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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가을을 기다린 남자

공포·액션·미스테리 넘나들며 연기 영역 넓히는 영화배우 유지태

■ 글·구미화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2003. 08. 29

영화 ‘봄날은 간다’ 이후 소식이 뜸했던 영화배우 유지태가 돌아왔다. 올가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출연한 세편의 영화 ‘거울속으로’ ‘내츄럴시티’ ‘올드보이’가 연달아 개봉하는 것. 부드러운 남자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냉혹함으로 옷을 갈아입은 유지태의 화려한 변신을 엿본다.

공포·액션·미스테리 넘나들며 연기 영역 넓히는 영화배우 유지태

통유리 가득 서울 남대문의 야경이 펼쳐지고,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 그림이 양쪽 벽을 장식한 1백20평 크기의 펜트하우스. 이곳에서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색 와이셔츠에 목을 꼿꼿이 세우고 천천히 넥타이를 맨 뒤 커프스 버튼을 잠그는 남자 이우진.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올드보이’에 출연중인 유지태(27)의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변신이다.
이번 영화에서 유지태가 연기하는 ‘우진’은 어느날 문득 평범한 한 남자(최민식)를 감금했다가 15년 만에 풀어주면서 ‘닷새 안에 내가 누구인지, 당신을 가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면 스스로 죽어주겠다’고 제안하는 냉혹한 캐릭터. 박찬욱 감독은 우진이란 인물이 “위트 있고, 시니컬한 농담을 시도하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는 독특한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지금까지 부드러운 남자, 모성애를 자극하는 남자로 생각되어 온 유지태의 어떤 모습에서 감독은 그가 그런 차갑고 강렬한 캐릭터를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태씨가 굉장히 심각하고, 진지한 바른생활 청년이라 이런 악역을, 물론 ‘연기’는 잘해내겠지만 그런 인물을 납득할 수 있을지 걱정했었어요. 그래서 사실 각본을 건네주고서도 안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하겠다고 하더군요. 유지태씨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기 안의 냉혹함을 잘 이끌어냈어요. 그러면서도 늘 ‘나는 왜 못하나’ 하고 고민해요. 만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죠(웃음).”
박감독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유지태는 특유의 느린 말투로 변신을 위한 자신의 노력을 이야기했다.
“이번 역할을 연기하면서 그동안 내가 감정에 얼마나 솔직했는가를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이번 영화를 위해 어떤 연습을 하기보다는 독서나 음악으로 감정을 다스렸죠. 헝가리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이란 소설을 읽었고, 예전엔 강렬한 사운드의 음악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감독님 취향에 맞춰 재즈나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있어요.”
유지태가 읽었다는 ‘열정’이란 소설은 쌍둥이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만당한 한 남자가 ‘진실’을 알겠다는 일념으로 41년을 기다린 끝에 친구를 만나 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긴 기다림’과 ‘진실 찾기’라는 두 가지 틀에서 소설 ‘열정’과 영화 ‘올드보이’는 통하는 면이 있다.
이런 준비 때문일까. 머리를 한껏 뒤로 빗어 넘기고, 고급스러운 차림새를 한 그의 모습에서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는 대사로 뭇여성들의 가슴을 저리게 했던 부드러운 남자 유지태를 찾기란 쉽지 않다. 촬영장에서 선배 배우 최민식과 동료 연기자 강혜정에게 직접 커피를 타다주는 모습에서 겨우 그의 예의바르고 섬세한 면모가 새어나올 뿐이다.

공포·액션·미스테리 넘나들며 연기 영역 넓히는 영화배우 유지태

이런 유지태를 최민식은 “천연기념물”이라고 표현했다. 젊은 나이답지 않게 진지하고 성실하고 예의바르기까지 하다는 것. 또한 최민식은 “소위 ‘짠밥’과 관계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숙연해지는, 배울 게 많은 배우”라며 유지태를 치켜세웠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스크린에 단 1초 머물렀다 사라지는 장면에서도 그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배우다. 추석 개봉 예정인 SF액션물 ‘내츄럴 시티’를 촬영할 때는 계단을 구르는 장면에서 대역을 쓰는 대신 수차례 직접 몸을 던졌고, 심지어는 무릎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모든 액션을 소화해 제작진으로부터 ‘독종’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이런 고집스러움은 이번 영화라고 다를 게 없다. ‘올드보이’에서 우진이 요가를 하는 장면이 딱 한번 나오는데 유지태는 이를 위해 지난 5월, ‘올드보이’에 합류한 이후 줄곧 요가 학원에 다니며 요가를 수련했다고 한다. 요가 실력을 묻는 질문에 “보여드려야 하나요?” 하고 받아치는 그에게서 여유가 묻어났다.
“짧은 시간에 고난이도 동작을 보여줘야 하는 장면이라 연습이 많이 필요했어요. 우진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고요. 요가 연습하면서 허리 통증도 나았어요. 키도 1cm 자랐고요. 요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할 생각이에요.”
최민식은 유지태가 보여줄 동작이 거의 중국 기예단 수준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지난 2년간의 공백을 팬들에게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올가을 영화 세편을 잇달아 내놓는다. 8월14일, 이미 개봉된 공포영화 ‘거울속으로’에 이어 ‘내츄럴 시티’ ‘올드보이’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것.
“여러 편이 한꺼번에 개봉을 하게 돼 부담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안절부절 못하지는 않아요.”
지난 2년 동안 그는 영화 촬영 외에도 여러가지 일을 했다. 5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며 어학 공부를 하기도 했고, 올해초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강원도 두메 산골에 콕 박혀 중편영화 ‘자전거 소년’을 연출했다. ‘자전거 소년’은 중앙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그의 졸업작품. 쉼없이 연출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해대는 그를 박감독은 유지태가 아닌 ‘유집태’라고 부를 정도지만 정작 본인은 상업영화 연출에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있으나 감독이 되고 싶은 욕망은 없어요. 여기서 감독은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죠. 앞으로도 디지털 영화나 저예산 영화에 계속 관심을 가질 거예요.”
그는 영화 세편을 줄줄이 내놓으며 어느 정도 연기에 자신이 생긴 듯 이제 연극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연극에 대한 관심과 계획은 꽤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연기의 유연성을 키우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편으로 좋은 영화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 관객들에게 좋은 연기로 환원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는 이미 내년 2월과 12월에, 두편의 연극을 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2월 작품은 밝힐 수 없지만 12월에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에 도전한다”고 말했다. ‘갈매기’는 사실주의 연극의 교과서로 불리는 작품. 가을을 앞두고 만난 유지태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부드러운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을 갈고 닦으며 끝없는 도전을 통해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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