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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여성

뛰어난 지성과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주눅들게 한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

“불우한 가정환경과 낙태 경험하며 여자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홀로서기라는 걸 깨달았어요”

■ 글·임수영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해냄 제공

2004. 04. 12

2002년 내한 당시 68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자태로 대중을 매료시켰던 글로리아 스타이넘.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그는 페미니스트도 외모를 가꾸고, 연애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최초의 여성이다. 최근 그의 전기 ‘아름다운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국내에 번역, 발간돼 눈길을 끌고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명문대생이 됐으나 임신과 낙태를 경험하고, 여성운동의 기수로 거듭났던 그의 드라마틱하고 당당한 인생 스토리를 발췌, 정리했다.

뛰어난 지성과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주눅들게 한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

남자들은 미스터로만 불리는데 여성은 결혼을 기준으로 미스와 미시즈로 분리되는 것에 반기를 들고, 여성 호칭을 ‘미즈’로 통일하자며 72년 잡지 ‘미즈’를 창간한 미국의 여성운동가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70). 무명의 자유기고가였던 63년, 플레이보이 클럽에 위장 취업해 하층 여성들의 삶을 폭로한 기사로 화제를 모으며 유명해진 그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성적인 매력과 뛰어난 지성, 자신을 낮추는 대화 기술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자들을 주눅들게 하고 또 끌어들였던’ 인물이다.
그의 페미니스트로서의 기질과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 열정 등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 하다. 그의 외할머니는 한마디로 ‘억센 여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부동산 투자에 성공해 경제적 여유를 누렸고, 농사를 지을 때는 남자들이 할 일을 도맡아 훨씬 야무지게 해냈다. 또한 남편을 동반하지 않고 혼자 여행을 떠날 정도로 세상에 도전적이고 대범했다. 스타이넘의 어머니 역시 외할머니와 닮은 점이 많았다.
“어머니는 대학 시절 할머니의 뜨거운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모든 면에 열성적이었어요. 글쓰기를 좋아해 뉴욕에 가서 신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셨죠.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건 대학 신문사에서였어요. 당시 아버지는 대학 신문사의 편집장이었죠. 두 분은 연애 결혼했지만 행복하지는 못했어요. 아버지가 좋은 남편은 아니었거든요. 목표를 세우고 계획적으로 인생을 사는 타입이 아니었어요. 재미있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우유부단하셨죠.”
스타이넘의 어머니는 남편의 이런 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혼 후 자신의 꿈과 열정이 사라진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증에 빠졌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는 활기 넘치고 모험심이 강한 젊은 여성의 전형이었어요.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결혼 후 일을 포기하고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면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자 평생 꿈꿔온 것들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신경쇠약에 걸려 고향에 있는 요양소에서 몇달 지내기도 하셨어요.”
하지만 스타이넘에게 아버지는 가장 좋은 친구였다. 자신에게 늘 깊은 애정을 표시하는 아버지를 통해 스타이넘은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한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사려 깊은 모습과 따뜻한 사랑 덕분에 남성에게 적대적이거나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온화하고 남성우월주의에 물들지 않은 남자들과 친구가 되거나 연애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버지의 영향이다.

아버지의 자상함 영향 받아 남성에 적대적이지 않은 페미니스트로 성장
“아버지는 날 친구처럼 대하고, 내게 조언을 구하고, 내가 늘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했죠. 아버지는 날 특별한 존재로 인정해 주었어요. 아버지의 그런 태도에서 아버지와 내가,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결코 정반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지나치게 민감해 작은 일에도 크게 흥분했고, 아버지는 늘 궁핍했다. 이 때문에 스타이넘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끝내 부모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현실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 책과 환상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어린 소녀들이 갖는 환상과는 많이 달랐다. 1940년대 여자아이들이 흔히 가졌던 환상은 성공한 남성과의 결혼이었다. 하지만 스타이넘은 궁핍한 집안 살림에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어머니를 돌봐야 했기에 누군가로부터 구출되기보다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현실을 이기고 당당하게 성공하는 상상을 많이 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하루 10달러씩 받고 나이트클럽에 나가 일하거나 상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자립의지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는 계기가 됐다.

뛰어난 지성과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주눅들게 한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

92년 빌 클린턴 대통령 후보와 함께 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왼쪽). 열정적 기질을 물려준 어머니와 함께(가운데).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긴 생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즐겨입어 페미니스트도 외모를 가꿀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던 그는 명문 스미스 여자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절 대학은 여자에게 결혼을 할 때까지 시간을 때우는 곳이었다. 대학생활을 통해 명문대 출신의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될 자격을 갖춰 놓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다녔던 스미스 대학의 졸업생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버라 부시와 낸시 레이건이다.
“어른들은 남자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처녀성을 지킬 것을 신신 당부했어요. 그래서 잘못된 임신을 최악의 상황이라고 보았죠. 하지만 임신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제때 시집을 못 가면 손가락질을 했어요. 참 아이러니한 시대였죠.”
그러나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대학의 의미는 남달랐다. 현실을 잊고 쉴 수 있는 쉼터였다. 그는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장학금으로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고, 자기를 꾸미는 일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의 동창들은 지금도 그의 아주 긴 손가락과 매니큐어를 바른 예쁜 손톱, 세련된 화장, 청바지와 회색 셔츠를 기억한다. 그는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미인대회에 나간 적도 있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당당했기에 훗날 페미니스트는 남성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긴 생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름다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첫사랑을 낙태로 끝맺고 인도 여행 다녀온 뒤 인생의 전환점 맞아
국제 정치학에 관심이 많았던 스타이넘은 스미스 대학 재학중 장학금을 받고 제네바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제네바 유학이 끝날 무렵엔 영국의 세인트 앤서니 칼리지에서 공부할 수 있는 옥스퍼드 장학금을 받아 곧바로 영국으로 향했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지고 보다 다양한 부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스미스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4학년이 되던 해에 공군 조종사 블레어 초치노프와 사랑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혼까지 했다.
초치노프와 만나는 동안 스타이넘은 사랑하는 남자와의 멋진 섹스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성과 섹스를 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스타이넘은 초치노프와 사랑에 빠진 뒤 피임장치를 하고 섹스를 즐겼다. 그에게도 물론 오래 연애를 하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자 결혼을 피해 달아났다. 전문적인 직업을 얻고, 그것을 자유롭게 즐겨보기도 전에 덜컥 아이를 낳아 육아에 매달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졸업과 함께 1년 동안 인도를 여행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고 인도로 떠났다. 미국에 그대로 있다가는 결국 초치노프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인도로 내몰았다. 하지만 인도에 가기 위해 런던에서 비자 발급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혼을 파기하고, 피임기구를 쓰지 않은 상황에서 초치노프와 다시 관계를 맺은 게 문제였다. 그는 남자 친구는 물론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고 중절수술을 결정했다.
이 사실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뒤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에 낙태한 적이 있다고 밝힌 사람들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면서 비로소 알려졌다. 스타이넘은 임신 사실을 확인했을 당시 절망에 빠져 처음으로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자기 운명은 자기 손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뛰어난 지성과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주눅들게 한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

1972년, 전국여성정치회의 멤버들과 가진 기자회견 모습. 같은 해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를 창간했다.


몇 개월 뒤 인도로 떠난 스타이넘은 인도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출용 샌들을 디자인하는 걸 돕기도 하고, 사리와 치약, 샴푸, 화장품 광고에도 출연했다. 그는 간디 마을에서 간디를 따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 수건과 물잔, 빗만 가지고 하루에 몇 마일씩 걷는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적게 소유할 때의 자유를 발견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주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고, 길에서 거적을 깔고 자며, 개울물로 몸을 씻고, 사리가 젖으면 젖은 채로 지냈다.
이런 생활을 통해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사람도 무시하거나 하찮게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의 깨달음은 훗날 그가 농장 노동자들을 위한 민권운동,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 등의 활동을 펴나가는 초석이 되었다.
58년, 인도에서 돌아온 후 그는 뉴욕에서 지내며 프리랜서 기자로서 이곳저곳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스타이넘이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63년, 플레이보이 클럽에 바니걸로 위장 잠입해 쓴 르포가 공개되면서부터다.
스타이넘이 적극적으로 여성운동에 참여한 때는 68년 낙태허용을 촉구하는 여성단체 ‘레드스타킹’을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임신과 월경 등을 주제로 논쟁을 벌이며 언론의 주목을 받아 페미니즘의 대변자로 급부상했다. 이후 72년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를 창간, 여성의 의회진출과 인종, 계층을 넘어선 연대운동을 활발하게 벌여 70년대 여성운동이 급진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스타이넘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언론은 그의 외모에 대해 먼저 언급했다. ‘두뇌와 미모, 매력이 환상적으로 결합된 여성운동가’로 불렸고, 그를 보도할 때는 좀더 외설적인 것이 없나 늘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를 다룬 한 인터뷰 기사에는 그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드러낸 사진 밑에 ‘스타이넘:생각보다 쉬운’이라는 알쏭달쏭한 사진 설명이 붙기도 했다. 그에 대한 공격은 언론뿐만 아니라 함께 여성운동을 하는 급진페미니스트로부터도 이어졌는데, 대개의 내용은 미모를 무기 삼아 여성운동의 스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타이넘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즐겼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하고, 자기를 꾸미는 과정을 즐겼다. 그리고 그가 사귄 모든 남성들이 인정하듯이 그의 매력은 그의 지식과 총명함을 더욱 부각시켰다.



“연애는 예스, 결혼은 노”라는 주장 뒤엎고 66세에 다섯살 연하 남자와 결혼
첫사랑과의 이별 뒤 스타이넘은 몇몇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무명의 프리랜서 작가였던 시절, 그는 지인을 통해 로버트 벤턴을 소개받았다. 당시 ‘에스콰이어’ 잡지의 미술감독이었던 벤턴은 이후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나쁜 친구’ ‘슈퍼맨’ 등의 시나리오를 쓰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감독상과 각본상 등 아카데미 5개 부문을 휩쓴 인물이다. 벤턴은 스타이넘에 대해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신뢰한 여성이었다. 난 그녀와 헤어진 후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연인 보니와 클라이드의 이야기는 우리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그녀는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 기대해야 할 것과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뛰어난 지성과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주눅들게 한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

대학 졸업 후 떠난 인도여행에서 사리를 입고 있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그는 인도여행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말한다.


벤턴과 헤어진 뒤 만난 바이킹 출판사 대표 톰 긴즈버그는 스타이넘이 만났던 사람 중 가장 부유했다. 긴즈버그 덕분에 스타이넘은 뉴욕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그는 긴즈버그와도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의 참담했던 결혼생활에 대한 기억과 여자는 결혼을 하는 순간부터 남편을 위해 살아야 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완전히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그 뒤로도 몇번의 연애를 했고, 영화감독이자 연극 연출가인 마이크 니콜스와의 만남은 그가 영화와 연극계 사람들과 친밀해지는 계기가 됐다. 주위에서는 두 사람이 하루빨리 결혼할 것을 재촉했으나 언제나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생 많은 남성과 사랑에 빠졌지만 언제나 먼저 이별을 고하고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늘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던 스타이넘. 하지만 “결혼은 한 사람과 반쪽짜리 사람을 위한 것이며, 결혼 후 여성은 반쪽짜리 비인간으로 전락한다”며 결혼 반대론을 폈던 그는 지난 2000년 다섯 살 연하의 사업가 데이비드 베일과 결혼, 세간에 화제를 뿌렸다. 당시 스타이넘은 “수십년간 평등한 결혼을 이루기 위해 애써왔지만 내 자신이 그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면서 “지금 놀랍고 행복하며, 언젠가 이에 대해 글을 쓸 것”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또한 “결혼을 한 가장 큰 이유는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결혼 제도 안에서 법적 평등이 가능해졌다. 물론 양육에 대한 책임이 아직까지는 여성의 몫으로 생각되어 완전한 평등을 이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66세의 나이에 결혼을 선택함으로써 결혼의 비합리성을 주장해온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뒤엎은 건 결혼이라는 제도가 남녀에게 평등하고 안정적인 결합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30년 넘게 ‘미즈’를 발행해 온 그는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다. 매주 비행기를 탈 정도로 강의, 집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스타이넘은 52세에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지만 ‘미즈’ 잡지 발행에 영향을 줄까 두려워 유방암 사실을 숨기며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90년대에는 ‘내부로부터의 혁명’ ‘발칙한 행동과 일상의 반란’ 등을 집필하며 약화되고 있던 여성운동의 불씨를 다시금 살려내고, 현재는 ‘딸의 손을 잡고 회사에 가는 날’이라는 운동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워온 그의 열정은 지금도 식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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