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정희순
입력 2018.06.07 18:01:07
제71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젊은 청춘의 방황과 분노를 통해 현시대의 어둠을 들여다보는 영화 ‘버닝’은 관객이 ‘버닝’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제71회 칸국제영화제(5월 8~19일) 경쟁 부문에 출품됐다. 이번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 영화다. 지난 5월 16일 칸 현지에서 공개된 직후 평단의 반응은 뜨거웠다. 티에리 프리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대단하고, 훌륭하며 강한 영화”라고 평했고, 세계 각국의 영화 매체들은 잇달아 최고점을 내놓으며 찬사를 보냈다.
더군다나 이창동 감독은 칸국제영화제와 유달리 인연이 깊다. 2000년 ‘박하사탕’이 감독주간에 소개된 데 이어 2003년 ‘오아시스’가 비평가협회 특별초청작으로 상영됐다, ‘밀양’은 2007년 배우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줬고, 그 자신은 2010년 ‘시’로 각본상을 수상했다. 2009년엔 제62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을, 2011년 제64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심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영화 ‘버닝’에 대한 수상 기대감이 컸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안타깝게도 ‘버닝’은 황금종려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빈손’은 아니었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이 수여하는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고, 신점희 미술감독은 벌칸상을 받았다. 벌칸상은 공식 초청작 중 가장 기술적 성취가 뛰어난 아티스트를 선정해서 수여하는 상이다. 한국 영화인이 벌칸상을 수상한 것은 제69회 ‘아가씨(박찬욱 감독)’의 류성희 미술감독에 이어 두 번째다.
‘분노’와 ‘미스터리’. 영화 ‘버닝’의 주요한 골자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이번 영화에 한국적인 색채를 담았다는 것이 이창동 감독의 설명이다. 이창동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을 관객에게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면 된다”고.
#SNS보다 스크린에서 멋진 유아인

영화는 줄곧 종수의 시선을 따라간다.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무기력하다. 표정은 메말라 있고, 걸음걸이는 맥이 없다. 그를 비추는 카메라 앵글도 흔들린다. 유통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종수의 꿈은 소설가. 하지만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어린 시절 친구 해미가 나타나고 해미는 그에게 또 다른 남자 벤을 소개한다. 자신과는 대척점에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 벤을 보며 그의 무력감은 더 깊어져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수의 무력감은 의심으로, 의심은 분노로 치닫는다. 유아인은 그런 종수의 감정 변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준 배우 유아인의 대표작은 ‘사도’(2015)와 ‘베테랑’(2015)이다. 그해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유아인은 ‘천의 얼굴’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톱 남자 배우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3년 전 유아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지난 5월 4일 기자간담회에서 “‘버닝’의 작업은 강박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비교적 많은 작품을 소화하면서 표현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천의 얼굴’ ‘유려한 연기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나. 나 또한 잘하고 싶어서 애쓰고 안달하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버닝’에서는 표현의 강박과 관성에서 벗어나서 연기했다. 느낌 위주로, 있는 그대로, 사실에 가깝게, 해석의 여지를 크게 열어주는 연기를 해내는 게 이번 영화의 과제였다”고 말했다. 비록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진 못했지만, 유아인의 연기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SNS보다 스크린에서 만나는 유아인이 더 매력적이다.
#좋아요? 스티븐 연

하지만 그는 영화 ‘버닝’이 언론에 공개되기 직전 구설에 휘말렸다. 영화 ‘메이헴’으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조 린치 감독의 SNS에 ‘좋아요’를 누른 것이 화근이었다. 이유는 해당 사진이 욱일기가 프린트된 옷을 입은 소년의 사진이었기 때문. 비난이 일자 그는 국문 버전과 영문 버전으로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논란을 더 키웠다. ‘죄송하다’고 사과한 국문 버전과 달리 영문 버전에선 ‘이것 하나로 나를 판단한다’며 아쉽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한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나서 “진심어린 반성이 아니다”라며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에 그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하지만 국내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급기야 ‘버닝’ 관람을 보이콧 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행히 이런 논란은 영화가 공개된 이후 잠잠해진 모양새다. 영화 ‘옥자’에선 영어로 연기했던 그는 이번 영화 ‘버닝’에서 100% 한국어로 연기한다. 우리말 대본을 친구의 목소리로 녹음한 뒤 듣고 외우기를 반복했다는 후문이다. 그가 맡은 역할은 미스터리한 남자 벤. 벤은 관대한 성격에 여유까지 갖춘, 금수저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벤은 스스럼없이 대마를 피운다. 종수에게 “두 달에 한 번씩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종수의 의심에도 그는 긴장하거나 당황하는 법이 없다. 관객은 벤이 품고 있는 진실을 알 방법이 없다. 비닐하우스를 태웠을 수도 있고, 괜히 한 번 해본 말일 수도 있으며, 그가 말한 비닐하우스가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복잡 미묘한 캐릭터다. 그럼에도 벤을 연기하는 스티븐 연의 연기는 전혀 이질감이 없다.
당초 칸 영화제에서 한국 매체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 했던 스티븐 연은 결국 인터뷰에 참석해 “더 알아야 하는 부분을 알지 못해 죄송하고 섣부른 선택을 했다는 점이 죄송하고 부끄럽다”며 직접 사과했다.
#충무로 신데렐라 전종서

영화가 공개되기 전, 전종서는 두 번의 공식 석상에 섰다. 제작발표회와 출국을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였다. 생전 처음 받는 스포트라이트 앞에서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떨었고, 그 긴장감은 질문에 답변하는 목소리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는 강렬했다. 상반신을 노출하는 연기도 불사했다. 그가 연기한 해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허영에 빠져 사는 리틀 헝거(Little Hunger)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로 그려진다. 해미가 카드빚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을 간 것인지, 아니면 종수의 의심처럼 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인지 영화는 끝까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해미가 옷을 벗어던진 채 노을 아래 나비처럼 춤을 추는 장면은 이창동 감독이 꼽은 명장면이다.
언론시사회가 열린 다음날, ‘버닝’의 주역들은 칸에 가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카메라에 포착된 전종서의 눈시울은 붉었고, 들고 있던 옷으로 얼굴을 꽁꽁 가리는 듯한 행동을 취해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그의 소속사 마더컴퍼니는 “모든 것이 처음인 배우이다 보니 서툴고 미숙했다”고 해명했지만, 태도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당초 칸영화제에서 인터뷰 계획이 없었던 전종서는 결국 인터뷰에 응해 “아직 배우라는 단어를 이름 앞에 쓰는 것도 부끄럽다”며 “더 이상 잘 몰랐고 서툴다고만 말씀드리면 안 될 것 같다. 직업의식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고 전했다. 이창동의 신데렐라, 전종서가 이어갈 필모그래피가 궁금해진다.
사진 뉴시스 REX 디자인 이지은사진제공 호호호비치
여성동아 2018년 6월 6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