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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서 배우로, 추상미

글·진혜린 | 사진·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4.03.14 10:38:00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무대에 선 추상미는 예전보다 깊어진 눈빛이었다.
한 아이의 엄마로 육아에만 전념해온 그가 5년 만에 선택한 작품, 연극 ‘은밀한 기쁨’을 통해 추상미의 배우 인생 2막을 엿봤다.
엄마에서 배우로, 추상미
무대에 불이 켜지고 빨간 셔츠를 입은 추상미(41)의 모습이 보인다. 짧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리고 눈물을 머금은 그의 눈에 고뇌가 가득하다. 세상 고민을 모두 끌어안은 채 다소 고집스럽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은밀한 기쁨’ 속 이사벨에게는 그가 한 아이의 엄마로서 느끼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여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은 지우고 온전히 이사벨을 연기하는 추상미에게서 굳이 5년 전과 달라진 점을 찾자면 기존의 차갑고 도시적인 이미지 대신 자리한 친근함 정도라고나 할까.

“결혼 후 생긴 변화는 사람들이 저를 봤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을 거예요. 연기하는 방식의 변화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할까요.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에 변화가 생겼거든요. 아이를 낳고 나서는 다른 사람의 처지나 상황을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작품 속 캐릭터를 볼 때도 연민을 갖게 되는, 긍휼의 마음이 생긴 것 같고요.”

추상미는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함께 출연한 뮤지컬 배우 이석준(42)과 4년 열애 끝에 2007년 결혼했다. 그 후 추상미의 필모그래피는 조금씩 변화를 맞게 된다. 배우에서 학생으로, 학생에서 연출가로의 변신을 꾀하기 시작한 것.

2009년 SBS 드라마 ‘시티홀’과 연극 ‘가을 소나타’를 끝으로 연기 활동을 중단한 그는 2010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며 영화감독으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2011년 서울국제영화제 ‘아시아 단편 경선’에 ‘분장실’을 출품하면서부터. 같은 해 아들 지명(3)을 낳은 후에는 잠시 연출 활동에도 손을 떼고 육아에만 전념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엄마가 ‘체질’로 느껴질 만큼 아기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던 그였지만 작품 활동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2013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단편영화 ‘영향 아래 여자’에는 ‘엄마’가 된 추상미의 변화된 시선이 담겨 있다.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아픔을 통해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것. 그는 “나이 들어 얻은 아이라 그런지 더 애착이 깊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악몽을 꾸기도 하거든요. 너무 소중하면 잃어버리게 될까 봐 두려워하기도 하지 않나요?”라며 아들에 대한 애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엄마 되고 달라진 세상을 향한 시선

엄마에서 배우로, 추상미

추상미가 5년 만의 연기 복귀작으로 선택한 ‘은밀한 기쁨’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3월 2일까지 공연된다.

결혼과 출산, 육아와 함께 같은 템포로 흘러오고 있는 그의 작품 활동에는 그가 가진 창작의 가치를 존중하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진심 어린 의지가 엿보인다. 5년 만의 연기 컴백 작품으로 정통 연극을 선택한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상업적인 작품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연극, 관객에게 물음을 던지는 연극이 대학로에서 유지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점에서 ‘은밀한 기쁨’의 원작자 데이비드 헤어에 대한 믿음이 컸죠. 깊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이런 정통 연극을 많이 하고 싶어요.”

배우로서의 고집과 신념. 그래서 그가 이번에 맡은 이사벨이라는 캐릭터는 추상미와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작품 속 이사벨은 아버지가 추구하던 정통적인 가치관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에요. 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흔하지 않는 캐릭터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죠. 하지만 이사벨과 같은 고상한 가치관은 아닐지라도 각자 추구하는 고집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요. 때론 이사벨처럼 물질적인 욕구가 여느 사람들과 다를 수도 있고요. 제 주변에는 영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더욱이 공연을 시작한 후 관객을 만나면서 더욱 이사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 같아요.”

영국 유명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가 1988년 쓴 ‘은밀한 기쁨’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가족이 붕괴되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추상미가 맡은 이사벨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한편, 다른 가족 간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사실 현실의 추상미야말로 연기에 대한 정통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배우 중 한 명일지 모른다. 어린 시절 두 발로 걷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인 배우 故 추송웅을 따라다니며 극장에서 뛰어놀았던 그다. 막상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연기자가 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딸에게 연극과 극장에 대한 경외심을 남겨주었다.

그러한 경외심은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표현된다. ‘은밀한 기쁨’의 김광보 연출은 그에 대해 “배역을 충분히 이해한 후 뛰어난 동물적 감각으로 표현해낸다”고 평했다. 그의 남편인 뮤지컬 배우 이석준 또한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같지만 연기를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일반 연예인과는 많이 다르다. 아내는 예술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창작을 하고 싶다는 욕구는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저에게 연출은 오랜 꿈이기도 하죠. 연기와 연출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를 표현하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내 목소리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같지 않을까요?”

그는 세상에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작품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은밀한 기쁨’이 끝나면 연출가의 이름으로 장편영화를 연출하고, 배우의 이름으로 또 다른 연극 무대에 설 계획도 가지고 있다. 배우에서 연출가로, 한 아이의 엄마에서 또다시 무대 위 배우로 종횡무진하는 추상미의 인생 2막이 기대된다.

여성동아 2014년 3월 6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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