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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과학원 김인강 교수가 몸으로 증명한 ‘기쁨공식’

소아마비 장애 딛고 세계적인 수학자 된

글·김유림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입력 2011.06.16 16:51:00

행복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돈과 명예를 얻으려 애쓰기 전에 내면에 갇혀 있는 원망과 미움, 분노를 버리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초등학교 입학부터 거부당했던 한 소년.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결과, 촉망받는 수학자로 거듭났다. 이 감동 스토리의 주인공인 고등과학원(KIAS) 김인강 교수에게 그가 직접 증명해낸 ‘기쁨공식’을 들었다.
고등과학원 김인강 교수가 몸으로 증명한 ‘기쁨공식’


세상에는 불굴의 의지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 과정에는 하나같이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가 있다. 서울대 수학과, 미국 버클리대 박사과정을 마친 뒤 카이스트, 서울대를 거쳐 고등과학원(KIAS)에 재직 중인 김인강 교수(44) 또한 높은 역경의 벽을 뛰어넘은 인물이다.
그는 2007년 40세 이하 우수한 과학자에게 주는 ‘젊은 과학자 상’을 받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학자로 거듭났다. 하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안타까운 운명이 버티고 있었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는 삶, 그것이 그가 세상에 태어난 지 두 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가난한 부모는 아들의 치료 시기를 놓쳤고, 결국 그는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비료 부대 위에 엎드려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대를 잡아끌며 흙바닥 위를 다녀야 했던 유년 시절, 그는 어머니의 여윈 등에 엎혀 석양을 바라보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서글프게 지는 석양처럼 평생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 자신에게 일어날 놀라운 일들을 미처 알지 못했을 때 얘기다.
녹음이 자태를 뽐내는 5월 중순, 서울 홍릉에 자리한 고등과학원 캠퍼스에서 김인강 교수를 만났다. 2층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던 그는 얼른 창가에 놓아둔 목발을 짚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교수실 벽면에 걸려 있는 칠판, 그 안에 자유롭게 적혀 있는 수학공식과 문제들을 보니 수학 천재의 삶을 그린 영화 ‘뷰티풀 마인드’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입학 거부당하고 재활원으로
김 교수가 수학과를 택한 데는 고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권유가 큰 힘이 됐다. 육체적으로 힘쓰는 직업은 피해야 했기에 의대나 공대는 자연스럽게 배제됐고 문과, 특히 법대는 사법고시에 합격해도 임용이 어려울 것이 뻔해 그 또한 제외. 생물학이나 화학 역시 위험한 실험이 많으니 몸이 불편한 그에게는 버거운 학문. 그런 그에게 선생님은 “인강아, 너는 수학을 잘하고 또 좋아하니까 서울대 수학과가 어떻겠니?” 하고 권유했다고 한다.
사실 김 교수는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남들처럼 정규 교육 과정을 밟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입학부터 거부당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조차 고된 농사일에 지쳐 술을 마신 날이면 “저런 쓸모없는 놈 제발 좀 갖다버려라” 하며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어린 시절 그에게 친구라고는 병아리들과 강아지, 마당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작은 꽃들이 전부였다.
“바람이 많이 불던 봄이었어요. 시골의 봄은 유난히 쌀쌀하고 황량한데, 저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학교까지 찾아갔지만 끝내 거부당한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이 우셨어요.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저도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훔쳤죠. ‘나는 배울 수 없는 사람이구나.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도 못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에서요. 당시 집 밖으로 혼자 나갈 수 없으니 친구도 없었어요. 대신 책을 많이 읽고, 이런저런 공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가끔 형과 누나가 마실 나갈 때 저를 업거나 자전거 뒤에 태우곤 했는데 그러면 저는 형, 누나들이 친구들과 노는 동안 자전거 위에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했어요. 겨울이면 온몸이 꽁꽁 어는 것처럼 추웠죠.”
그랬던 그에게 인생의 물줄기가 바뀌는 기회가 찾아왔다. 대전에서 혼자 고학하며 어렵게 학교를 마친 둘째 누나가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너 같은 아이들 가는 학교가 있더라. 먹이고 재우고 기술도 가르쳐준대” 하며 재활원을 소개시켜준 것. 열한 살 나이에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결코 안락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아이들이 싸움을 걸어왔고 짠 김치와 마른 단무지를 반찬 삼아 허겁지겁 밥을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는 서글픔에 목이 메었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많이 나요. 재활원은 군대와 비슷했어요. 식사 후 그리고 취침 전 청소를 했고, 콩나물시루 같은 작은 방에서 여섯 명이 함께 잤죠. 일주일에 한 번 재활치료를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시간이었어요. 치료실에 들어가면 뜨거운 팩을 무릎 위에 놓고 20분쯤 살이 벌겋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준비가 되면 치료사 한 분이 어깨를 잡고 다른 치료사가 무지막지하게 힘으로 굳은 다리를 펴기 시작했죠. 목이 쉬어라 울고불고 해도 절대로 봐주지 않았어요. 굳은 다리가 펴져야 보조기를 끼우고 목발을 짚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되기까지 2년이 걸렸어요.”

고등과학원 김인강 교수가 몸으로 증명한 ‘기쁨공식’

2007년 겨울 파리 노트르담성당 앞에서 가족과 함께. 김인강 교수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해외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족과 함께 참석한다.



하지만 공부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늘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김 교수는 “반드시 끝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격려해준 최화복 선생님 덕분에 일반 중학교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선생님은 그를 대전중학교로 보내려 했지만 학교 측은 그를 거부했다. 몇 번이나 찾아가 사정해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결국 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이 학생을 안 받으면 나중에 후회할 겁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대전중학교 이름을 날릴 테니 두고 보세요” 하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의 저도 없을 거예요. 평생을 두고 감사드려도 모자라죠. 어제는 전화만 드렸고(마침 인터뷰 하루 전이 스승의 날이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집에서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어요. 일흔이 넘어 머리도 이제는 백발이신데, 제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시고 많이 뿌듯해하세요.”



사회 모순과 삶에 대한 회의로 힘겨웠던 사춘기
중학교에서 그는 늘 전교 1, 2등을 다투며 상위권을 유지했다. 몸이 불편한 그를 잘 챙겨주는 고마운 친구들도 많았다. 물론 공부는 못하고, 집안도 넉넉하지 못한 친구들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좁은 자취방에서 라면도 끓여 먹고 기타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 그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그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다. 그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 등을 접하며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우리 사회의 모순과 어두운 면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집 옆 동산에서 비를 맞으며 몇 시간씩 혼자 앉아 있거나, 불 꺼진 방에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날이 많았어요. 보다 못한 담임선생님이 카운슬러를 불러와서 저와 면담을 요청하셨는데, 제가 그분께 물었죠. ‘우리가 왜 사는지 아세요?’ 하고요(웃음). 당황하신 그분은 담임선생님께 자신의 능력으로 도울 수 있는 학생이 아니라고 말하고 돌아가셨대요. 지금 생각하면 그분께는 죄송한 마음이 크지만, 당시 제가 고민하던 문제를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었어요. 가치관이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 때였기에 철학적인 질문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고등학교 입학 연합고사에서 만점을 받은 그는 시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충남고에 배정받았다. 이제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지만 공부할 수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TV가 크게 틀어져 있는 안방 한구석에서 밥상을 놓고 공부를 했다.
그렇다고 죽기 살기로 공부만 한 건 아니었다. 학교 수업에 집중했을 뿐 집에 와서는 ‘위대한 개츠비’ ‘노인과 바다’와 같은 영어소설들을 읽었고, 지직거리는 고물 TV를 손으로 툭툭 쳐가며 AFKN을 들었다. 또 주말에 하는 명화극장은 그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 가보지 못한 나라들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줬기에 빠뜨리지 않고 즐겨 봤다. 체력이 약하니 잠도 많이 잘 수밖에 없었다.
“공부 잘하는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밤새워서 공부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오로지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듣고, 책을 많이 읽었죠. 그러면서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많은 질문들과 충돌하고, 철학적인 고민에 빠져 있기도 했고요. 결국 그런 고민은 대학교 3학년이 돼서야 어느 정도 해소됐어요.”
김 교수는 서울대 입학과 동시에 어머니와 함께 신림동 고시촌 지하 단칸방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캠퍼스의 낭만은 뒤로한 채 학업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었다. 특히 매일 강의를 듣기 위해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옮겨 다니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책으로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지고, 목발을 짚으며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것. 그런 고단함 때문이었는지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폐에 구멍이 나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숨을 쉴 때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픈 고통을 느끼며 그는 또다시 회의에 빠져들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캠퍼스 선교단(ESF·기독대학인회) 활동을 하며 신앙을 키워나갔지만, 새로 맞닥뜨린 시련 앞에서 그는 또다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퇴원하고 일 년 가까이 반지하방에 누워 있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어요. 대학에 와서도 몸이 아파 누워만 있어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났던 거죠. 또 중학교 때부터 해결하지 못했던 의문 들, 기아·가난·억압… 이 원인 모를 고통들에 대한 분노가 커지더라고요. ‘도대체 산다는 건 무엇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고 나에게, 그리고 세상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시는 걸까.’ 많은 물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어요.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신앙에 의지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고, 결국 ‘내가 겪은 아픔을 통해 또 다른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보듬는 것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해답을 얻었어요. 그때부터 정말 거짓말처럼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어요. ‘그만큼 슬퍼했으면 됐다. 이제부터는 나를 평온한 삶에 놓아두자’하는 자기애도 생겼고요. 결국 신앙은 제 인생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됐어요.”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만난 사랑

고등과학원 김인강 교수가 몸으로 증명한 ‘기쁨공식’


그 일을 계기로 한층 밝은 모습으로 대학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서울대 전체 차석으로 졸업한 뒤,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운 사랑도 찾았다. 대학 선교단에서 함께 활동하며 친하게 지낸 한 선배 누나로부터 지금의 아내, 박희령씨를 소개받은 것. 당시 독일 쾰른에서 유학 중이던 그 누나는 어느 날 그에게 ‘첼로를 전공하는 아주 좋은 자매가 있으니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격려해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김 교수는 기쁜 마음에 바로 답장을 보냈고, 이후 두 사람의 순수한 교제가 시작됐다.
“둘 다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많은 위로가 됐어요. 편지 내용은 주로 신앙, 교회, 주위 사람들 등 일상에 대한 거였는데, 아내의 편지는 착하고 겸손했어요(웃음). 기쁠 때나 힘들 때나 편지에 각자의 생각과 기도를 담아 보냈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내면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은 지 5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김 교수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드디어 박씨를 만나기로 한 것. 친구와 함께 파리를 찾은 박씨는 밝고 따뜻한 모습으로 그를 가족처럼 자연스럽게 대했고, 김 교수는 이날 박씨와 함께 샹젤리제 거리를 걷고, 에펠탑에 올라가면서 속으로 ‘부디 이 여인이 나의 반쪽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해 결혼했다. 박씨 부모의 반대가 있었을 법하지만, 김 교수의 장인 장모는 딸의 의견을 존중해 그를 사위로 따뜻하게 맞아줬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그는 보통 남편들에 비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장을 볼 때도 아내가 카트를 밀어야 하고, 천장에 있는 형광등을 갈 때도, 못질을 할 때도 다 아내가 팔을 걷어붙인다. 하다못해 아이를 안고 얼러줄 수도 없는 그는 늘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그렇지만 현재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건우와 네 살배기 딸 하린이에게는 최선을 다해 아빠 노릇을 하고 있다.
“책을 많이 읽어주고 박물관이나 콘서트에도 자주 데리고 가요. 건우는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놀이터에서 해가 질 때까지 마음껏 뛰어노는 개구쟁이인데,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아이들이 편하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아빠가 되면 좋겠는데, 그래도 훈육이 필요할 때는 매를 들어요. 학교에서의 체벌은 반대지만 부모가 아이 교육을 위해 종아리를 때리는 건 찬성하기 때문에 저희 집 냉장고 위에는 항상 회초리가 놓여 있어요(웃음).”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 조금 불편한 삶을 살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김인강 교수. 최근 그는 유년시절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며 겪은 자신의 일화를 책으로 펴냈다. 자서전 ‘기쁨공식’(좋은씨앗)에서 그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공식들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다 달라요. 하지만 분명한 건 어떤 인생이든 시작과 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 인생이 싫든 좋든 상관하지 말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아름답게 인생을 일궈내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특히 어려운 인생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더요.”

여성동아 2011년 6월 5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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