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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프라이버시 인터뷰

홍순창 인생 고백

‘거침없이 하이킥’ ‘굿굿굿~ 교감’으로 뒤늦게 인기!

글·송화선 기자 / 사진·성종윤‘프리랜서’

2008. 09. 17

지난해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풍파고 교감 역을 맡아 ‘굿굿굿이에요~’라는 유행어로 큰 인기를 모은 탤런트 홍순창. 그를 만나 환한 웃음 뒤에 감춰진 40여 년 무명 연기자로서의 삶과 불의의 사고로 딸을 잃은 가슴 아픈 사연에 대해 들었다.

홍순창 인생 고백

가수의 삶은 그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간다는 속설이 있다. 탤런트 홍순창(61)을 보면, 연기자의 삶 역시 자신이 맡은 배역을 따라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인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아주 굿이에요. 굿굿굿~”이라는 유행어를 히트시킨 뒤, ‘굿~굿~굿~’이 이어지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홍순창이 맡은 역할은 나쁜 상황이 생길 때마다 반어법을 구사하며 ‘굿굿굿~’을 외치는 엉뚱한 교감선생님. 지각한 교사에게는 “아주 출근정신이 투철해요. 굿굿굿~이에요”를, 화려한 옷을 입고 출근한 교사에게는 “우리 검소한 이 선생님, 굿굿굿~이에요”를 외쳤다. 홍순창은 이 연기를 통해 연기인생 40여 년 만에 비로소 ‘홍순창’이라는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각인시켰고, 이후 비로소 일일 아침드라마에서 고정 배역을 맡는 배우가 됐다.
“73년 MBC 공채 6기로 브라운관에 데뷔했으니 방송 경력만 36년째네요. 실제로는 서라벌예고 2학년 때부터 무대에 섰고, 탤런트가 되기 전 연극계에서는 꽤 알려진 배우였어요. 그때부터 따지면 한 40년 만에 무명에서 벗어난 거죠(웃음). 평생 한눈팔지 않고 연기자로만 살아왔는데, 늦게나마 이렇게 이름을 알리게 돼 신기하고 감사해요.”
홍순창 인생 고백

현재 MBC 아침드라마 ‘흔들리지 마’에서 주인공 홍은희의 할아버지 ‘이봉필’ 역을 맡고 있는 그는 “이렇게 자기 이름이 있고 매회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배역을 맡는 게 내게는 참 드문 일이었다”며 “평생을 오늘 취직했다가 내일이면 해고당하는 일용직 노동자처럼 살았다”고 고백했다.
“처음 TV에 데뷔했을 때부터 배역 이름이 주로 A, B, C였어요. F까지 한 적도 있고요(웃음). 가끔 단막극에서 비중 있는 역을 맡은 적도 있지만, 그것도 다음을 기약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난 모든 배역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했어요. 작품마다 ‘이게 내 은퇴작이구나’ ‘이 대사가 내 마지막 대사구나’ 생각했고요. 그러니 한 마디를 하든 두 마디를 하든 절실해지더라고요. 그 덕분에 이렇게 볼품없는 외모로도 연예계에서 40년 넘게 연기생활을 할 수 있었죠(웃음).”
그의 출세작이 된 ‘거침없이 하이킥’의 교감선생님 역도 처음에는 비중 없는 단역이었다고 한다. 시트콤이 시작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극중 배경이 되는 학교가 방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동안만 1주일에 1~2번씩 출연하기로 돼 있었다고. 그런데 대사 한 마디도 허술히 하지 않는 그의 연기가 ‘굿~굿~굿~’이라는 공전의 유행어를 만들어내면서 점점 비중이 늘어나 결국은 시트콤이 끝날 때까지 준주연급으로 출연을 이어갔다.

“‘거침없이 하이킥’은 제 인생에 찾아온 세 번째 기회였어요”
“사람의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는데 ‘거침없이 하이킥’은 내게 찾아온 세 번째 기회였던 것 같아요. 그전에 왔던 두 번은 부족해 놓쳤지만, 이번만큼은 꽉 잡았죠.”
홍순창의 삶에서 첫 번째 기회는 지난 67년 찾아왔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극단에서 연극 ‘파우스트’의 숫원숭이 역을 맡았는데 대사가 단 세 마디에 불과한 단역이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 것. 홍순창은 3~4일간 동물원에 살다시피 하며 원숭이의 움직임을 관찰해 흉내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선배들한테 ‘아주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어요. 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낸 원로연극인인 박진 선생님이 ‘넌 되겠다’며 저를 양아들 삼겠다고 할 정도였죠. 관객 반응도 뜨거워서, 공연이 시작될 때만 해도 프로그램에조차 소개가 안돼 있던 제 이름이 국립극장에서 앙코르 공연할 때는 플래카드 위에 딱 올라가 있었어요(웃음).”
스무 살 혈기왕성하던 그는 곧 기고만장해졌고, 연극 종방연 날 만취해서 연극계 원로와 선배들 앞에서 거드름을 피웠다고 한다. 마치 자신이 대스타라도 된 양 행동한 것이다. 그 실수의 결과는 뼈아팠다. 홍순창은 자신이 상상한 정상의 자리에서 바닥으로 추락했고, 극단을 떠나 이듬해 입대해야 했다.
“두 번째 기회 역시 연극에서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거침없이 하이킥’의 홍순창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제가 생각하는 대표작은 연극 ‘수전노’예요. 72년 극작가 몰리에르 탄생 3백50주년 기념으로 공연한 작품인데, 우리나라에 프랑스 극단 관계자들까지 건너와 함께 한 연극이었어요. 주인공은 탤런트 박근형씨가 맡고, 나는 비중 있는 조역을 했죠.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제 연기를 보고 정말 좋아하는 겁니다. 체재비와 학비를 모두 댈 테니 비행기표만 마련해 프랑스로 유학을 오라고 했어요.”
그러나 가난한 연극배우였던 그는 프랑스행 비행기 삯을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극단 대표가 어떻게든 표를 구해주겠노라 약속했지만, 그조차 유야무야되면서 홍순창의 유학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연극계에서 잇달아 좌절을 맛본 그는 73년 MBC 공채로 브라운관에 데뷔해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당시 그의 동기생은 유인촌·임채무·오미연 등. 쟁쟁한 주연배우들 사이에서 홍순창은 이후 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다.

“연극은 무대가 좁고 배역 하나하나마다 임팩트가 있으니까 조역도 잘만 하면 눈길을 끌 수 있어요. 하지만 TV 시청자는 주인공만 보잖아요. 주인공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게 드라마의 속성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애당초 주인공을 할 수 없게 타고난 사람인 거라. 작은 키, 못난 얼굴, 가는 목소리…. 이런 사람이 주인공을 하면 누가 그 작품을 보겠어요?(웃음) 저 스스로 그런 한계를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시샘하거나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요. 다만 제게 주어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 했을 뿐이죠.”
한순간도 화려하게 빛나지 못하고 언제나 다음 캐스팅을 걱정해야 하는 무명 배우로서의 삶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홍순창은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런 적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에게 연기는 “취미이자 생업이고 생활이며, 자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히려 늘 이것이 내가 하는 마지막 연기가 될까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작품에 캐스팅되면 만사 제쳐놓고 그것에만 몰두했죠. 뇌경색에 걸려 의사가 당장 입원해야 한다고 했을 때도 병을 감추고 촬영장에 나갔어요. 한 번 밀려나면 다시는 배역을 받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웁니까. 아파도 안 아픈 척, 힘들어도 안 힘든 척, 그렇게 살았어요. 그렇게 연기가 좋았습니다.”
홍순창이 그토록 사랑하는 연기를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때는 인생에서 단 한 번, 딸의 죽음을 겪었을 때뿐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택을 공개했다가, 앨범에 들어 있던 사진 한 장 때문에 아픈 가족사를 고백해야 했다. 평생 마음 속에 묻어두려 했던 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였다.
“지금 우리 식구가 세 명입니다. 저와 집사람, 아들. 그런데 실은 아들 위로 딸이 하나 더 있었어요. 아주 예쁘고 착하고,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이였죠.”
그런데 20여 년 전 어느 겨울 날, 일곱 살배기 딸이 갑자기 떼를 썼다고 한다. 당시 그는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매일 밤 장모와 딸은 안방에서, 자신과 아내·아들은 건넌방에서 잠을 이뤘다. 그런데 그날따라 딸이 건넌방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이다.
“참 말을 잘 듣는 아이였는데 왜 그렇게 울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도 울기에 하는 수 없이 건넌방에 뉘여 재우고, 저와 집사람·막내는 안방으로 갔죠.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갑자기 집사람이 건넌방에서 저를 부르더군요. 놀라서 달려가니 장모님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계셨어요.”
그때만 해도 홍순창 부부는 장모에게만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고 한다. 딸은 기척 없이 누워 있어 잘 자고 있는 줄만 알았다고. 그런데 장모를 응급실로 옮기기 위해 딸을 깨우려고 보니 아이가 싸늘했다. 알고 보니 보일러와 가까운 쪽이었던 건넌방에 연탄가스가 스며들어 밤새 가스를 마시고 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며 홍순창은 끝내 눈물을 떨궜다.
“지금도 그날 밤 아이가 울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그냥 안방에서 자라는데 왜 그렇게 울던지…. 그 소리가 이젠 ‘아빠, 나 아빠랑 엄마, 동생 살리고 싶어. 제발 나 좀 먼저 가게 해줘’ 하던 걸로 들려요. 응급실에 달려가 아이가 죽었다는 걸 확인했을 때는, 나도 그냥 따라 죽고 싶었죠.”

“가족 살리기 위해 먼길 떠난 딸, 그 죽음의 의미 생각하며 더 열심히 살아갑니다”
특히 딸이 자신을 대신해 죽음을 맞은 것 같다는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목숨을 끊기 위해 한강 다리에 올라가고, 포항 앞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물에 빠지면 살기 위해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에 더 큰 절망을 느꼈다고.
홍순창 인생 고백

최근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온 홍순창 가족. 홍순창은 가족들의 사랑과 격려가 있어 40여 년간 무명 배우로 살았어도 늘 행복했다고 말했다.


“살겠다는 욕망 때문에 죽지도 못하면서 말로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고 있는 제가 혐오스러웠어요. 그때 정신을 차렸죠. 우리 딸은 세 식구 살리려고 먼저 갔는데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살아야 한다면 제대로 살자. 딸 앞에 부끄럽지 않게 더 열심히 살자고 마음먹었죠.”
경기도 분당의 한 대형병원에서 간호과장으로 일하는 아내의 한결같은 믿음도 그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평생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의 곁을 든든히 지켜준 아내는, 단 한 번도 홍순창이 무명 배우라는 사실에 대해 타박한 적 없다고 한다. 딸을 잃은 고통의 순간에도 눈물을 감추고 괴로워하는 남편을 위로했다고. 홍순창은 자신보다 더 마음 아플 아내와 먼저 떠난 딸을 위해 그때부터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살다 보면 가끔 나쁜 짓을 하고 싶을 때가 있죠.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 ‘아빠 잘 살아야 돼.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 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거기서 우리 딸이 날 내려다보다가 ‘아빠 그렇게 살면 내가 먼저 죽은 게 억울하잖아’ 하면 어떡해요.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그 아이가 내 인생의 길잡이를 해주고 있어요.”
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는 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은 홍순창이 배우로서 더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남은 꿈은 앞으로도 딸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리고 건강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배우’로 연기하는 것이다.
“가끔 제게 앞으로 무슨 배역을 맡고 싶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욕심나는 배역이 없습니다. 연기 자체에만 욕심이 나죠. 저한테 무슨 역이든, 역할이 주어지기만 하면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래서 한순간 스쳐 지나가더라도 브라운관을 꽉 채우는, 정말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제 욕심이고, 제가 맡고 싶은 배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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