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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혹시 당신의 이야기

네 사람의 엇갈린 사랑, 스산한 연애소설‘아주 무거운 가방’ 펴낸 작가 이상림

■ 글·조득진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3.11.10 14:01:00

요즘 작은 크기의 책 한권이 서점가에서 인기다.
30대 남녀 4명의 관계와 욕망, 그 허망함을 다룬 소설 ‘아주 무거운 가방’이 바로 그것. 신춘문예 등단 10년 만에 가슴 싸해지는 연애소설을 들고 나타난 작가 이상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에게서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배어 나왔다.
네 사람의 엇갈린 사랑, 스산한 연애소설‘아주 무거운 가방’ 펴낸 작가 이상림

“그남자 너의 애인이니?” 연습한 대사들이 입 속에서 맴돌아 미아는 잠깐 동안 주춤했다. 그렇지만 갑자기 거짓말을 한다는 게 피곤하게 느껴졌다. 줄곧 연애하고 싶어, 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이제와 단지 친구일 뿐이라고 해봐야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그런 마음도 없진 않았다.“애인? 글쎄… 하지만 나 누군가를 만나고 있어.”

소설 ‘아주 무거운 가방’은 어긋난 사랑, 비틀린 욕망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철저하게 이기적이지만, 그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 그들은 모두 그렇게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사이에서 힘겨워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일단 소설은 외형적으로 몇개의 불륜담으로 엮어졌다. 주인공 격인 미아는 결혼생활의 피로감을 우연히 만난 성운과의 바람으로 풀고자 한다. 친구로 만나 결혼까지 이른 남편 환기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미아의 ‘정부’ 성운은 뭇사내들의 ‘정부’였던 어머니에 대한 아픈 기억을 지우려는 듯 미아의 고교동창에게까지 일탈적 성관계를 넓힌다. 그 고교동창은 미아의 형부에게 돈을 받고 몸을 내주는 사람이다. 형부의 아내, 언니 미호는 삼풍백화점 참사로 부모를 잃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병을 앓고 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보며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남녀관계를 갈구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훼손된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엄숙한 톤으로 쓰지는 않았어요. 글이 갖는 엄숙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지난 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 칩거했던 작가 이상림(40). 그가 무려 10년간의 침묵 끝에 펴낸 장편소설 ‘아주 무거운 가방’은 우선 쉽게 읽힌다. 마치 10대들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가벼운 말투, 그리고 단문으로 끝나는 문장은 단숨에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지나치게 심각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속내를 들켜 연민이 생긴다’는 독자 반응
“너무 다정하게 해주지 않아도 되지?”
미아를 침대에 눕히며 성운이 속삭였다. 섹스할 때의 성운은 성미가 급한 것도 같다. 그의 손은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검지와 약지가 그녀의 그곳을 벌리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돌출한 부분을 탁탁 때렸다. 미아는 아주 짧은 순간에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곤 그의 무릎 위에 가장 민감한 그곳을 밀착시켰다. 그녀의 그곳은 이미 티스푼 위에 얹힌 설탕처럼 뾰족이 솟아 있었다.

네 사람의 엇갈린 사랑, 스산한 연애소설‘아주 무거운 가방’ 펴낸 작가 이상림

등단 10년 만에 내놓은 소설 ‘아주 무거운 가방’은 무거운 가방을 멘 채 사막 같은 현실을 건너가는 30대들의 까칠한 내면의 풍경화다.


소설에선 네 사람의 성행위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이야기한다. 유부녀와 유부남의 불륜이 더는 낯설지도 놀랍지도 않은 현실에서 소설 속 정사장면은 독자의 호기심을 의식한 ‘장치’로도 보이고, 막 나가는 우리 사회의 성풍속을 그린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런 ‘통속소설’에 대한 의심을 작가는 가볍게 벗어버린다. 감정을 거세한 건조한 대화는 정사장면을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심하게 처리한다.
“정사장면을 묘사하면서 고민을 좀 했어요. 너무 질퍽하면 흔한 통속소설이 되어버릴 것이고, 그렇다고 30대 초반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하면서 섹스를 빼놓고 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무감각하게 그렸죠. 애정소설이 아니라 관계와 소통, 그리고 현대인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소설은 무미건조하다. 긴장감도 없고 놀랄 만한 반전도 미약하지만 소설은 독자를 끌어들인다. 수려하고 매끈한 문장력도 그렇지만 등장인물들이 집착하는 ‘가벼움’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너무나 건조해 풀풀 먼지라도 날 것 같지만 그게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에 독자들은 책을 선뜻 내려놓지 못한다.
“모아놓으면 장편이지만 떼어놓으면 하나의 단편이 돼요. 책을 읽은 분들은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연민이 생겼다’고들 하시더군요. 그 단편 어디엔가 자신의 모습이 들어 있었겠죠. 물론 제 모습도 들어 있을 것이고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엔 나름대로 뜻이 담겨 있다. 삶의 방향을 두리번거리는 길 잃은 30대 여성 ‘미아’, 기억의 첨탑에 사는 건조한 남성 ‘환기’, 욕망과 소비의 허공을 헤매는 남자 ‘성운’, 사로잡힌 운명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주에 미혹된 여자 ‘미호’까지.
“제 나이대의 모든 여성들이 그렇겠지만 결혼과 육아로 나 자신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20대의 싱싱했던 ‘여자’는 없고, 자신에게 소홀하기 그지없는 ‘아줌마’만 있더군요.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죠. 글을 쓰면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 미호였어요. 모두 탈출구가 있어 보이는데 그녀만이 유일하게 탈출구가 없거든요.”
그의 소설을 두고 문단에선 “30대들의 허망과 결핍의 정서를 관찰하는 시선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절절한, 오랜만에 만난 섣부르지 않은 솜씨(소설가 이순원)”, “끝까지 따라 읽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불안 속에서 자기 생의 출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나침반이 될 것 같다(문학평론가 박철화)” “이 소설은 가장 뜨겁고 가장 메마른 불의 날들을 골라 핀 그 꽃을 싹둑 잘라내어, 크리스털 그릇의 얼음 속에 담아 내놓았다(소설가 김훈)”는 호평을 하고 있다.

네 사람의 엇갈린 사랑, 스산한 연애소설‘아주 무거운 가방’ 펴낸 작가 이상림

일단 손에 쥐었다면 절대 소설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무심코 베는 빳빳한 종잇날 같은 서늘함, 일상적인 풍경을 무섭도록 낯설게 만드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인간은 아무도 변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서른 살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반대로 마흔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여전히 열다섯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 차이란, 우열도 뭣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만원 버스에서 각자가 들고 있어야 하는 무거운 가방과도 같은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아주 무거운 가방’은 우리가 모두 짊어지고 가는 짐을 상징해요. 태어나면서부터 자의와 타의에 의해 망쳐지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지겨워하면서도 세상을 살아가죠. 그 무거운 짐을 어디엔가 부리고 싶은데 사람들은 다 내려놓으려고만 할 뿐 받아주려고 하지 않잖아요. 저는 미호가 가장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는 것처럼 생각됐어요. 미호가 끊임없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찾으려는 행위는 훼손되지 않은 것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죠.”
부제인 ‘아직 복도에 서 있는 그녀들에게’도 같은 의미. 어디론가 통로를 찾아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결국 이방 저방 연결된 복도에서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이라고 한다.
“제 이야기라기보다는 제 안에 숨겨진 그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겠죠. 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자신 안에 잠재된 그 어떤 것을 만난 것처럼 말예요. 자꾸만 노출되려는 제 자신을 많이 죽이고,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담았어요. 애정관계를 기둥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전 본격 애정소설을 쓸 만큼 담대하지 못해요. 다만 사람들의 손등을 핥고 가는 고양이의 혀처럼 감각적인 글을 쓰고 싶어요.”
소설은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했던 미호가 남편의 집을 나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미호는 복도에서 나와 출구를 찾은 것일까? 작가는 미호를 통해 희망을 드러내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 ‘까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그런데 그렇게 까불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앞으로도 저를 가볍게 만드는, 절 용서하고 허락해주는 글을 쓰고 싶어요.”

여성동아 2003년 11월 4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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