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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색다른 도전

첫 장편 연애소설 '솔베이지의 노래' 펴낸 방송인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조희숙 ■ 사진·김성남 기자

2003. 03. 31

어눌한듯한 말투와 친숙한 이미지로 30년간 브라운관을 지켜온 방송인 이계진. 그가 최근 40대 아나운서와 20대 여대생의 사랑을 그린 장편소설 '솔베이지의 노래'를 출간해 화제다. 금세 달궈졌다 식는 가벼운 사랑 풍토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는 그의 곰삭은 사랑학 개론.

첫 장편 연애소설 '솔베이지의 노래' 펴낸 방송인

아나운서 이계진(56)이 색다른 외도를 해서 화제다. 최근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솔베이지의 노래‘를 펴낸 것.
“오랫동안 마음속에 숙제처럼 남은 일을 했다고 해야 할까요. 30년 전 영화 ‘러브스토리‘를 보고 이 소설을 구상했으니까 소설로 완성하기까지 꼬박 30년이 걸린 셈이네요. 성적으로 혼탁해진 세상이지만 사랑의 본질은 순수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소설 ‘솔베이지의 노래‘는 40대 남자 아나운서와 20대 초반 여대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일종의 연애소설. 백혈병에 걸린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남자의 순애보를 파스텔톤처럼 맑고 깨끗하게 그려냈다. 연애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전편 어디에도 한 군데의 성애 장면이 없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대목이다.
“책이나 영화에서 과한 사랑의 표현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마치 강아지들이 아무데서나 교미하는 것처럼 낯부끄럽더군요. 이런 때에 역으로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랑은 결코 성애감정만으로 상대를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제게 사랑이란 비밀스럽고, 가슴 떨리며, 얼굴 붉힐 줄 아는 그런 것이죠.”
대답처럼 그는 작품 속에서 사랑의 표현을 극도로 절제했다. 사랑 이야기임에도 “사랑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쓰지 않은 대신 “그립다” 혹은 “보고 싶다”는 표현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했다. 이는 ‘사랑한다’는 말은 입으로 내뱉는 순간 공허해진다는 그의 생각 탓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아나운서라는 점이다. KBS 아나운서 출신으로 현재 프리랜서 진행자로 활동해오고 있는 그와 가장 밀접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73년 아나운서로 입사해 30년 동안 방송일만 해왔으니 이 직업만큼 잘 아는 분야가 없죠. 물론 모델로 삼은 아나운서가 있긴 하지만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힐 수 없어요.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성격에는 그 사람뿐 아니라 여러 아나운서들의 모습들이 모두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첫 장편 연애소설 '솔베이지의 노래' 펴낸 방송인

이계진는 소설을 통해 사랑의 가벼워진 세태에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제시하고 싶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출신인 그의 글솜씨는 이미 방송계에서 정평이 나있다. 방송국 아나운서로서 겪은 에피소드 모음집으로 6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국!‘을 비롯 총 8권이나 되는 수필집의 저자이기도 하다.
방송국에 입사한 이후 단 하루도 손에서 펜을 놓아본 적이 없다는 그는 오랫동안 소설을 준비해왔다. 강원도 한 시골에서 1년간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아나운서가 되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과감히 포기했다. 당시만 해도 작가는 배고픈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에서까지 작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그는 지난해 꼬박 1년을 소설쓰기에만 매달렸다. 그렇다고 생업을 포기할 수는 없어 매일 조금씩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가 주로 소설을 쓴 시간은 밤 9시부터 11시까지.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한 워드 작업 대신 자필로 직접 소설을 쓰는 ‘원시적인’ 방법을 택했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면 썼다 지웠다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 편리하겠죠. 하지만 제 경우엔 머릿속에 넘치는 생각을 손이 못 쫓아가더라고요. 그냥 내 식대로 노트에 펜으로 써내려가는 것이 익숙하고 편한 방법이었어요.”
자필로 쓴 원고는 지워 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덕분에 그의 소설 노트는 필요한 부분을 오리고 붙인 자국이 많아 본래보다 훨씬 두툼해졌다고 한다.
소설을 쓰는 동안 가장 신경이 쓰였던 것은 혹시 ‘혼자만의 넋두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국문학과 출신이고, 이미 여러 권의 수필집을 내기도 했지만 전업작가는 아니기 때문에 자칫 자기 감정에 빠져 유치한 졸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어느 작가가 연애소설은 사랑이 끝나야만 쓸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나 혼자만의 감정에 빠지면 유치한 넋두리밖에 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항상 써놓은 글들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읽어보기도 하고, 수시로 기술서적이나 교양서적처럼 딱딱한 책을 읽으면서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했어요.”
소설을 완성하고 출간하기 전까지 그는 주변 지인들에게 완성된 초고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소설의 완성을 앞두고 법정스님을 찾았다고 한다. 17∼18년 동안 법정스님과 인연을 맺어온 그는 스님으로부터 ‘향적(香積)’이란 법명을 받았을 정도로 사이가 각별하다.
“송광사 불일암으로 스님을 찾아가 처음으로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었어요. 스님께서 ‘사랑은 따뜻한 눈길, 그리고 끝없는 관심’이라고 적어주시더군요. 반대로 추한 눈길, 소유하기 전까지의 일시적인 관심은 값어치 없다는 것이죠. 스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이 소설을 완성하는 데 큰 힘이 되었어요.”
소설 속 주인공처럼 중년인 그에게도 “사랑의 유혹이 찾아온 적이 있었느냐”는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그는 이내 세련된 답을 내놓았다.
“예전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후보자일 때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았답니다. 그는 ‘매일 마음속으로 간음한다’고 답했다더군요. 아름다운 여성을 돌 보듯 한다는 것은 거짓일 거예요. 저도 사려깊은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게 사실이니까요.”
현재 그는 7년 전 도심에서 벗어나 경기도 한 시골집으로 터전을 옮겨 생활하고 있다. 그는 치열한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도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시골집’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날마다 가까운 동산으로 산책을 나서고, 집 주변에 웃자란 풀들을 베어주고 벽난로의 불을 지필 장작을 패는 일이 즐겁다는 그는 시골살이가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고 한다.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쓴 글을 아니지만 독자들이 사랑의 순수함에 대해 한번쯤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라는 그는 다음 작품을 묻는 질문에 “마음속에 이야기가 차올라야 하겠지만 그때는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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