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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만남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엄마와 실제 주인공 ‘형진이’ 엄마 김미숙 & 박미경

“동갑내기인 우리 두 엄마, 닮은 점이 정말 많네요”

■ 글·이승재‘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5. 04. 11

스무 살의 자폐 청년 초원과 그의 어머니가 펼치는 감동적인 마라톤 도전기를 그린 영화 ‘말아톤’이 개봉 2개월여 만에 5백만 관객을 끌어들이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초원의 어머니 역을 맡아 23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김미숙이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군의 어머니 박미경씨를 만났다.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엄마와 실제 주인공 ‘형진이’ 엄마 김미숙 &  박미경

자폐 청년의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내용으로 하는 영화 ‘말아톤’이 지난 3월19일 5백만 관객을 돌파했다. 제작사 씨네라인Ⅱ에 따르면 이 영화는 ‘장애인이 주인공이라 분위기가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운동복과 운동화를 지원한 한 스포츠 브랜드 외에는 어떤 협찬사도 끌어올 수 없었을 정도로 전망이 어두웠다고 한다. 그러나 개봉 초부터 주말 예매순위 1위를 차지하고 2개월여 만에 5백만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 자폐청년 ‘초원’ 역을 맡았던 배우 조승우는 톱스타 자리에 올랐고 초원이 엄마로 출연한 김미숙(46)은 ‘열애’(1982년) 이후 23년 만에 화려하게 은막으로 돌아왔다.
김미숙이 영화 속 초원이의 실제 모델인 배형진군(22)의 어머니 박미경씨(46)를 최근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반가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1959년생 돼지띠 동갑이다. 그리고 참 곱다. 늘 ‘분위기 있는 여성’의 타이틀을 놓친 적 없는 배우 김미숙은 그렇다 치더라도 20년이 넘게 자폐아 형진이를 키우며 고생을 겪었을 박미경씨의 깨끗한 피부와 밝은 얼굴은 다소 의외다.
“제가 어떻게 형진이 어머니의 심정을 다 이해하겠어요. 다만 조금 느낄 뿐이죠. 처음 형진이 어머니를 보고 ‘어쩜 저렇게 의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주 전투적일 것이다. 자기 보호본능 때문에 남에게 아주 차가운 사람일 것이다’ 하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실제론 아주 과감하고, 여유도 있고, 침착하고, 무엇보다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였거든요. 엄마의 표정이 저럴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그동안 쌓이고 쌓인 고통이 굳어져서 그렇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이 진하게 왔어요. 마치 득도의 경지에 오른 것처럼요.”(김미숙)
“솔직히 아이 키우는 데 욕심도 냈었어요. 형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집이 크게 여유 있진 않아도 그럭저럭 살았어요. 그런데 회사에 다니던 형진이 아빠가 ‘형진이를 더 편하게 살게 해주려면 경제적으로 더 좋아져야 한다’면서 봉제사업을 시작했고, 잘 안 됐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족 모두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작년에도 남편은 자살하고 싶다는 얘기를 저한테 몇 번이나 했으니까요. 제 주위에는 아이를 교육시키는 데 한달에 5백만원씩 들이는 부모들도 있어요. 저는 반대로 경제적으로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데 아이는 장애인이고. 전 사람들에게 아이가 장애인인데 경제적으로까지 어려운 모습으로 보이는 게 너무너무 싫었어요. 자존심도 상했고요. 어떤 사람들은 ‘저 여자는 돈이 많으니까 아들도 저렇게 키웠지’ 하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차라리 그 편이 더 다행이다 싶었어요.”(박미경)
여섯 살, 네 살 난 두 아이에게 좋은 엄마 모습 보이기 위해 ‘말아톤’ 선택한 배우 김미숙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김미숙은 출연작을 고르는 데 있어서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아이들이 여섯 살(아들), 네 살(딸)이에요.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엄마의 좋은 모습이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거란 생각을 했어요. ‘말아톤’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요. 배우 한석규씨도 얼마 전 ‘주홍글씨’에 출연한 뒤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 영화를 내 딸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되고 신경이 쓰인다’고. 그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자식을 위해 선택하고 자식을 위해 결정하는 거죠. 전 배우이자 엄마로 다시 새로운 스타트라인에 선 거예요.”
그는 제작진이 ‘월남치마’를 입으라고 요구하자 화를 낼 정도로 자기 캐릭터에 대해 몰두했다. “자폐아를 기르려면 계단도 뛰어 오르내리고 아들도 안아주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치마를 입냐”며 되물었다는 것.

이 말을 들은 박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엄마와 실제 주인공 ‘형진이’ 엄마 김미숙 &  박미경

자폐 청년의 마라톤 도전기를 그린 영화 ‘말아톤’은 개봉 2개월여 만에 5백만 관객을 모았다.


“맞아요. 전 치마가 단 한 벌도 없어요. 아이와 전쟁하면서 옷 차려입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아이가 이젠 다 커서 이렇게 화장할 틈도 생기는 거죠. 지난 20년간 화장을 모르고 살았어요.”
김미숙은 영화를 찍으면서 ‘진짜 박수 받아야 할 사람은 형진이가 아니라 그 어머니’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박미경씨에게 “정말 미안해요. 엄마의 고민을 충분히 담지 못해서”라며 겸손해했다.
“처음엔 제 욕심대로 했던 것 같아요. 아이가 좋고 싫은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 의지가 없으니까 제가 모든 걸 결정할 수밖에 없었죠. 영화 속에서처럼 ‘형진이 너 이거 좋아하지? 그렇지?’ 하고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가기도 했고, ‘이거 하면 선물 줄게’ 하는 식으로 달래고 어르면서 아이를 제 뜻대로 움직였죠. 그렇게 10여 년을 밀고 나가다가 한 가지를 발견했는데, 아이가 달리고 땀을 흘리면서 스스로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저를 힘들 게 만든 건 ‘달린다’는 기능적 부분만 숙달될 뿐 아이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앞만 보고 10여 년을 달려오다가 어느 순간 ‘형진이가 많이 좋아졌겠지’ 하고 뒤를 돌아보면 형진이는 늘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영화에서 아이가 수영장에 벌거벗고 나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도 그랬어요. 형진이가 철인3종 경기를 도전하는 것을 두고 코치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이가 탈의실에서 벌거벗고 나온 거예요. ‘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는 원점이구나’ 하는 절망감이 들었어요. 제가 우울하고 힘들어하면 남편이 보듬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남편이 더 힘들어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고 몸도 많이 아팠죠. 신경정신과 치료도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엄마와 실제 주인공 ‘형진이’ 엄마 김미숙 &  박미경
받았어요. 이렇게 계속 상처만 받고 살다간 정말 죽겠다 싶었어요. 그렇다고 죽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살기 위해선 내 안에 있는 걸 버리고 또 버릴 수밖에 없었어요.”(박미경)
“20년 넘게 자폐인 아이와 함께 살아온 초원이 엄마는 일희일비하는 그런 얼굴이 아니에요. 제가 관찰한 형진이 엄마는 힘든 순간 차라리 무표정했죠. 하지만 실제의 저와 결정적으로 다른 건 말투였어요. 전 부드럽게 흘리듯 이야기하는데 초원이 엄마는 아이에게 조용히 말해도 한마디 한마디가 콕콕 찌르듯 단호하죠. 또 조용히 방에 가서 문을 걸어잠그고 펑펑 울더라도 밖에서는 절대로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아요.”(김미숙)
자폐증 큰아들 때문에 제대로 보듬지 못한 둘째 아들이 더 가슴 아프다는 박미경씨
박미경씨는 큰아들 형진이보다 둘째 아들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형진이는 제가 안고 가야 할 업보라고 하지만 둘째 아들이 무슨 죄예요. 아들이 ‘엄마가 내 말에 한번이라도 귀기울여준 적 있냐’고 하는데 죄책감이 들었어요. 제대로 보듬어주지도 못하고…. 아들 친구들이 ‘너희 엄마 정말 존경한다고 꼭 전해드려라’라고 말하면 그 아들은 ‘엄마가 나한테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고 말해요. 그럴 때는 정말 가슴이 찢어져요.”
김미숙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엄마’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갖게 됐다고 한다.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엄마와 실제 주인공 ‘형진이’ 엄마 김미숙 &  박미경

지난해 12월 서울 장충동 소피텔앰버서더 호텔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만난 배우들과 실제 주인공들. 왼쪽부터 박미경씨, 배형진군, 배우 조승우, 김미숙, 초원 동생 역의 백성현.


“주말엔 반드시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고 노력해요. 토요일과 일요일은 24시간 아이들과 있으려 하죠.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면 확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도 있어요. 예전에 유치원을 운영할 때도 엄마들에게 이야기했던 게 ‘엄마는 5중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엄마는 쉽게 화내고 소리 지르면 안 돼요’였어요. 하지만 제가 직접 실천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한번은 아이들 문제로 너무 속이 상해서 친정엄마에게 전화해 하소연을 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그러시더군요.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들 붙잡고 함께 울 때도 있어. 그때쯤 되어야 엄마 노릇 끝난다. 나도 너 그렇게 키웠다’고요. 전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해요. 형진이 엄마를 만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 그래도 아이들이 말귀 알아듣고, 엄마가 회초리 들면 무서워할 줄 아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하고요. 아이를 낳을 때는 ‘손가락 발가락이 10개씩만 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부모들은 그때의 그 감사하고 고마웠던 마음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순간순간 저 자신을 반성했어요. 엊그제는 둘째 아이를 어떤 여자가 데려가는 악몽을 꾸기도 했는데 자다가 벌떡 일어나 주기도문을 열 번 외웠어요. 가슴이 너무 답답했어요. 하지만 형진이 엄마는 정말 무엇으로 위로받을까요.”

이에 박씨는 “형진이가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20여 년간 전 제가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순간도 없어요. 마치 바위를 보고 얘기하는 느낌이었죠. 아이는 제 말에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심지어 제 말을 듣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죠. 하지만 이 영화가 나온 뒤 형진이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와요. 얼마 전에는 ‘말아톤’ 주제가 콘서트에 형진이와 함께 참석했는데, 어떤 노래가 나오자 형진이가 영화 속 한 대목을 말하더라고요. 고맙고 감사했어요.”
김미숙의 여섯 살짜리 아들은 이 영화를 엄마와 함께 두 번 ‘진지하게’ 보았다고 한다. 그 후 아들은 그림책을 보다가 비가 오는 장면만 나오면 (영화 속 초원이의 대사를 흉내내) “엄마, 비가 주룩주룩 내리나요?” 하고 웃으며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이미 ‘초원이 엄마’와 ‘형진이 엄마’는 5백만 명의 가슴에 비를 주룩주룩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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