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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청소년, 법조인 되다 대전가정법원 고춘순 판사

“‘너는 특별하다’고 말해준 초등학교 선생님 잊지 못해”

글·진혜린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13.08.23 11:40:00

어느 판사의 성장 스토리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한때는 불량 청소년이었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판사가 된 주인공, 대전가정법원 고춘순 판사는 ‘바르게 살기’라는 교과서적 삶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지는지 몸소 보여주고 있다.
비행청소년, 법조인 되다 대전가정법원 고춘순 판사


‘비행’ ‘불량’이란 단어와 거리가 멀어야 할 직업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판사’다. 판사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 비행과 불량을 바로잡아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으니까. 대전가정법원 고춘순(42) 판사 또한 교과서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바름’과 ‘올곧음’의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다. 법이 없으면 법을 만들어서라도 살 사람 같달까.
그런 고 판사에게도 나름의 ‘흑역사’가 있었다. 최근 대법원이 펴낸 ‘법원사람들’ 7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고백했는데, 그게 뜻밖의 화제가 됐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아질 것 없다’는 마음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인생 ‘셋업’을 포기한 젊은이들에게 고 판사의 흑역사 극복기는 훌륭한 지침서가 될 듯하다.

가난이 가난인 줄도 모르던 광부의 아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집으로 이사를 했어요. 당시까지 양돈은 구경해본 적도 없고 고기가 먹고 싶으면 토끼나 노루, 개구리, 뱀 같은 것을 잡아먹었죠. 그 동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면 소 한 마리를 끌고 다니면서 꼴을 베어다 먹일 만큼 생활력이 강했어요. 어린 일꾼들이었죠. 톱과 낫을 들고 나가면 땔나무를 구해 지게로 한 짐 지고 돌아왔어요.”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들었음직한 옛날이야기 같지만 강원도 영월 깊은 산골에서 살던 고춘순 판사에게는 초등학생 시절 어느 평범한 날의 이야기다. 그가 1971년생이니 그리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다. 풍족하진 않아도 평화롭던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도 모르고 살던,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고 판사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갱도에서 허리를 다치면서 가족에게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생업을 놓은 것은 물론 병원에서 1년간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얼마 후 몸을 추스르고 다시 탄광으로 복귀했지만 가족의 삶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머니가 광부들을 상대로 술도 팔고 코흘리개들에게 과자도 파는 ‘점방’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고 판사가 가난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삐라(전단지)를 모아 파출소에서 공책으로 바꾼 다음 구멍가게에서 다시 돈이나 과자로 바꾸는 요령을 터득해서 용돈을 벌었다. 더욱이 남한강 상류에 사는 꺽지(민물고기)를 잡아 어머니 가게 앞에서 팔기도 했단다.
“한 번 나가면 30~40마리는 너끈히 잡아왔죠. 그걸 우리 식구들이 다 못 먹으니까, 큰 대야에 담아 어머니 가게 앞에 둬요. 파는 거라고 안 해도 광부들이 술 마시면서 군침을 흘리거든요. 못 이기는 척 백원만 내고 먹으라고 하면 아저씨들이 알아서 손질해서 먹어요. 그 수입이 꽤 괜찮았어요(웃음).”
그의 성장기 최대 위기는 중학교 3학년 때 찾아왔다. 또다시 갱도가 무너지며 아버지가 허리를 크게 다친 것이다. 당시 이미 큰형과 큰누나는 결혼을 해서 분가했고, 둘째와 셋째 형은 직장을 구해 타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셋째 형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학업을 포기해야 할 만큼 집안 살림이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후 어머니는 병간호를 해야 했기에 고 판사는 여동생을 읍내 큰형네로 보내고 홀로 집을 지켰다. 큰형네도 여유롭지 못한데 자신까지 신세를 지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사춘기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단다.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 홀로 강원도 산골 마을에 사는 살림은 매우 빠듯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등교하고 어둑해진 다음에 집에 오다 보니 땔감을 구할 틈이 없더라고요. 강원도는 해만 지면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요.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이불 뒤집어쓰고 잤죠. 땔감이 없으면 밥도 못 하잖아요. 가끔 형한테 받은 용돈으로 식빵 같은 걸 사 놓고 오래오래 먹었어요.”

비행청소년과 모범생의 이중생활
어려운 환경에서도 소년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반장, 회장을 놓친 적이 없었다. 공부도 늘 1등이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쉽지 않았다. 가정형편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고, 결국 국비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구미전자공고 진학을 결정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큰형수가 돕겠다고 나섰다. 뒤늦게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을 신청해 교과서도 없이 4월에 첫 등교를 했다. 그것은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자 비행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 시초다.

“처음에는 큰형 집에서 지내다 우여곡절 끝에 작은 자취방을 얻게 됐어요. 보호자 없이 혼자 생활하다 보니까 자취방은 늘 친구들로 북적였죠. 제가 한 달 늦게 입학할 때 처음 어울리게 된 친구들이 소위 ‘잘 노는’ 아이들이었고, 그 아이들이 자주 모여 놀던 지역에서 제 자취방이 가까워 아지트가 된 거죠.”
모범생이자 우등생이던 그가 불량학생으로 전락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친구들은 좁아터진 자취방에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며 만화책을 보고, 날이 저물면 술을 마시다 싸움질도 했다. 고 판사 또한 무리에 섞여 비행에 동조했고, 때론 불법을 묵인하거나 방조했다고 회고했다. 학교에서도 일명 ‘담배구역’에 낄 수 있는 끗발(?)도 있었다. 그래도 고 판사가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은 공부였다. 시험 때만 되면 자취방은 친구들에게 내주고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어떨 때는 자취방에서 친구들이 술 마시며 놀고 있을 때 바로 옆 책상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기도 했단다.
“그래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제가 비행 청소년이란 것을 몰랐어요. 한편으로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즐겁고, 그런 생활이 나름대로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죠.”
고 판사의 이중생활은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처참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오토바이 몇 대를 훔쳐와 자취방 마당에 세워두고 타고 다녔는데, 며칠을 두고 봐도 별문제가 없자 고 판사도 그 오토바이를 이용했던 것. 등하굣길에 이용하거나 집에 다녀올 때 오토바이를 몰았다. 이른바 ‘장물 취득’과 ‘무면허 운전’ 두 가지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 가는 길에 신호에 걸려 서 있는데 누가 와서 ‘이거 어디서 났냐?’고 물어요. 오토바이 주인이었죠. 무조건 잘못했다고, 배상해드리겠다고 싹싹 빌었어요. 경찰서에 신고하면 제 이중생활이 모두 탄로 날 테고 처벌도 받고 전과자가 되는 건 아닌가 싶어 겁이 났어요.”
지금껏 말썽 한 번 안 피우고 공부 잘하던 아들이 오토바이를 훔쳐 탔다고 오토바이 주인에게 끌려 집으로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오토바이 주인과 조용히 합의한 뒤 “자취방을 청산하라”고 엄포만 놓았다.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아찔한 순간을 경험한 후 고 판사는 불량 청소년들의 아지트이던 자취방을 청산하고 예전의 모범생으로 돌아갔다. 두려움이 가장 큰 경각심이었던 셈이다. 더욱이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어머니의 신임에 어긋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게 장물 취득이었거든요. 직접 훔친 게 아니니까. 그런데 최근 저와 관련한 기사에 ‘절도’라고 실렸더라고요. 그게 참 억울했어요. 기자한테 전화해서 고쳐달라고 말하고 싶었죠. 그런데 문득 ‘그때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게 지금 돌아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도 제가 훔친 게 아니라는 말을 누구한테도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려면 친구들이 모두 연루될 테니까요. 이제 와서 제가 훔친 게 아니라고 밝히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죠. 죄는 지은 대로 돌려받는 건가 봐요.”
비행 생활을 청산하고 학업에만 열중해 대학교에 입학한 후 고 판사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부모에게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비디오 대여점, 주점의 종업원, 벽돌 나르기, 독서실 운전기사 등 업종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꿈이 없었다. 강원대 행정학과를 다니던 고 판사는 동기들이 행정고시나 공무원시험 등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졸업을 맞았다. 겨우 마음을 둔 것이 검찰 7급 공무원. 그는 서울로 올라와 신촌 대학가의 한 고시원에 총무로 취직한 후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제가 학원을 잘못 찾아간 거예요. 공무원 시험을 보려면 노량진으로 가야 하는데 신림동으로 간 거죠. 거기서 민법 강의를 듣다 보니 죄다 사법고시 준비하는 사람들뿐인 거예요. 스터디그룹에도 들어가고 공부를 하다 보니 저도 사법시험을 볼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때까진 아예 고려 대상도 아니던 사법시험 준비를 덜컥 시작하게 된 거죠.”
그때가 1997년 9월이었다. 이듬해 2월 시험까지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단 시작했으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때까지 모은 돈을 탈탈 털어넣어 학원에 등록하고 고시원에 틀어박혔다.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고 공부를 했다.



비행청소년, 법조인 되다 대전가정법원 고춘순 판사

사법고시 2차 시험을 준비하다 만난 아내. 고 판사는 합격했지만, 아내는 불합격의 쓴잔을 마신 날, 고 판사는 아내와의 결혼을 결심했단다. 1남 1녀를 낳고 알콩달콩 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주변인 중에 마음으로라도 진지하게 응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허송세월할 거라고 다들 말렸어요. 그때 힘이 됐던 것이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 말씀이었죠. 한 반에 고작 14명 정도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1등을 해봐야 별거 아니라고들 했는데, 선생님은 늘 ‘1등이라고 다 같은 1등이 아니다. 너는 특별하다’고 말씀해주셨죠. 진심으로 해주신 그 말씀이 고시공부 하는 동안 힘이 됐어요.”
결과는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뒤이어 1999년 시험에서도 낙방했다. 고시원에서 야간 총무로 일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에 허덕였다. 일주일 넘게 밀가루로 수제비를 빚어 끼니를 해결하던 때도 있었다. 2000년 시험을 앞두고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왔을 때 또다시 큰형의 도움을 받으며 어렵사리 고시생 생활을 이어가던 중 예상치 못한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1998년 사법시험 당시 논란이 됐던 다섯 문제가 소송을 통해 정답이 바뀌면서 고 판사의 최종 성적이 뒤바뀐 것. 결과적으로 세 문제를 더 맞혀 합격선에 들었다. 말하자면 사법시험 준비 6개월 만에 1차 시험에 합격한 것이었다. 곧바로 2차 시험 준비에 돌입해 이듬해인 200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차 시험을 준비할 때, 고 판사는 더욱 악바리가 됐다고 했다. 자취방 바로 옆 건물이 공사를 하는 바람에 집이 흔들리고 엄청난 소음이 나는데도 동요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그때는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단다.

스스로 존귀하다는 것 깨닫게 해주고 싶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사법고시 합격! 그러나 영화 속 이야기처럼 탄탄대로, 해피엔딩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니까.
2차 시험을 준비하면서 만난 지금의 아내, 이정희 변호사(건양학원 사내변호사)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 사법시험 준비하는 아내와 웃고 울며 살아온 이야기는 또 한 편의 일일드라마 같다.
고춘순 판사는 33기로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대전지방법원에 자원한 후 서산과 대전으로 근무지를 오가다, 지난 2월 대전가정법원 가사소년전문판사로 자리를 잡았다. 최근 이 자리로 발령받은 후 매일 비행 청소년들과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잊고 있던 옛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요즘 청소년들 중에도 경찰에 적발되고 조사를 받으면서 바른 자리를 찾아가는 아이가 많아요. 그런 기회를 주기 위해 형사처벌이 아닌 보호 처분 등의 조치가 필요한 거고요. 마음만 고쳐먹고 의지를 가지면 충분히 올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다고 믿어요. 저의 가치를 인정해주셨던 초등학교 선생님과 또 저를 믿어주셨던 어머니처럼 그들에게도 인성을 올바르게 이끌어주고 자존감을 키워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법정에서 사건 당사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서 고 판사는 법정에 들어서기 전 아이에게 전할 메시지를 꼭 메모한다고 했다. 그것은 법을 지켜야 한다는 훈계가 아닌 아이가 인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것, 예를 들면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인생의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고 했다. 한번은 최악의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경미한 비행으로 법정에 섰을 때, “그 어려움을 겪고도 넌 참 훌륭하게 자랐다”고 말해주기도 했다고.
“제가 고등학교 때 어울리던 친구들을 지금 만나지는 못하지만 가끔 소식은 듣고 삽니다. 잘 지내고 있더군요(웃음). 비행을 저질렀던 소년도, 시간이 지나면 제법 괜찮은 어른이 돼 잘 살아갑니다. 지금 만난 소년들도 한때의 어려운 시간을 잘 넘기면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 어려운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돼주고 싶습니다.”

여성동아 2013년 8월 5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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