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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소식

이휘향 남편 고 김두조씨를 위해 '추모의 방'만든 유퉁

“이런저런 소문 무성하지만 평생 남몰래 좋은 일만 하다 가신 분이에요”

기획·김명희 기자 / 글·장옥경‘자유기고가’ / 사진ㆍ김형우 기자

2006. 01. 04

지난해 9월 탤런트 이휘향의 남편 김두조씨가 타계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향년 64세.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장례를 치르고 50일간 해인사에서 산사생활을 하며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던 이휘향은 끝내 인터뷰를 사절했다. 고인과 친형제처럼 지냈던 탤런트 유퉁이 생전 김두조씨의 모습과 이들 부부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전했다.

이휘향 남편 고 김두조씨를 위해 '추모의 방'만든 유퉁

지난해 9월 탤런트 이휘향(46)이 남편 김두조씨와 사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았지만 이휘향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1월 중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그는 “50일 동안 경남 합천 해인사에 머물며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고 싶다”며 인터뷰를 사절했다.
그런데 탤런트 유퉁(49)에게서 고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두조씨와 친형제처럼 지냈던 것으로 알려진 그에게 “김두조씨와의 인연에 대해 듣고 싶다”고 전화했을 때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형님께서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구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유퉁의 국밥집을 찾았을 때 그는 건물 옥상에 지은 게르(몽고인의 이동식 집)로 안내를 했다. “아무나 이 방에 안 들인다”며 그가 보여준 것은 김두조씨를 위한 추모의 방이었다. 꾸민 지 한 달 열흘 정도 됐다고.
“2004년 4월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오셨는데 그렇게 일찍 가실 줄은 몰랐어요. 저는 몽골 처가에 있다가 소식을 들었는데 믿어지지가 않아서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형님께서 ‘죽음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해요.”
유퉁은 고인에 대해 “평생 존경해온 스승이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전설의 주먹’ ‘밤의 황태자’는 젊은 시절 애칭일 뿐
김두조씨 사진 앞에서 분향을 한 유퉁은 “형님, 오늘은 형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라며 가볍게 묵념을 하고는 방안 구석구석 고인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는 김두조씨가 생전에 보낸 편지를 액자에 넣어 간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곳곳에 걸려 있었다. 한 편지에는 ‘어떤 경우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정의롭게 살고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의리의 사나이가 되고, 약속시간은 항상 먼저 나가 기다리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요즘은 장사도 잘 안 하고 이곳에 와서 형님 사진만 쳐다보고 지냅니다. 저 혼자 향 피우고 묵념하고 기도하죠.”
목이 메는 듯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카세트의 버튼을 눌러 노래를 들려주었다. ‘책가방을 둘러메고 꿈을 먹던 한 소년이 야속한 운명인지 외톨이가 되었네. 아름답게 살자고 착하게 살자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남자답게 살자고…’.
노래가 끝나갈 무렵 그는 “형님이 작사 작곡한 ‘사나이 연가’라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이 노래만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는 그는 “형님을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전설의 주먹’ ‘밤의 황태자’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짧은 청춘시절 방황했을 때의 애칭일 뿐”이라고 말했다.
“형님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자선사업가였고 시를 쓰시고 작사, 작곡, 디자인까지 직접 하신 분입니다. 정치인 박찬종씨는 그런 형님을 두고 ‘정의로운 이 시대의 마지막 야인’이라고 하셨지요.”
유퉁은 방황하던 20대에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주먹왕’이라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무작정 김두조씨를 찾아갔다고 한다. 부산에서 포항까지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그가 운영하던 체육관에 도착해 “얼굴이라도 뵙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더니 김두조씨는 따끈하게 밥부터 먹여주었다고 한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고인은 당시 체육관을 운영하며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두고 있었다고.

이휘향 남편 고 김두조씨를 위해 '추모의 방'만든 유퉁

유퉁은 평생 친형처럼 따르던 김두조씨를 추모하기 위해 자신의 집 옥상에 ‘추모의 방’을 만들었다. 방에는 고인의 사진과 편지 등이 걸려 있다.


“‘인간이 되자, 서로 사랑하자, 참자, 그리고 효도하자’라는 관훈을 내걸고 아이들의 새 삶을 이끄는 형님의 모습을 보며 ‘진정한 사나이는 바로 이런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죠.”
유퉁은 김두조씨를 만난 후 새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 건달생활을 청산하게 됐다고 한다. 또 고인의 권유로 1984년 ‘라운드 보이’라는 연극에 출연하며 새 출발을 하게 됐다고. 하지만 배우 인생은 고달팠다. 유퉁은 힘들 때마다 김두조씨를 찾았고 그때마다 김두조씨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며 힘을 내라고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형님은 남에게 베푸는 천성을 타고나셨어요. 노약자, 장애인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매월 잔치를 열고 감호소 등을 방문해 재소자에게 희망을 심어주셨어요. 선행이 알려지면서 지난 87년과 92년, 97년에는 법무부장관 표창도 받았고요. 제게도 만나면 무엇이든 주려고 하셨어요. 끼고 있던 반지, 옷, 심지어 줄 게 없으면 양말이라도 주셨어요. 지금 신고 있는 양말도 형님이 주신 거예요.”

주말부부로 살며 아내의 연기생활 말없이 후원
유퉁은 곁에서 지켜본 김두조씨와 아내 이휘향의 각별했던 사랑에 관해서도 털어놓았다.
“두 분은 80년대 초 영화배우 문오장씨의 소개로 만났어요. 당시 형님은 가난했지만 형수님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는 끔찍하셨죠. 형수님이 서울 어디서 촬영하고 있다고 전화를 하면 포항에서 서울까지 달려가서 만나고 내려오곤 하셨어요. 5분, 10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형수님을 만나고 온 날은 목소리부터 활기가 넘쳤죠.”
두 사람이 연애할 당시 이휘향은 드라마 ‘수사반장’ 등에 출연하던 주목받는 신인 연기자였고 김두조씨는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고 한다. 집안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어렵게 결혼식을 치렀고 결혼 초기에는 함께 바닷가 옆에 텐트를 치고 외동아들을 업고 포장마차를 운영했다고 한다.
“얼마나 금실이 좋으셨는지 몰라요. 형님은 돈을 아끼려고 2백50원짜리 자장면을 드시면서도 촬영장에 계신 형수님을 위해서는 자연산 회를 떠서 비행기로 날라 스태프들에게 대접할 정도였죠.”
김두조씨는 평소 아내를 ‘이 여사’라고 부르며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아내의 연기생활에 방해가 될까봐 주말부부로 살며 아내의 일에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하루는 서울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에게 전화로 “나도 이렇게 보고 싶고 외로운데 여자 혼자 얼마나 어려울까” 하며 아내를 염려했다고.
“오죽했으면 ‘주말부부’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셨겠어요? 또 외국 여행을 가면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무슨 선물을 사갈까’ 고민을 하기도 하셨죠.”
김두조씨는 지난 2001년 자신이 운영하던 지방의 한 휴게소를 한동대학교에 기증하는 등 선행을 펼쳤다고 한다.
김두조씨를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한다는 유퉁은 “평생 부모처럼 따르던 형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서운한 마음도 있지만, 조용히 가고 싶어하셨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며 “죽는 날까지 추모의 방을 만들어놓고 형님을 그리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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