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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거리 떠돌던 풍운아, 전설이 되다

모델라인 이재연 회장

글·진혜린 | 사진·지호영 기자, 모델라인 제공

입력 2013.04.16 16:19:00

이재연 회장은 한국 모델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모델이라는 말이 생소하던 1971년에 데뷔한 그는 1979년 국내 최초의 독립적 연예기획사를 설립했으며 이후 차승원, 권상우, 이소라 등 수백 명의 톱 모델을 배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걸어왔던 고독하고 아름다운 35년간의 사투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명동 거리 떠돌던 풍운아, 전설이 되다


이재연(67) 회장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입에 붙은 노래가 있다. ‘오오오 맥그리거, 주말엔 자연으로 맥그리거 주말 맥그리거~’ 1970년대 주말패션이라고 불리던 캐주얼 브랜드 맥그리거(삼성물산)의 광고 음악이다. 어찌나 입에 척척 감기는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맥그리거를 입고 주말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콘트라스트가 강렬한 흑백 화면 속에는 20대의 이재연이 등장한다. 황야의 무법자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빛에 카우보이 모자 차양을 매만지는 남자. 오프로드를 타며 물살을 가르던 야성미와 함께 가족과 캠핑을 즐기는 다정함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는 1970년대 척박했던 패션쇼 장의 런웨이를 걷고, 삼성물산의 맥그리거와 위크엔드, 제일모직의 골덴텍스 등의 광고에 출연하며 한국 남성 모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35년을 한결같이 모델계의 든든한 뒷배가 돼주었다. 그를 빼놓고는 한국 모델의 역사를 설명하기 힘들 만큼.
명불허전이라던가. 184cm의 키와 군살 없는 몸매는 블루진과 카디건에 머플러를 매치한 패션 감각이 더해지며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한 젊은 뒤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황당한 무늬의 티셔츠에 스프링 달린 열쇠고리, 거기에 배까지 나와 줘야 부장님 패션의 완성’이라던 어느 개그맨의 노래와는 전혀 딴판이다.
“사람이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져요. 멋있게 차려입고 아무렇게나 앉아 있을 수 없고,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잖아요. 뭔가 점잖게 해야 할 것 같고 멋진 행동도 해야 할 것 같죠. 진을 입었을 때는 그에 걸맞은 말씨가 나오고, 슈트를 입으면 그에 걸맞은 말씨가 나와요. 맵시에 따라 말씨가 달라지고, 말씨가 달라지면 마음가짐도 달라지는 거죠. 그래서 패션이 사회적으로 문화에 대한 원초적인 책임이 있는 셈이라, 패션 하는 사람들이 그걸 알아야 해요.”
이재연 회장은 재차 맵시 다음이 말씨고 그다음이 마음씨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아무리 말해도 기자들이 늘 순서를 뒤죽박죽 바꿔놓는다며 웃는다. 패션이라는 거대한 사업의 중심에 자신의 인생을 고스란히 심어놓은 그에게는 패션인으로서의 남다른 외고집이 느껴졌다.

수백 명 스타들의 고향 ‘모델라인’

명동 거리 떠돌던 풍운아, 전설이 되다


이재연 회장이 모델로 데뷔한 때는 1971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였다.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문 장신인 데다 이국적인 외모는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9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표 남성 모델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천성적인 의협심이 조금씩 발동하기 시작했다.
“모델들이 대우를 못 받았어요. 배우나 가수는 인정해주면서 모델한테는 ‘사내자식들이 그런 직업을 갖느냐’고 핀잔만 했다고요. 같이 행사를 해도 연예인들은 호텔에서 재우고 모델들은 여인숙에서 재웠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다들 모델로 시작했다가 결국에는 배우 되고 가수 되면서 모두 모델 일을 그만두거든요. 그래서 모델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았으면 싶었는데, 누군가가 이걸 위해 희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겠더라고요.”
1979년, 그는 도신우·김석기·김진과 함께 모델로서 소신 있는 선택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모델 에이전시로 볼 수 있는 ‘88패션’을 열었던 것.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으며, 모델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싶었다.
“막상 사무실을 열었는데 일거리가 없는 거예요. 결국 군대 시절 인연이 있던 분에게 도움을 받아 뜬금없이 인테리어 사업도 했지요. 그렇게 모델들을 키워 나가다 1983년에 창립 멤버들이 각기 흩어졌어요. 나는 ‘모델라인’을 세우면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옮겨갔는데, 사업은 잘됐지만 그때 ‘88패션’을 계속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이 참 아쉬워요. 한국에서 제일 튼튼한 회사가 될 수 있었거든요. 요즘은 모델 에이전시가 백 군데가 넘어요. 경쟁이 심하니까 대우가 좋아질 리 있나.”
평생을 한 분야에 쏟아부은 원로만이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애정 어린 통찰이다. 그가 설립한 ‘모델라인’에서는 수많은 배우, 가수, 방송인이 배출됐다. 초창기 멤버는 이희재·박정옥·유기복·유혜영·윤영실로 당대 최고의 모델들. 그 뒤 오수미·유인촌·박광남 등이 주춧돌이 돼 모델라인의 명성을 쌓은 후 어느 순간 탄력을 받기 시작하더니 스타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차승원·권상우·조민기·김영준·정겨운·탁재훈·이선진·최여진·이소라·진희경, 그리고 변정수도 그의 손을 거쳐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남들은 ‘스타 양성소’라며 치켜세우지만 이재연 회장에게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서러운 일이라고 했다.



명동 거리 떠돌던 풍운아, 전설이 되다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죠. 모델계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원초적인 것이 해결돼야 하는데, 수입이 시원찮으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그런 친구들을 어떻게 잡아요. ‘배우 활동도 하는 모델’로 유명해졌으면 좋겠는데 결국 ‘모델 출신 배우’가 되니까 안타깝죠. 그래도 그 친구들이 자신의 뿌리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배우와 모델, 사실은 기본이 다른 거니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모델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이 동네가 참 골치 아파요(웃음). 쇼를 준비하면서 한 모델의 이름을 세 번 이상 부르잖아요? 그럼 바로 그 모델이랑 스캔들이 나요.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죠. 이 동네는 다 갖다 붙이니까(웃음). 모델을 진짜 여자로 보면 이 직업은 그만둬야 하는 건데 말이죠. 사고가 날 수밖에 없거든. 그래서 옛날에는 모델라인에서 동료끼리 연애하면 둘 중 하나였죠. 둘 다 쫓겨나거나, 결혼하거나(웃음).”
‘모델라인’은 모델 에이전시는 물론 아카데미, 패션 행사 대행 등의 사업을 펼치며 패션계에 우뚝 섰다. 1989년 일본 도쿄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고 ‘서울패션아티스트협회(SFAA)’를 열었고, 젊은 디자이너들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뉴웨이브인서울(NWIS)’을 열었다. 국내 디자이너들의 국제 무대 진출을 위한 ‘그린·글로벌’ 컬렉션의 탄생을 주도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이재연 회장의 쇼는 다름 아닌 ‘코리아 베스트 드레서 상’이다. 정치, 경제, 문화 인사들에게 관심을 일으키고자 시작된 후 28년간 사비를 털어 지금까지 이어온 터라 이 회장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행사라고 했다.

꽃다방 지배인에서 모델계 대부가 되기까지
사실 이재연 회장 또한 젊은 시절 명동의 다방에 앉아 막연히 영화배우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모델이 되기 전에 신성일 선배를 오가며 가끔 봤었는데, ‘맨발의 청춘’을 보면서 배우가 되고 싶더라고.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했지만 막연하게 영화 쪽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거죠. 그러다 덜컥 모델이 된 거지.”
그에게는 모델이 되기 전 꽤나 길었던 방황의 시간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부모의 이혼으로 불후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시작된 방황은 스물다섯 살 때 모델이 되면서 종착점을 맞았다. 그래서 이재연 회장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원도 원주에서 알아주던 반항기 가득한 소년이 해병대 제대 후 명동 바닥을 휘젓고 다니게 된 것도 사람의 인연에서 비롯됐듯, 그가 모델이 된 데도 사람과의 인연이 발판이 됐다.
“어렸을 때 저는 반항아였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거든요. 어머니랑은 초등학생 때 헤어지고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거의 누나가 키우다시피 했죠. 그때 누나 속을 어지간히 썩였어요. 만날 사고만 쳤거든. 그러다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말년 휴가 때 명동에 갔다가 아는 사람한테 일자리 비슷한 걸 얻어서 제대 후 바로 명동으로 갔죠. 유네스코 빌딩 지하에 있던 ‘꽃다방’ 지배인. 그땐 죄다 DJ가 음악 틀어주던 음악다방이었는데, 다방에서 말썽 피우는 사람 처리해주고, 깡패들 와서 행패 부리면 정리해주는 게 지배인이 하는 일이지 뭐 별거 있나.”
고향에서는 뭘로 유명했냐고 물으니 주먹을 불끈 쥐며 ‘이거’란다. 명동 바닥에서도 인정받은 주먹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에는 왕년에 잘나가던 싸움꾼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주먹이 무뎌졌다는 게 아니라 눈빛부터가 매섭지 않았다.
“강원도 촌놈이 명동에 와서 모델이 됐단 말이야. 대학도 못 나오고 영어 한마디도 못하던 놈이 세계를 휘젓고 다닌단 말이야. 사고뭉치가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거예요. 그거 참 신기하죠?”
그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었던 신기한 인연은 현재 계명대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재길과의 만남이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이재길이 꽃다방 지배인인 이재연을 찍은 사진을 대회에 출품해 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뒤로 기자들이 와서 사진도 찍어가고 그랬어요. 처음 몇 개월은 지배인으로 있으면서 모델 일을 함께 했는데, 한번은 ‘선데이서울’에 제 사진이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죠. ‘형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하고. 그래서 이제 건달도 그만둬야겠다 싶었죠.”

한번 발을 디디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주먹의 세계’가 아니냐고 물었다. 이재연 회장은 시원하게 웃더니 대뜸 물었다. “깡패와 건달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기자가 사전적 의미를 떠올리며 잠시 머뭇거리자 “난 깡패는 아니었어. 건달이었지” 하며 웃는다.
“깡패는 조직적으로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인데, 나는 조직 같은 게 없었거든요. 건달은 그냥 풍류를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깡패나 건달이나 뒤치나 메치나 똑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내가 그쪽 출신이니까 나이트클럽이나 술집 같은 데서 우리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았죠. 내가 이쪽 일 하니까, 건드리지 말자 그랬더라고.”
그렇게 꽃다방 지배인을 그만두고 처음 몇 개월은 끼니를 거를 만큼 힘들었지만 그는 그 시절을 그 어느 때보다 신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종로구 원서동에서 하숙 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버스비가 없어 명동까지 걸어 다녔다. 하숙집 월세가 밀려 비키니 옷장이며 세간을 저당 잡히면 맥그리거 광고 촬영으로 모델비를 받아 살림살이를 찾아오곤 했다. 그래도 스물다섯 살의 청춘은 방황의 삶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기회’를 만나 태어나 처음으로 인생의 재미를 맛봤다.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삶이 그냥 몸에 배어가는 거예요. 하지만 기회를 만나면 인생의 본질도 바뀌거든요. 그런 기회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받아서 인생이 바뀐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변화인 거죠. 모델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이 나한테 그랬죠. ‘나를 만났으니 자네도 이제 명사’라고.”

명동 거리 떠돌던 풍운아, 전설이 되다


폐암과 함께 찾아온 위기의 순간
순풍에 돛 단 듯 순탄한 항해를 하던 ‘모델라인’이 뜻밖의 암초를 만난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모델라인’의 함장인 이재연 회장에게 이상 징후가 발견된 것이다. 폐암이었다.
“건강검진을 받다가 발견됐는데, 몇 기다 할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수술하는 날이 하필이면 우리 아들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는데, 딱 눈을 뜨니까 아이가 꽃다발을 들고 발치에 서 있는 거예요. ‘저 어린아이를 두고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하며 겁이 나더라고요.”
암과 수술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누구나 크고 작은 변화를 맞는다. 간접적인 죽음을 체험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재연 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2년, 늦은 나이에 결혼해 늦게 본 아들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계산기를 두드리게 되더라고요. 내가 갑자기 죽으면 우리 아들이 클 때까지 무슨 돈으로 먹고살까 하고요. 근데 며칠을 생각해봐도 아이한테 물려줄 게 없는 거예요. 아차 싶더라고요. 그동안 미쳐서 일만 했지, 재산을 어떻게 불리고 어쩌고 하는 걸 몰랐거든요.”
수술을 받고 회사에 나가 보니 못 보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는 모델라인을 85억원에 넘기라고 제안했다. 당시 모델라인은 대전, 대구, 부산, 창원, 울산을 비롯한 일본, 중국, 미국, 독일에까지 지사가 설립돼 있을 만큼 번창했다. 더욱이 이재연 회장이 월급을 받으며 계속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단서도 달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계약금은 보통 10%만 받는데, 덜컥 10억원을 받았지 뭡니까. 그게 중도금이 포함된 거라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출장을 갔다 왔는데, 그사이 세무 조사를 해서 저를 배임이나 횡령으로 고소해놓았더라고요. 그 뒤로 매일 울면서 법정 싸움을 했어요. 그러는 동안 그쪽은 회사를 상장시켜 돈을 엄청 챙겼죠. 내가 그걸 다 물어줘야 해서 간신히 ‘모델라인’이라는 이름만 되찾아왔죠.”
23년간 일궈왔던 분신 같은 회사를 하루아침에 잃게 된 순간. 그것은 단순히 잔금을 마저 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단다. 모델계의 핵심으로 불리던 ‘모델라인’의 명성에 금이 간다는 것은 그에게 한국 모델계의 역사에 금이 간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다가왔다. 살던 압구정동 집도 팔아가며 끝까지 매달렸다. 기자는 왜 그간 쌓아왔던 수많은 인맥을 총동원해 일사천리로 사건을 해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한번은 검찰청에 갔다가 우연히 아는 검사를 만났어요. ‘어쩐 일이냐’고 묻기에, ‘별거 아니다’며 도망치듯 빠져나왔죠. 나중에 그 동생이 저를 보고 ‘형은 참 바보예요’ 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면 그게 그 동생한테는 얼마나 큰 부담이겠어요.”
지난한 법정 싸움은 이재연 회장이 무혐의 처분을 받고, 오히려 상대방이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구속 수감되면서 4년 8개월 만에 끝이 났다. 2010년 그는 다시 ‘주식회사 모델라인 이재연’을 세우며 지난 3년간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제는 좀 자신을 편하게 해줘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더니,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사람이 감사할 줄을 알아야 해요. 제게 직업을 주었잖아요. 저를 구원해줬으니까 제가 그 보답을 해야죠. 그 보답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음 세대에도 물려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일까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창조산업에 매진해야 해요. 창조산업의 꽃을 패션이라고 말하면 틀렸다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패션이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우리의 창조산업으로 키워야 해요. 샤넬의 매출에서 의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17%밖에 안 돼요. 그 밖의 엄청난 규모의 사업이 샤넬을 중심으로 펼쳐지거든요. 우리에게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에,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여성동아 2013년 4월 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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