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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삶과 무대

<버자이너 모놀로그> <록키 호러쇼>로 주목받는 연출가 이지나

“사람들이 진정 보고 싶어하는 무대 만들기 위해 모든 ‘금기’뛰어넘어요”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조영철 기자

2002. 12. 11

오태석의 <태>란 작품으로 런던에 한국연극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속칭 ‘대박’을 터뜨린 연출가 이지나. ‘별난 여자’, ‘튀는 여자’라는 애칭을 지닌 그를 만나 연극배우에서 연출가로 변신한 사연, 10년간 사귄 남자친구가 동성애자였던 평범치 않은 개인사까지 들었다.

 로 주목받는 연출가 이지나
열광적인 마니아들이 추종하는 컬트 문화의 대표작 <록키 호러쇼>가 11월말부터 공연된다. 1973년, 영국의 허름한 소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혼돈과 가치 파괴의 상징으로 찬사를 받으며 영국 드라마 비평상 최고 뮤지컬로 선정된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세번째 무대에 오르는데, 연출은 작년 공연에 이어 다시 이지나씨(38)가 맡았다.
영국에서 유학중이던 99년, 이지나씨는 이 작품의 한국내 공연 판권을 사려고 했을 정도로 누구보다 먼저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인물 중 하나다. 결국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을 통해 국내 무대에 소개됐지만, 두번째 공연인 2001년 무대부터 그가 이 작품의 연출을 맡게 돼 결국 <록키 호러쇼>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별난 록 뮤지컬을 성공시키면서, 또 올해 초 많은 화제를 낳았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속칭 ‘대박’ 행진을 이어가면서 그는 공연 예술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했다.
“영국에서는 이미 73년에 공연된 연극을 이제야 무대에 올리면서 제가 튄다는 등의 평가를 받는 건 좀 그래요. <버자이너 모놀로그>도 그렇죠. 전 그냥 우리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으로 무대에 올린 거뿐이에요. 제가 ‘튄다’거나 ‘파격적이다’라고 하는 시각엔 공감하기 힘든 면이 있어요. 얼마나 제가 보수적인지 모르니까 하는 말이겠죠.”
연출한 작품들이 튄다는 것도, 또 자신이 파격적인 연출가라든가, 튀는 여자라든가 하는 말에도 그녀는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그는 ‘나도 알고 보면 여성스러운 스타일’이라고 말하곤 쑥스러운 듯 크게 웃어 젖혔다. 그는 웃음을 멈추곤 선글라스를 살짝 중지로 들어올렸다.
“그런 시각들에 부담을 느끼는 건 실제로 제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에요. 전 우리 가족을 너무 사랑해요. 모든 것을 내 멋대로 하고 살지만 적어도 하나의 원칙은 지키죠. 어머니, 형제들, 내 소중한 가족들이 나로 인해 부끄러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 그거예요. 결국 우리 사회가 허용하는 선을 넘어설 수 없는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튄다’는 표현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거죠.”
그는 3남6녀중 여덟번째 딸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대구에서 성공한 사업가. 그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형제간 우애가 좋았던 터라 남달리 형제가 많다는 것도 의식해보진 않았다고 한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온통 영화로 뒤덮여 있다. 영화광인 어머니는 일주일에 5일을 극장에 가셨다. 어린아이니까 모를 줄 알고 어머니는 어린 딸을 ‘미성년자 관람불가’ 상영관에도 거리낌 없이 데리고 다니셨다. 그러나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 시절 그 영상들이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있다며 그녀는 웃었다.
“어릴 때부터 전 고집불통이었어요. 그래도 고집 부려 손해본 적은 별로 없었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배가 아팠어요. 선생님한테 말했죠. 나 맹장염이다, 집에 가야겠다. 선생님이 헛소리 말고 양호실에 가서 약 받아오라 했지만 전 끝끝내 우겨 집에 갔어요.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했죠. 엄마, 나 맹장염이야. 엄마가 활명수 주면서 누워있으라 하더군요. 나 혼자 친구 아버지가 하는 외과 병원에 가서 ‘선생님, 저 맹장염이에요. 수술해주세요’ 간청을 했죠. 역시 내 말이 맞았어요. 만성 맹장염이었는데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런 아이였어요. 그냥 그런 아이 있잖아요. 맹랑하달까?(웃음)”

 로 주목받는 연출가 이지나

<록키 호러쇼>의 세 번째 무대를 빛내줄 단원들과 함께. 공연을 앞두고 이들은 매일 저녁 역삼동 ‘오디 연습실’에 모여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연습중 저녁식사 시간을 빌려 인터뷰를 진행하던 차라 누군가 식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음식엔 관심도 없다는 듯, 그는 “난 이야기 중엔 밥 안 먹어”라며 차갑게 응수했다. 상대가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갑자기 그는 애교 섞인 웃음을 토해내며, “정말이야! 그냥 나 술줘”하고 대꾸했다.
순간, 옆 테이블에서 부대찌개에 맛있게 소주를 마시고 있던 한 단원이 갑자기 육두문자를 거나하게 쏟아붓고는, 아차차 하는 표정으로 과장스레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이게 우리 컨셉트라서요. <메이드 인 차이나> 팀입니다. 이번에 저희도 공연합니다.”
이지나는 고개를 15도 정도 꺾어 틀어 그를 보다가 “귀여운 녀석” 하며 깔깔깔 웃음을 토해냈다. 그리곤 다시 중지로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올리며 눈빛을 가다듬는 건 순간순간 터져나오는 ‘망가진’(?) 모습을 수습하기 위한 그의 오랜 습관인 듯싶었다.
“제가 오전엔 <메이드 인 차이나> 연출하고, 오후엔 <록키 호러쇼> 연출을 하고 있어요. 워낙 인기가 있다보니(번역극 배우처럼 과장스레 어깨를 으쓱하며)…. <록키 호러쇼>는 우리 단원들이 너무 연습에 열심이라 고무적이에요. 알고 보니 이것들이 연습하러 와서 연습은 안하고 지들끼리 ‘섬싱’이 났더라고요. 웬일로 꼬박꼬박 나오나 했더니. 이번에도 여섯 커플 나왔어요. 쓰지 말아요. 벌써 다 깨졌으니까.”
그는 다시 요사스럽게 웃어 젖혔다. 여섯 커플? 일견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홍록기, 박종훈, 김세아, 지종은, 이영미 등 출연진이 19명, 그리고 5인조 라이브 밴드 ‘마나’를 껴 헤아린다 해도 총 24명에 불과한데, 그중 여섯 커플이나 탄생했다면 절반이 연애를 한 셈이다. 하기야 선남선녀들이 한 공간에서 서로 엉켜 몇달 동안 호흡을 맞춰야 하는 뮤지컬의 속성상 ‘섬싱’이 없다는 것도 이상한 일.
“저도 그 또래에는 그랬죠. 좋아하던 남자선배가 있었어요. 같이 손 잡고 영화도 보러다니고 한 10년 교제했어요. 중간에 눈치는 챘었지만, 나중에 솔직히 고백하더라고요. 자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게이였어요. 아니, 상처는 없었어요. 한 5년째 사귀었을 무렵, 남자를 좋아하는 걸 저도 느끼고 있었으니까. 난 그냥 그 사람이 좋았고,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는 상체를 흔들며 다시 호방하게 웃어 젖혔다. 맥주를 한잔 들이켰지만 안주는 먹지 않았다.
“그 선배 때문에 유학을 간 건 아니었어요. 그냥 간 거였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딱히 뭐 해야 할지도 몰랐고. 사실 대학을 너무 오래 다녔기 때문에 그런 말도 좀 뭐하긴 한데.”
그는 83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 2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85년, 더 공부해보자는 욕심으로 중앙대 연극과에 재입학했다. 졸업을 94년에 했으니 총 11년의 대학생활을 한 셈이다. 그 기간 그는 아주 다양한 일에 도전했다. 연극배우로도 활약했고, 영화사에도 잠시 취직해 다녔고, 그리고 방배동에 만화가게를 열기도 했다. 만화가게는 1년 만에 장사가 안돼 그만뒀다고 했다.
“연극배우 생활도 좋았죠. 어머 모르셨어요? 제 대표작으로는 <아가씨와 건달들> 그리고 <레미제라블>이 있죠. 근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죠? 아가씨로 나왔을까? 건달로 나왔을까?(웃음) 어찌됐건 지금은 연기 안해요. 한명이 너무 잘하면 딴 배우들이 기가 죽기 때문에(그녀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 농담이고, 사실은 쑥스럽잖아요. 연출하면서 온갖 폼 다 재다가 연기를 어떻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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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일일이 잘못을 지적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전체적인 조화만 이루어지면 동작이 서로 일치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94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언니 중 하나가 일본으로 시집을 간 터라 그 집에 머물며 1년간 어학연수를 받았다. 외국 생활 재미에 빠지기 시작한 그녀는 96년엔 영국 런던으로 떠나 미들섹스 유니버시티에서 예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생활을 통해 수완가로서, 연출가로서 그의 기질은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98년 그는 런던에서 영국, 독일, 홍콩 친구들과 다국적 연극그룹 ‘YIGINA’를 결성, 오태석의 <태>를 공연했다. 그 덕분에 <태>는 한국 연극으로선 처음 런던 무대에서 공연된 작품으로 남게 됐다.
“집이 원래 잘살았어요. 제가 대학갈 무렵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갑자기 사정이 어려워졌는데, 동생이 어머니하고 의류 유통업을 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더라고요. 동생 돈 빼앗아 외국에서 호강했죠(웃음). 근데 또 몇년전부터 사정이 안 좋아졌어요. 귀국하자마자 <태>를 다시 무대에 올렸는데, 그때는 사실 록기(홍록기) 돈으로 무대에 올렸던 거예요. 학생 시절에 제가 차비, 담배값 하라고 몇년에 걸쳐 한 50만원 풀었더니 5천만원으로 돌려주더라고요. 참 괜찮은 녀석이에요. 그 돈이요? <태>하면서 제가 다 해먹었죠, 뭐.”
그는 귀국 직후인 지난 2000년 <태>를 다시 무대에 올렸다. 서울과 런던에서 각각 3주씩 한 이 공연은 <타임>, <인디펜던트>, <스테이지> 등의 서구 언론에 의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당시부터 그를 지원했던 몇몇 스폰서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개그맨 홍록기. 홍록기는 대학 시절,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났는데 워낙 독특하고 재밌는 친구라 그가 특히 ‘귀여워했다’고 한다.
<태>로 연출가로서의 초석을 쌓은 그는 앞서 언급했듯 2001년 <록키 호러쇼>, 2002년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일약 스타 연출가로 떠올랐다. 그리고 올 연말엔 <록키 호러쇼>의 세번째 공연, 그리고 그의 네번째 연출 작품이 되는 <메이드 인 차이나>를 무대에 올린다.
“재밌게 살려고 노력하고, 재밌는 작품 만드려고 노력하면서 재밌게 지내요. 올해 연말은 나름대로 행복해질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데 제가 아무래도(걱정스러운 듯 눈을 찡그리며) 너무 강하거나 드센 여자로 느껴지지 않아요? 부드러운 여자로 나와야 시집 가는데…. 제 인상이 너무 강하죠. 아니에요? 어머, 어머, 정말, 정말?”
그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웃다가 기자를 팔꿈치로 여지없이 찍어눌렀다. 인터뷰가 끝나자 옆 자리의 <메이드 인 차이나>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어휴, XX, 이렇게 말했는데 <록키 호러쇼> 얘기만 나오고 우리 얘기 안 나와봐. XX, 아주 XX을 내버릴 테니까, 알고 보면 우리 싸움 잘해, XX!(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어이고, 죄송합니다. 욕이 저희 컨셉트라서. <메이드 인 차이나> 팀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상체를 팡팡팡 흔들며 웃어 젖히던 이지나씨는 선글라스를 올려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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