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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아름다운 도전

유방암 2기 선고받고 동아마라톤대회 풀코스 완주한 주부 손미경

“마지막 마라톤이 아니길 빌고 빌며 뛰었습니다”

■ 기획·조득진 기자 ■ 글·이윤원 ■ 사진·동아마라톤사무국 제공

입력 2004.05.11 13:58:00

마라톤 마니아들은 ‘달리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들 한다. 병마는 물론 내면의 갈등이나 게으름과 싸운다는 것. 그들은 달리기를 통해 무엇보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신감을 얻는다고 한다. 유방암 2기 판정을 받고도 ‘2004 동아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42.195㎞를 완주한 손미경 주부도 가족과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유방암 2기 선고받고 동아마라톤대회 풀코스 완주한 주부 손미경

지난 3월14일 동아 국제마라톤대회. 출발점인 광화문 사거리 앞에는 마라톤을 사랑하고 마라톤에 미쳐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지점을 완주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은 채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긴장된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는 손미경 주부(45)도 끼어 있었다.
신호가 떨어지고 드디어 출발! 부산 태종대를 오르내리며 연습했던 그는 그렇게 꿈꿔왔던 동아마라톤 코스에 첫발을 내디뎠다. 3월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출발은 순조로웠다. 조금씩 속도를 붙여가도 되겠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들어갈수록 이번 대회 참여를 극구 반대하던 담당의사의 말이 떠올라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꼈다.
“마라톤은 절대 안됩니다. 지금 제 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체력이 떨어지면 항암치료고, 방사선 치료고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어요. 치료를 아무나 받는 줄 아십니까?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의사의 강한 만류조차 뿌리치고 서울로 향한 손씨의 의지는 단호했다. 달리다가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모르지만 지금 완주해내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고통도, 어떤 치료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마음속의 갈등은 접어둔 채 어느덧 5km 가까이 달려온 지점. 갑자기 가슴 부위에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다. 갑작스런 통증에 당황한 그는 잠시 주춤했다. 속도를 늦췄지만 가슴 통증은 간헐적으로 반복됐다. 아무래도 계속 경기를 진행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 무렵 멀리서 ‘물도 마시고 휴식을 취하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그래 이쯤에서 포기하자’는 유혹이 밀려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난데없는 오기가 솟구쳐올랐다. ‘지금 끝내야 하는가?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란 말인가?’ 감정이 복받쳐올랐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보니 도로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마음이 급해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이상 주저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뒤처져서 달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여사 파이팅, ‘태달사’ 만세! 아줌마 힘내요!”
마라톤 동호회 ‘태종대를 달리는 사람들’(이하 ‘태달사’)의 격려와 응원소리였다. 맨 뒤에 처져 달리는 한‘아줌마’에 대한 시민들의 응원도 뜨거웠다. 다리는 이미 풀린 상태였지만, 그는 정신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대회 2주 앞두고 유방암 판정, 처음에는 오진으로 믿어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꿈결같이 느껴질 즈음, 자신에게 고비인 28km 지점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달리는 사람들은 어떤 고비를 넘겼을 때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상태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도 그런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는 그렇게 결승점인 잠실 주경기장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4시간 27분 35초. 그의 생애 가장 빛나고 기쁜 순간이었다. 결승 테이프를 끊고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데 그를 부둥켜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기쁨과 걱정 때문에 얼굴이 눈물로 범벅된 가족들이었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가족들이 만류할까봐 몰래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에 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과 서울에 있는 큰딸이 달려온 것이다.
“엄마 진짜 우리 엄마 맞아? 엄마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기막힌 딸은 자신을 속인 엄마에게 원망부터 늘어놓았다. 그러나 한없이 자랑스럽고 대단한 엄마를 끌어안고 가족은 그렇게 그의 ‘아름다운 도전’앞에 목놓아 울었다.
“처음에는 등산이 좋아서 산을 많이 탔어요. 친구들하고 같이요. 그러다가 친구들이 마라톤 얘기를 자주 꺼내더군요. 자연스럽게 마라톤에 관심이 생겼어요. 이왕 하는 거 대회 출전을 목표로 연습을 했죠. 연습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지않아 ‘고성 이봉주 마라톤대회’의 10km 코스에 출전했어요. 체력이야 등산으로 다져져서 자신 있었거든요.”

유방암 2기 선고받고 동아마라톤대회 풀코스 완주한 주부 손미경

유방암 2기 진단에도 불구하고 동아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손미경 주부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그는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타고난 체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운동을 즐기고, 또 그 때문에 건강에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있었던 것. 첫 대회에서 의외로 우수한 기록을 내고 자신감을 얻은 그는 연이어 큰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급기야 ‘합천 벚꽃 마라톤대회’에서 20km 하프코스를 완주하고 나자, 풀코스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다. 보통 남들은 3년 걸린다는 풀코스 도전을 그는 1년3개월 만에 단행한 것이다.
“타고난 체력도 체력이지만 ‘태달사’ 동호회 활동을 통해 강도높은 훈련을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함께 달리고 훈련하면서 많이 배웠거든요.”
이후 지난해 9월 ‘경산 마라톤대회’ 풀코스를 우수한 기록으로 완주하고 난 뒤, 10월에 ‘춘천 마라톤대회’ 11월에 ‘부산 다대포 마라톤대회’ 풀코스 완주에 이르기까지 그는 선수들조차 감당하기 힘든 일정을 소화하며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겨울내내 마라토너라면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동아 마라톤대회’를 준비했다.
“새벽 2시50분에 일어나 태종대에서 연습을 했어요. 좀 무리다 싶었지만 하루에 3시간씩, 언덕을 오르며 달리고 또 달렸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어깨통증이 심하고, 소화가 좀처럼 되지 않는 거예요. 아픈 어깨를 두드리기 위해 손을 뻗다가 가슴을 스쳤는데, 좀 크다 싶은 멍울 하나가 손에 잡히더군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어요.”
다음날 바로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을 내렸다.
“유방암인 것 같습니다. 진행은 2기 정도 됐고요.”
그는 의사의 진단을 듣는 순간 ‘오진’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한다.
“저같이 건강한 사람한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에요. 오진이죠? 오진이 틀림없어요.”
선뜻 믿어지지 않았기에 그는 다른 이들처럼 울거나 절망감에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처럼 건강한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며 그저 오진일 것으로만 확신했고, 또 2주 앞으로 다가온 ‘동아 마라톤대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검사를 받기로 했다.
그래서 다시 재검사를 받은 곳은 부산 동아대학병원. 그는 조직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태어나서 가장 길고 피말리는 시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의 그 긴장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고.
유방암 2기 선고받고 동아마라톤대회 풀코스 완주한 주부 손미경

5㎞와 28㎞에서 고비를 맞았지만 그는 ‘어쩌면 다시는 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유방암 2기입니다. 되도록 빨리 수술해야 합니다.”
혹시나 했던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그러나 그는 의사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저 지금은 안됩니다. 마라톤 대회 출전이 얼마 남지 않아서요…. 저 이번에 꼭 대회 나가야 합니다. 허락해 주세요.”
의사로서도 처음 당해보는 황당한 일이었을 터. 마라톤대회 때문에 수술을 미뤄달라는 환자의 간청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의사는 암 치료에는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다며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항암치료 잘 받고 내년 대회 다시 출전할 계획
그러나 설득을 당한 사람은 의사였다. ‘마라톤을 포기하면 앞으로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 대회에 나가서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 정신력으로 버텨보고 싶다’는 그의 강한 의지에 의사도 두 손을 들고만 것.
“유방암 2기라는 끔찍한 형벌을 선고받은 건 대회를 열흘 앞둔 지난 3월5일이었어요. ‘동아 마라톤대회’ 말고도 마라톤대회 참가일정을 2개나 더 잡아둔 상태였죠. 이번 대회만 참가하고 남은 대회를 모두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병원을 나오는데 그때서야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유방암 2기 선고받고 동아마라톤대회 풀코스 완주한 주부 손미경

완주 기록은 4시간 27분 35초. 그는 암세포와의 싸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가족과 ‘태달사’ 회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라톤대회 참가를 만류하고 나설 것이 뻔했고, 결국 대회에 참가하고 말 자신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그였기에 다음날부터 더욱 훈련에 매진했고, 드디어 대회 전날, 혼자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 생애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마음과 반드시 ‘완주’하겠다는 의지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고 한다.
3월14일 광화문에는 손미경씨를 비롯해 완주의 꿈을 가진 수많은 출전자들이 출발선 앞에 섰다. 가볍게 몸을 푸는 사람, 또는 가족이 함께 출전해 서로 물을 나눠마시며 격려하는 사람, 막판 ‘파이팅’을 외치는 동호회 회원들…. 그 속에서 혼자 그는 외로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무모하리만치 대담했던 ‘서울행’ 이후 그는 바로 수술대 위에 올랐고 2㎝ 가량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종양이 완전히 제거됐는지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전이될지는 지켜봐야 하는 상황. 군에 간 아들에게는 소식을 알렸지만 미국에 있는 둘째딸과 친정어머니에게는 충격을 줄까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퇴원 날짜는 5월 중순경으로 그는 현재 병원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운동하고 밥도 잘 챙겨먹으면서 암세포와 싸우고 있다.
“완주를 하고나니까 정말 자신감도 생기고, 무서운 게 없어졌어요. 게다가 목표로 했던 4시간30분 안에 결승선에 들어와 얼마나 내 자신이 자랑스러운지 몰라요(웃음). 앞으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가 남았는데, 이제 그 정도는 저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애써 자신감을 보이는 것일까? 의도야 어떠하든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의지력이었다. 그런 그를 가족들 또한 걱정스럽지만 자랑스런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그런 ‘깡’이 나왔는지…. 제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엄마 소식을 듣고는 전부 놀라면서 하나같이 ‘대단하다’고 해요. 그런 엄마가 한없이 자랑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곁에서 지켜봐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해요.”
큰딸은 그저 미안한 마음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그와 함께 달렸던 ‘태달사’가 있고, 주변의 격려와 성원이 있어서 그의 투병생활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그 독한 치료들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견뎌야 하지만 그는 “머리가 다 빠져서 보기 흉하면 어떡하냐”며 오히려 너스레를 떨었다.
현재 유방암 진행상태는 3기 정도. 처음에는 종양의 크기가 작아 2기 정도로 생각했으나 암센터에서 3기라는 최종진단을 내렸다. 앞으로 진행될 치료과정은 마라톤 도중 넘겨야 했던 5km 혹은 28km 지점의 고통과는 비교도 안될 것이다. 곱게 기른 머리카락은 한 가닥, 두 가닥 빠져나갈 것이고, 운동으로 다져졌던 다부진 몸은 뼈를 드러내며 말라갈지도 모른다.
“좌절은 없습니다. 꼭 다시 일어설 거니까요. 42.195km를 달려나갔듯 앞으로 주어질 시련의 시간 속으로 주저없이 달려나갈 거예요. 지금 저처럼 병마와 싸우고 계신 분들도 제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주셨으면 좋겠어요. 마라톤이 그렇듯이 이것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달리다보면 숨이 턱까지 차고 죽을 듯한 고통이 밀려오는 고비의 순간이 있지만 그 고비를 사력을 다해 넘기고나면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몸도 마음도 비워진 느낌이 들거든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결승점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도 비슷합니다. 죽어라 버티면 어느새 ‘완치’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유난히 힘주어 말하던 그는 저녁운동 시간이라며 환자복 아래로 운동화를 정성껏 신었다.
“올해 1년 치료 잘 받아서 완전히 나은 후 내년 동아 마라톤대회에 꼭 다시 출전할 겁니다. 그때는 반드시 순위 안에 들 거에요. 그때는 머리도 예쁘게 다시 길러서 지금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출발선에 서겠습니다. 지켜봐주실 거죠(웃음)?”
그가 해낼 또 다른 ‘아름다운 도전’에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여성동아 2004년 5월 4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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