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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행복한 이 남자

이승철 재혼 후 첫 인터뷰

기획·김명희 기자 / 글·최승현‘조선일보 기자’ / 사진·여성동아 사진파트

2007. 11. 23

올초 두 살 연상의 사업가와 재혼한 가수 이승철이 최근 새 앨범을 들고 돌아왔다. 지난 3개월간 미국에서 아내, 딸과 음반작업을 하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그를 만나 어느새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의미로 자리 잡은 가족과 음악 이야기를 들었다.

이승철 재혼 후 첫 인터뷰

“딸이 다 커서 저한테 왔어요. 처음에는 좀 서먹한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내고 있죠.”
요즘 가수 이승철(41)의 낙(樂)은 무엇일까. 노래, 공연, 팬들의 함성…. 엇나간 예측이다. 그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등교하는 딸(14)을 배웅하는 맛에 산다”고 말했다. 지난 1월, 두 살 연상의 사업가 박현정씨와 재혼한 뒤 얻게 된 ‘다 큰’ 딸. 최근 발표한 그의 9집 앨범 ‘더 시크릿 오브 컬러 2’에서 느껴지는 풍성한 여유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녹음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행복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LA에서 보낸 지난 3개월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가족이라는 존재가 그를 늘 웃게 만들었다는 것.
“할리우드에 20평짜리 아파트를 얻어서 세 식구가 같이 살았어요. 시간 날 때마다 테라스에 와이프와 둘이 앉아 와인 마시고 별 보며 그날 녹음한 제 노래를 함께 들으면서 행복이 뭔지 알았죠. 딸은 미술에 재능이 많아서 뮤직 비디오 만드는 데 한몫했어요. ‘사랑한다’ 뮤직 비디오를 보더니 ‘앞부분이 지루하다. 나라면 채널을 돌렸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도 계속 보면서 뭔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딸의 그 한마디에 무릎을 치게 되더라고요. 당연히 그 말에 따라 구성을 바꿨죠.”
결혼 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사업을 했던 박씨는 결혼 후 남편 뒷바라지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이승철은 “이번 앨범에 특히 미국 뮤지션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아내가 없었더라면 그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싶다”며 “통역사가 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아내가 중간에서 내 의사와 그쪽 의사를 잘 전달해줬다”고 말했다.
“사업을 크게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제 회사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단번에 간파해서 잘 해결해주고 있어요. 든든하죠.”
박씨는 인터뷰가 있던 날도 수수한 옷차림으로 이승철의 앨범 홍보 마무리 작업을 돕고 있었다. 이승철은 그런 환경에서 나온 이번 앨범에 크게 만족한다고 말했다.
“명품 소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시대가 워낙 급변해서 이게 CD 형태로 발표되는 제 마지막 앨범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작업에 임했죠. 날마다 쏟아지는 인스턴트식품 같은 음악과는 정반대의 보수적이고 고집스러운 노래를 불렀어요.”
타이틀곡 ‘사랑한다’와 ‘더 사랑하니까’는 이승철의 매끈한 음성과 고저(高低) 뚜렷한 선율이 어우러진 대중적 발라드. 하지만 앨범은 총천연색이다. 강렬한 리듬과 랩을 앞세운 ‘파트 타임 러버’, 재즈의 향기가 물씬한 ‘아무 말도’ ‘하고 싶은 말’ 등 다채롭다. 네 번째 트랙 ‘프러포즈’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힘찬 록 스타일로 타이틀곡 이상의 대중적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이승철은 딸이 수영장에서 또래 소년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이 곡의 가사를 썼다고 한다.
이번 앨범은 그가 90년대 냈던 ‘색깔 속의 비밀’의 속편에 해당한다. 그 당시에도 이승철은 앨범 작업을 뉴욕에서 했었다고.
“그때 미국에서 정말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고 한국에 왔는데, 비행기에서 내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다 보니까 갑자기 의구심이 드는 거예요. 아, 이 노래들이 한국의 풍광과 과연 잘 어울리는 것일까 하고요. 고급스럽지만, 대중적으로는 호응을 얻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생겼죠.”
“당신도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더 유명해지지 않았겠냐?”고 하자, 고개를 흔들며 웃는다.
“방황 내지는 방랑하다가 죽지 않았을까요? 하하. 너무 자유로운 나라라서, 저는 어쩌면 빨리 망가졌을 것 같아요. 노래 하나만 히트하면 방대한 시장과 만나게 되니까 두려움이 컸을 수도 있었겠죠.”

“지금 제 인생은 순풍에 돛 달고 가는 중이에요”
80년대 록 밴드 ‘부활’의 보컬로 데뷔한 이승철. 불혹을 넘어서도 그는 해마다 전성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하다. 그는 “가수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도 의미 있지만 버리는 타이밍도 중요하다”고 했다.
“괜히 노래 좀 한다고 폼 잡지 않고, 어깨 힘 빼니까 ‘대박’이 나더라고요. 저는 자신을 깨고, 자꾸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대중적인 노래를 만들어야 하고요.”
그는 콘서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콘서트 선두주자로서 해외의 좋은 콘서트 문화를 앞장서서 한국에 들여오고, 뭔가 새로운 무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할 때가 많다”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콘서트 시작하기 3시간 전부터 공연장 주변에서 음식을 팔아요. 스테이크부터 와인까지요. 야외에서 그런 음식 먹으면 얼마나 좋아요. 우리나라는 공연 직전 입장해서 부리나케 보고, 또 끝나면 우르르 나가고 그러잖아요. 좀 여유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크리스마스 공연 때는 음식 같은 것을 팬들에게 제공하려고 해요.”
선배가수인 고 김현식과 조용필, 에릭 클랩튼과 데이비드 커버데일을 존경한다는 그는 자신의 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글쎄요, 그걸 잘 모르겠어요(웃음). 저는 노래를 한 곡 녹음하기 위해 1천번 가까이 노래를 들어요. 처음에 곡을 받으면 멜로디가 좋아서 자꾸 듣게 되고, 연습하는 동안 몇 백 번 또 듣게 되고, 녹음 마치고 나면 편곡하면서 또 자꾸 듣게 되거든요. 그런데 재밌는 건, 그렇게 계속 듣다 보면 노래의 단점을 알지 못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녹음하고 일주일쯤 지나면 하나 둘 아쉬운 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신기하죠. 결국 자기 자신이 100% 완벽하게 만족하는 앨범을 만들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는 “지금 제 인생은 순풍에 돛 달고 가는 중”이라고 했다.
“일단 가정이 안정되고, 또 ‘이승철’이라는 이름을 걸고 음악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대예요. 제가 80~90년대 활동할 때 생겼던 팬들이 지금은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런저런 부분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공연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그럴 때 가장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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