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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바벨 내려놓고 여인으로 돌아가다

글·구희언 기자 | 사진·이기욱 기자 김재명 인턴가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연합뉴스 제공

입력 2013.02.19 09:21:00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바벨 손 키스’로 국민에게 감동을 안긴 역도 선수 장미란이 바벨과 함께한 15년을 정리했다. 하지만 End가 아닌 And다. 장미란의 인생 제2라운드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장미란, 바벨 내려놓고 여인으로 돌아가다


장미란(30)이 15년간 쥐었던 바벨을 내려놨다. 1월 10일 경기도 고양시청 체육관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고양의 딸, ‘로즈란’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역도 선수 장미란의 은퇴 기자회견 자리였다. 이날 현장에는 장미란의 가족들도 함께였다. 장미란재단 상임이사인 아버지 장호철 씨와 어머니 이현자 씨, 53kg급 역도 선수인 동생 장미령 씨도 참석했다. 장미란은 짧은 단발에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단상에 올라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겨우 꺼내곤 말을 잇지 못했다. 굵은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아…, 다른 선수들 은퇴하는 거 보면서 저는 울지 말고 쿨하게 웃으면서 나와야지 했는데…. 막상 이렇게 앉으니까 눈물이 나네요.”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든 그는 “잊어버릴까봐 준비했다”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글을 읽다가도 몇 번이고 흐르는 눈물을 닦다 목이 메기 일쑤였다.

굳은살 박인 손으로 굵은 눈물 훔치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은퇴 시기가 온다. 많은 선수가 언제, 어떻게 은퇴할지, 은퇴
한 후에 무엇을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한 건 장미란도 마찬가지. 지난해 런던 올림픽을 치른 그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도 “언제 은퇴하느냐”였다.
“런던 올림픽이 끝나고 은퇴해야 하는 분위기로 가서 오기가 생겼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멋있는 모습으로 은퇴해야지 생각하고 선수 생활을 연장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서운함과 아쉬움이 있었고,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훈련을 준비하기도 했죠. 전국체전을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힘들 때는 그만두고 새롭게 시작해야지 싶다가도, 안정적으로 운동만 하면서 누릴 수 있는 것도 많고 좋은 사람들이 많은 그곳에서 나오기 싫었던 것도 같아요. 중요한 건 마음만이 아닌 몸과 마음이 같이 원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장미란, 바벨 내려놓고 여인으로 돌아가다

장미란의 은퇴 기자회견에는 장미란의 부모도 참석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다시 눈가를 훔쳤다. 장미란은 역도 불모지 한국에 꽃을 피워낸 이견 없는 역도 여제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시작으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2005·2006·2007·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여자 역도 최중량급에서 세계 정상을 지켰다.
역도 여제를 막아선 건 현실이라는 적이었다. 런던 올림픽이 열리기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터라 전성기 같지 않은 컨디션이었고 어깨며 무릎, 허리와 팔꿈치 등 성한 곳이 없었다. 부상을 안고 훈련에 임해온 그였기에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한다고 해도 몸이 따라와줄지 자신이 없었던 것. 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나갈지 정리하고 결정을 내리자 아쉬움이 사라졌다”라며 “3개월을 고민했지만 이런 마음이 든 지는 열흘도 채 안 됐다”며 시원섭섭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이제 끝인가 싶었지만, 한편으론 인생의 새로운 2막을 여는 희망을 품자 걱정되고 두렵기만 했던 미래가 큰 기대감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꿈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며 준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선수 생활을 돌아보면 저를 응원해준 많은 분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었어요.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준 가족과 태릉선수촌 식구들이 있어서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었고, 그리운 만큼 소중한 추억이 될 거라 생각해요. 국민 여러분이 런던 올림픽 후에 보내주신 응원과 격려는…, 평생 받을 것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장미란, 바벨 내려놓고 여인으로 돌아가다

1 2 3 어린 시절 장미란은 체력 테스트에서 달리기와 멀리뛰기를 했다 하면 1등이었다. 4 장미란 가족. 왼쪽부터 아버지 장호철 씨, 여동생 장미령 씨, 장미란, 남동생 장유성 씨.



늘 사람 좋게 흐흐 웃던 그였지만 마음고생이 없었으랴. 그는 한참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이날 흘린 눈물은 백 마디 말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바벨을 처음 쥐었을 당시에만 해도 한국에서 역도는 인기 종목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호감’에 가까웠다. 그는 “지금은 국민이 역도와 저를 많이 생각하고 응원해주시는 걸 느낀다”며 “그런 마음에 감사해서 일찍부터 울컥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평소 태릉선수촌 선수들에게 ‘언니’로 통하는 장미란. 인간 장미란의 매력을 묻자 그는 다시 “흐흐흐” 웃으며 “선수들에게 묻는 게 더 정확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2002년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10년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생활했거든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서 친숙한 느낌이 있지 않았나 싶고, 편안하게 생긴 외모도 한몫한 것 같고요. 그 안에서 여러 선수와 교류하며 힘을 얻었어요. 여자 선수하고는 숙소나 사우나에서 이야기하면서 친해졌죠. 잘생긴 남자 후배들이 ‘누나 좋다’면서 밥 사달라 그러면 기분이 좋았고요(웃음). 그게 태릉선수촌에 남도록 동기를 유발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흐흐.”
선수들의 멘토이기도 했던 그가 은퇴한다는 소식에 선수촌 식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서로 어떤 심정인지 잘 알았을 거예요. 많은 선수가 힘든 결정을 했다고 격려해줬죠. 그러고는 저더러 ‘이걸 축하해줘야 하느냐, 같이 슬퍼해야 하느냐’고 묻기에 ‘새롭게 나가는 거니까 축하해달라’고 했어요(웃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역도를 했던 것처럼 열심히 하면 다 해낼 수 있을 거라며 격려해줬는데, 그 말에 자신감을 얻었어요.”

10년 만에 태릉선수촌 떠나는 기분은 시원섭섭
한때는 다른 종목 선수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역도보다 더 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가 역도 선수로서 가진 신체나 능력이 다른 종목이었다면 발휘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다른 선수를 부러워하면 제 훈련이 잘 안 되더라고요. 선수 생활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절제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최선이다 생각했어요. 또한 믿음이 있었기에 힘든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15년의 선수 생활을 돌아보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런던 올림픽 이후. 그는 매 순간이 소중했지만 런던 올림픽을 마치고는 어떤 선수들보다 자신이 많은 사랑을 받는 선수라는 걸 가슴 깊이 느꼈다고.
역도 역사를 새로 쓴 역사(力士)가 남긴 건 ‘기록’이다.
“역도가 숫자로 드러나는 종목이잖아요. 지금은 더 좋은 선수들이 좋은 기록을 내고 있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기록을 내면서 도전한 시간이 기억에 남아요.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고,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를 했다는 게 인생에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죠.”
후배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훈련 과정에서 내 마음대로 훈련되고 연습된다면 어려움은 없겠지만, 부상을 당하거나 원하는 대로 훈련이 진행되지 않으면 정말 힘들어요. 본인들이 잘 알기에 함부로 조언할 수는 없지만, 어떤 고민이 있다면 좋은 것만 생각하고 나아가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거든요. 주어진 훈련 프로그램을 묵묵히 해내다 보면 어느 순간 고비를 넘겼더라고요. 모두들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서 원하는 꿈과 목표를 이루면 좋겠습니다.”
장미란, 바벨 내려놓고 여인으로 돌아가다

5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기뻐하는 장미란. 6 장미란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3차 시기에 실패하고 바벨에 손 키스를 보냈다. 7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인 장미란.



장미란, 바벨 내려놓고 여인으로 돌아가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한 장미란과 가족.



이날 현장에서 딸의 은퇴 기자회견을 묵묵히 바라보던 아버지 장씨는 기자회견을 마친 자리에서 거듭 기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아마추어 역도 선수 출신으로 사업을 하며 원주시 역도연맹 간부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아무 꿈도 없던 중학교 3학년 장미란을 역도의 길로 이끈 주인공이다.
“은퇴 결정을 하고 저보다 아버지께서 아쉬움이 더 크실 거예요. 주변에서도 아버지를 더 위로해드리라는 주문이 많았죠. 그만큼 부모님께서는 저를 안팎으로 도와주셨어요. 운동에만 집중하고 싶은 게 모든 선수들의 바람이거든요. 그런 부분을 아버지께서 대외적으로 많이 도와주셨고, 먹는 문제부터 여러 가지 정신적 문제를 엄마의 헌신과 기도로 이겨낼 수 있었어요. 이제는 저도 선수 생활을 정리하면서 가족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국가대표에서 여인으로, 다시 피는 로즈란
장미란은 소문난 효녀다. 2010년 9월 어머니 이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태릉에서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도 수시로 병원에 들러 어머니를 간호했다. 전국체전이 열리기 바로 전인 같은 해 10월에는 온종일 어머니 곁에서 병간호에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 이씨의 헌신적인 딸 뒷바라지 또한 역도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씨는 학창 시절 딸의 건강을 위해 몇 시간씩 뜨거운 불 앞에서 끓인 곰탕 실력으로 식당을 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덩치가 유난히 커 별명이 ‘날으는 돈가스’였던 장미란은 원래도 몸집이 큰데 역도까지 하게 돼 친구들에게 놀림당할까봐 두려웠다고.
“중학교 3학년때 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외적으로 자신이 없어서 위축돼 있었고 기가 죽어 있었기에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실제로 그런 친구들이 저를 보면서 힘을 얻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많이 보내주곤 하죠. 스스로 역도를 시작한 건 아니지만, 저를 정확하게 평가한 선생님과 부모님의 추천으로 역도를 했잖아요. 청년들이 미래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위해 진지하게 조언해줄 수 있는 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끝까지 역도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날도 없었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이런 그림을 상상도 못했지만, 그런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 좋은 시간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잘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하면 좋겠어요.”
덩치와 달리 수줍음 많던 사춘기 소녀는 어느덧 제 나이에 꼭 맞는 장미 30송이를 받아든 진짜배기 체육인이 돼 있었다. 역도 선수가 돼서 많은 걸 누리고 받았다는 장미란. 그는 앞으로 용인대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하며 장미란재단 활동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다. IOC 위원이 되는 것도 꿈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문대성 IOC 위원이 노력하는 걸 보고, 선하고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저 자리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물론 제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기에, 자격 요건을 갖추고 차분히 준비해나갈 생각이에요.”
170kg의 바벨만큼 무거운 부담감을 내려놓은 그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그는 30대 여성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으로 학교 생활을 꼽았다.
“꿈에 도전하고자 준비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선수 생활을 하느라 누려보지 못한 학교 생활에 충실하려고요. 이제 30대 일반 여성으로 돌아가서는 선수 생활 할 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 이씨는 “서른 살까지는 딸이 선수 생활을 하며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고, 은퇴 후 박사 과정과 어학연수를 하며 하고 싶은 대로 지내다 서른셋에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장미란은 이상형으로 “내가 존경할 수 있고, 후배의 얘기를 들어주듯 내가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을 꼽았다. 은퇴 후엔 다이어트도 하고 예쁜 옷도 입겠다며 배시시 웃던 장미란, 앞으로 3년 뒤 ‘여자’ 장미란이 궁금해진다.

여성동아 2013년 2월 5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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