있다.

이 회장과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인형무 변호사의 인터뷰, 삼성전자 초기 시절 영입된 일본인 기술인 고문 기보 마사오의 인터뷰, 야마자키 가쓰히코 전 일본경제신문 서울지국장의 증언 등은 이건희 회장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또한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와 수천억원에 달하는 현대미술품 등 ‘이건희 컬렉션’에 대해 언급한 섹션도 눈길을 끈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기업 경영뿐만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도 초일류를 지향했던 고인의 생각과 철학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사진 박해윤 기자 



여성동아 2021년 11월 6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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