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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오랜만입니다

3년간 칩거하며 장편소설 ‘대발해’ 펴낸 작가 김홍신

기획·김명희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2007. 08. 22

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작가 김홍신씨. 최근 장편소설 ‘대발해’를 들고 독자들 곁을 다시 찾은 그가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떨어진 후 아내와 사별하고 소설쓰기에만 몰두했던 지난 3년에 대해 들려주었다.

3년간 칩거하며 장편소설 ‘대발해’ 펴낸 작가 김홍신

작가 김홍신씨(60)는 요즘 불면증이 심해 밤마다 술 한 잔을 마시고야 잠이 든다고 한다. 총 10권, 원고지로 1만2천 장 분량의 대하소설 ‘대발해’를 탈고한 것이 지난해 말. 하지만 아직도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젓고 다닌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쳐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반짝 떠오르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서재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 그냥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잊어버릴까봐서다. 메모를 시작하다 보면 잠이 천리만리 달아나고 침대에서 책상 사이를 서성거리다 결국 포도주 한 잔을 컵에 따르면 시간은 새벽 3, 4시가 돼 있기 일쑤라고.
“술을 자꾸 마시다 보니 양이 점점 늘어 걱정이었는데 아는 분이 소주와 포도주 중간 도수의 포도주가 있다고 가르쳐줘서 요즘 그걸 즐겨 마시고 있어요. 도수가 세야 양을 줄일 수 있으니까요.”

집필에 몰두하는 동안 불면증, 오른팔 마비, 탈모 증세로 고생
새벽녘에야 잠들고 오전 11시쯤 일어나는 생활은 2005년 여름 ‘대발해’ 집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매일 낮 12시30분이면 책상에 앉아 새벽 3시까지 꼬박 글을 썼다고.
“새벽 3시가 넘으면 글이 잘 안 써져요. 이번에 교정보느라 다시 읽어보니 역시 안 써질 때 쓴 글은 문장도 스토리도 안 좋더라고요. 그걸 다시 손보느라 출판사와 신경전깨나 벌였죠(웃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가더니 원고를 쓴 노트 마지막 권을 꺼내와 펼쳐 보여주었다. “12월7일 02시 54분. 아아! 드디어 끝내다. 내 영혼을 깨워 흔들며”라고 써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그 순간의 감동이 다시 떠오르는지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가슴이 벅차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밤중에 밖으로 나섰습니다. 설악산에 가고 싶었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그대로 산에 가면 발을 헛디뎌 사고가 날 것 같았어요.”
그때의 심정은 꼭 행복만은 아니었다고. 한편으로 무진장 행복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리고 고통스러워 “마치 몸을 반으로 딱 잘라 나눈 것” 같았다고 한다.
예순 나이에 매일 12시간씩 글을 써댔으니 몸이 온전할 리 없다. 오른쪽 손목부터 시작된 마비가 팔 전체와 어깨로 번졌다. 자다가 팔이 눌리면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정도였다. 컴퓨터로 글을 쓰지 않는 그에게는 하루 종일 만년필을 잡고 손에 힘을 주어가며 글을 쓰는 일이 더욱 고된 노동이다.

3년간 칩거하며 장편소설 ‘대발해’ 펴낸 작가 김홍신

“국회의원 그만두고 나서 홈페이지 관리한다고 잠시 타자를 연습해본 적 있어요. 옆에서 딸아이가 ‘아빠, 자판 보지 말고 화면 보고 치세요’라고 조언을 해줬지만 처음이라 자판을 안 볼 수 없잖아요. 그러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만뒀어요.”
오른팔에 온 마비증세는 정형외과·한의원·물리치료원 등 온갖 병원을 다 다녀도 효과가 없었는데 운동선수들이 부상 당하면 맞는다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니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고.
“두 달은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행복하게 두 달을 보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증세가 다시 시작되더군요.”
주사를 계속 맞고 싶었지만 의사는 계속 맞으면 근육이 손상된다며 만류했다. 이후 용하다고 소문난 한의원을 찾아다니기도 여러 번. 지금도 “옷 벗으면 침에, 뜸에, 부황 자국이 말도 못한다”고 했다.
81년에 발표, 우리나라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기록된 장편소설 ‘인간시장’ 외에도 그는 지금껏 소설 30여 편을 포함해 1백여 권의 책을 펴냈다. 그런 그도 이번처럼 몸을 혹사해가며 글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설을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한다.

“잃었던 발해 역사 복원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 높이고 싶었어요”
“처음 목표는 원고지 1만 장을 써서 12권으로 내는 거였어요. 출판사에서는 9천 장만 써서 10권으로 내자고 했어요. 엄청난 양을 써야 하고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데 제가 정치활동하던 사람이다 보니 여기저기 연락 오는 데가 너무 많았어요.”
모임도 행사도 식사 초대도 다 거절하고 두문불출 집안에 앉아 글만 썼다. 온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시력이 나빠지고 피부에는 알레르기가 돋고 머리칼도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입에서 “불쌍해서 못 보겠다”는 말이 나왔고 통 바깥 외출을 않는 그의 안부가 궁금한 사람들이 무작정 집으로 찾아왔다가 꺼칠해진 몰골을 보고 혀를 찼다.
“사람 노릇 못하고” 자기 몸을 너무 학대해 “체형이 변하는 벌”을 받으면서까지 그에게 있어서 발해의 역사를 소설로 쓰겠다는 약속은 처절했다. 왜?
“당신과 내가 연애를 했다고 칩시다. 당신이 보기에 내가 너무 싹수없고 이기적인 남자라서 헤어지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런데 나는 집에 와 일기장에 당신이 나쁜 여자라 내가 걷어찼다고 씁니다. 세월이 지나고 남는 건 일기장에 쓴 글뿐이겠죠. 지금 중국의 역사 왜곡이 바로 그런 식이에요.”

3년간 칩거하며 장편소설 ‘대발해’ 펴낸 작가 김홍신

이대로 두면 2백29년간 존속했고, 더구나 강대국이었던 발해의 역사가 한낱 중국의 변방사로 전락해버릴 조짐을 그는 10여 년 전부터 감지했다고 한다.
“중국은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자기들만 위대하고 다른 민족들은 보잘것없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중화사상을 바탕에 깔고 모든 역사를 기술하고 있어요. 더 답답한 것은 우리 역사학에서마저 그런 중국식 관점을 답습했다는 겁니다.”
그는 정말 울화통이 치밀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우리 학자들이, 중국에서 보낸 서신을 ‘하라’체로, 우리가 보낸 서신은 ‘하옵소서’체로 번역하다니 한심하지 않느냐”고 개탄했다.
“중국은 발해사를 말갈족 역사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중국 지도에서 해마다 발해 영토가 줄어들고 있어요.”
하지만 잃어버린 발해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유적도 유물도 거의 남지 않은 발해의 흥망성쇠를 아득한 1천5백 년 전의 과거에서 불러내기 위해 그는 발해의 영토가 있던 중국·러시아 등지를 샅샅이 답사하며 사료를 모으고 역사학자·설화 전문가를 두루 만났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창업한 동모산은 10여 년 전부터 출입이 봉쇄돼 있었지만 운 좋게 오를 수 있었고 러시아의 한 박물관에서 발해 기왓장 몇 점을 들고 올 수 있었다. 발해와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선이 다니던 뱃길을 따라 직접 배를 운전해보기도 했다.
책을 읽은 사람들로부터 “없어졌던 발해 12대 황제의 역사를 살려내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들을 때가 그에게는 지난 3년 세월의 고생이 다 잊히는 보람을 느낄 때다.



일에만 매달려 사느라 아내 살아생전 자상한 말 한마디 못한 게 가슴에 맺혀
이렇게 큰 보람과 가슴 벅찬 성취감을 안겨준 소설 ‘대발해’를 완성할 수 있었으니 3년 전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게 “정말 잘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96년에서 2003년까지 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지난 2004년 서울 종로에서 출마했다가 5백여 표 근소한 차이로 떨어졌다. 사실 당시 그는 출마할 여건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가 위독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 지병이던 천식이 기관지로 번져 심장에까지 이른 상태였다.
“아이들 엄마는 이미 산소호흡기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제가 병실에 찾아가서 물었어요. ‘여보, 나더러 종로에 출마하래. 어떡할까? 나갈까?’ 그랬더니 의식 없이 누워 있던 아내가 눈을 뜨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감아요. 내 속에 출마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지 그걸 아내의 승낙이라고 믿고 결국 선거에 나갔죠.”
그의 아내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그해 4월, 49세를 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났다. “국회에서 일하는 동안 의원회관 한 번 찾아온 적 없고 전화는 딱 네 번 했던 사람”이라며 그는 잠시 아내 생각에 잠겼다.
“원래 몸이 허약해서 아이들 학교에도 제대로 못 갔던 사람이었는데 작가 남편 만나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죠.”
사람들은 그가 소설 ‘인간시장’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뛰어오르고 부와 명성을 얻은 외형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가 가족들에게는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고난의 시절이었다고 한다. 사회 곳곳의 비리를 폭로하고 공격한 소설 때문에 그의 집에는 하루가 멀게 협박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식구들이 같이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와요. 아이들이 전화를 받으면 ‘너희 아버지 가만 안 둔다. 어쩌고…’ 하는 내용이죠.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전화 한참 받다가 와서 밥 한 술 먹고 계속 그 전화를 받아요. 끊어봐야 또 올테니까요.”
다짜고짜 집에 날아 들어오던 돌덩이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협박전화도 참아 넘기던 아내였다. 하지만 ‘아이들을 납치하겠다’는 전화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짐을 싸 아이들을 데리고 그에게는 말도 없이 시골로 도망가버렸다는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빛에는 짠한 그리움이 어렸다. 그는 일에만 매달려 사느라 아내에게 자상하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아들이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언제부턴가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해요. 사람들로부터 ‘너희 아버지 존경스러운 분’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대요.”
요즘 그는 딸(24)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취업 준비 중인 아들(28)과 둘이 살고 있는데, 그동안 떨어진 체력을 보강하느라 매일 산을 찾는다고 한다.
“원고를 다 썼다고 하니 아들 말이, ‘아버지 이제부터는 좋은 사람도 만나시고 재미나게 사시라’는 겁니다. 우리 아이들은 나 재혼하기 전에는 결혼 안 하겠대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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