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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고문 서옥자 교수의 특별한 사랑

기획 · 김명희 기자 | 글 · 김지은 자유기고가

2015. 09. 15

광복 70주년. 서옥자 교수에게 올해 8월은 조금 더 특별하다. 그녀가 미국에서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연인이자 동지였던 미국 하원의원 레인 에번스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름이다. 그를 떠나보낸 후에야 그녀는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에 대해 입을 열 용기를 냈다.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고문 서옥자 교수의 특별한 사랑
왜 지금에서야 레인 에번스 의원과의 로맨스를 끄집어냈을까. 서옥자 교수를 만나기 전 그의 최근 저서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세창미디어)를 읽으며 가장 강하게 들었던 의문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공식 제기한 인물로 잘 알려진 레인 에번스(1951~2014) 의원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 2012년 5월이었다. 그것도 파킨슨병으로 거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인 그를 붙잡고 눈시울을 붉히다 그의 후견인들로부터 쫓겨난 것이 전부였다. 2006년 병으로 정계를 공식 은퇴한 레인 에번스 의원은 이후 줄곧 서 교수와의 접촉을 차단당한 채 요양원에서 지내왔다. 과거 아무리 열렬한 로맨스가 펼쳐졌다 한들 8년이 넘는 시간을 떨어져 지냈고,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그 흔한 전화 한 통 제대로 주고받을 수 없었던 사이. 안타까움과 애틋함은 있겠으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분의 뜻을 이어가고 싶어서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약한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

서 교수에게 레인 에번스는 일생의 사랑이었다. 세상을 떠난 지금도 서 교수에게는 그가 여전히 연인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를 기리는 재단을 만들고 그 뜻을 펼쳐나가는 데 남은 생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니 아마 앞으로도 그는 단 한 사람, 서 교수의 연인일 것이다.

서 교수의 이력은 조금 독특하다.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으로 돌연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에서 하얏트 호텔 판촉부장으로 일했다. 그 전에는 캐세이패시픽 항공사의 승무원으로 세계의 하늘을 누볐다.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직업 자체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기에 외국계 항공사의 승무원이 된다는 건 당시로선 상당한 모험이자 파격이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스튜어디스를 ‘하늘을 나는 외교관’으로 표현한 신문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보는 것처럼 충격적이고 신선한 직업이었다. 현재는 미국 버지니아 주 컬럼비아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난해까지는 워싱턴 신학대학에서 상담심리학 교수로 20여 년을 보냈다.



일면 화려해 보이는 그녀의 이력 어디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의 연결고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혹시, 그의 오랜 연인이었다는 에번스 의원의 영향이었던 걸까. 한국인 여성이 미국인의 영향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정은 한편으로 이상하게 여겨질 법도 하지만 상대가 레인 에번스 의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레인 에번스 의원은 지난 2007년 7월 30일 위안부 결의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던 내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로 납치되어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합당한 배상을 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해왔다. 1999년 11월, 미 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의회 회의록에 기록을 남긴 사람도 바로 에번스 의원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일어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소리를 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정의롭고 올바른 일들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힘을 그들에게 빌려줍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행동에 옮기고,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적의 말보다 친구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미 국회 기록 Vol. 145, Issue 156, E2307 : ‘일본군 위안부’, 1999. 11. 08


마틴 루서 킹의 연설문을 인용한 명연설이었다.

당시 서 교수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 공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활동만큼은 열 일 제쳐놓고 뛰어갈 만큼 열성적이었다. 추운 겨울날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으면서도 그런 채로 기금 모금을 위해 비를 쫄딱 맞아가며 기관이며 사무실, 음식점 등을 찾아다녔다. 그런 그녀에게 ‘우리가 침묵을 지킨다면 사람들은 적의 말보다 친구의 침묵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에번스의 연설은 가슴을 더욱 뛰게 만들었다.

에번스 의원과 서 교수가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미 국회 연설이 있은 한 달 후,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정기 총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마침 서 교수가 위원회 사무총장직을 맡게 된 날이었다. 서 교수는 당시의 에번스 의원을 먼발치에서 바라만볼 수밖에 없는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녀의 열성적인 모습이 에번스 의원의 눈에 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휴머니스트와 사랑에 빠지다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고문 서옥자 교수의 특별한 사랑
두 사람 사이에 비밀스러운 감정이 싹튼 것은 정기 총회에서 우연히 인사를 나눈 날로부터 2개월 후였다. 에번스 의원이 주최한 후원 행사 자리에 참석한 서 교수는 그날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회장으로부터 평소 존경하던 에번스 의원이 실은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밝고 천진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에번스 의원에게 매료됐다. 병마와 싸우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였다. 그를 바라보는 에번스 의원의 눈동자가 유난히 깊고 푸르게 빛났다고, 그렇게 서 교수는 기억하고 있다.

“에번스 의원은 ‘국적을 초월한 휴머니스트’였어요. 조지타운 법대를 졸업한 그는 변호사가 되어 다시 고향인 일리노이로 돌아갔어요. 그곳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곤 했죠. 어떨 땐 정말 바보가 아닌가 싶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어요. 자기가 가진 걸 지인들에게 모두 나눠주고선 그걸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1983년 하원의원이 된 이후에도 그의 관심사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내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곳곳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약자들의 편이 되고자 했다. 그런 그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커다란 관심사였다. 때로 그의 진심은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상대 정당 소속 정치인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일 만큼 큰 힘을 발휘했다. 2006년 공화당 소속이던 헨리 하이드 외교위원장이 에번스 의원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결의안을 지지했던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비록 2006년 말 본회의 상정은 무산됐고, 에번스 의원은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지만 2007년 7월, 다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고 하원 회의를 통과할 수 있었던 데는 에번스 의원의 진심 어린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서 교수와 에번스 의원 사이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싸운다는 공통점 외에도 수많은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랑’의 결실이라 생각하는 결혼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에번스 의원은 결혼 대신 평생 자유와 독립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서 교수 또한 결혼에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했지만 에번스 의원의 병이 악화돼 법정 후견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에게 결혼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8년간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에번스 의원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 1월, 서 교수와 함께 한국을 다녀가면서부터였다. 가뜩이나 건강이 좋지 않던 그가 장거리 비행으로 무리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그는 서 교수의 도움으로 겨우 몸을 추슬러 일정을 소화했다. 미군장성들을 만나고, 나눔의 집을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간의 못 다한 이야기들도 나누었다. 다음날 부산의 고신대학교에서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지만 식사조차 하기 힘겨운 상태였던 그는 결국 연단에 오르지 못하고 서 교수가 대신 답례사를 읽어야 했다. 서 교수의 울음 섞인 답례사에 청중의 눈시울도 함께 뜨거워졌다.

한국에서 오랜만에 에번스를 재회한 서 교수의 가족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딸의 남자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 하던 어머니는 결국 헤어지는 순간 눈물을 보였다.

“왜 하필 네가 저 사람을 돌봐야 하는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똑똑하고 야무진 딸이었다. 그런 딸이 결혼할 나이가 훨씬 지나 갑자기 유학을 떠났을 때도, 화려한 경력을 뒤로하고 신학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의 속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서 교수도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에번스 의원의 병세가 악화될수록 그에게는 하나에서 열까지 서 교수의 손길이 필요했다. 자그마한 동양인 여자가 거구의 서양인 남자를 돌보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씻기고 침대에 옮기려면 젖 먹던 힘까지 보태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혼자 용변을 보기 힘든 그를 위해 남자 화장실까지 드나들며 “익스큐즈”를 외쳐야 했다.

“처음엔 한 남자로 만났지만 그는 제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에번스 의원이 서 교수에게 청혼을 한 것은 병세가 악화돼 은퇴를 결심하고 고향인 일리노이의 록아일랜드로 내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에번스 의원은 죽음의 문턱을 향해 매일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삶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청혼은 서 교수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몇 년 전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을 것이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고문 서옥자 교수의 특별한 사랑
두 사람의 결혼은 그의 법정 후견인이던 동생의 반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동생과 결별을 선언한 에번스 의원은 서 교수에게 동생 대신 법정 후견인이 되어주길 청했지만 자신으로 인해 에번스가 형제들과 등을 돌리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던 서 교수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문제는 이후에 일어났다. 에번스 의원은 서 교수가 잠시 한국에 다녀오는 동안 몇 번이나 법정 후견인을 바꿨지만, 그들은 에번스 의원이 은퇴 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평화로운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서 교수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했다. 한국 정부에서 에번스 의원에게 그간의 노고에 감사의 뜻으로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전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안고 서 교수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정작 에번스 의원에게 그 소식조차 전할 수가 없었다. 전화는 차단되었고, 지인을 통해 그에게 간단한 안부를 전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훈장은 1년여가 지난 후에야, ‘옥자’라는 이름을 그의 앞에서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전달되었다.

“저는…. 레인이 다시 건강해져서 제게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에번스 의원과 연결되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8년 동안을 기다리며 그가 건강을 되찾기만을 기도했다고 한다. 소송을 걸었다면 사실혼 관계도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녀의 인맥 정도면 다른 방법도 충분히 있었을 것인데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는지 답답했지만 서 교수는 아픈 그를 가운데 두고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가뜩이나 몸도 가누기 힘든 그가 동생들과의 문제로 법정을 오가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 나의 소명

그의 장례식 이후 서 교수는 에번스 의원이 살아 있다면 무엇을 가장 간절히 원할까를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에번스 의원은 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그라면 적어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주저앉아 우는 서 교수의 모습을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낮은 곳에서 낮은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그의 뜻을 이어가는 것만이 그의 죽음 앞에 지난날을 덮어두지 않는 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주저앉아 있던 서 교수의 두 다리에 힘이 솟구쳤다.

지난 4월, 일본 아베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당시 서 교수는 미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아베의 과거사 책임 회피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아베 정권 이후 변화하고 있는 미일관계가 한미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이 공조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최근 빠른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두 나라가 공조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어서 우려하는 바가 크다.

“미국은 굉장히 실리주의적인 나라예요. 우리와는 ‘friend(친구)’의 개념도 많이 달라서,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로 잘 지내던 사람이 이해관계에 따라 하루아침에 냉담해질 수 있지요. 국가 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미국 의회 내의 기류가 심상치 않게 바뀌고 있는 것이 이를 대변합니다. 아베 정권 이후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에번스 의원이 정계에서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미 의회 내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에번스 의원의 뜻에 공감하고 동참하고자 하는 흐름이 있었지만 몇 년 사이에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그는 지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수차례 미국으로 초청해 하버드대와 미시간대 등 미국 내 45개 대학을 돌며 증언 행사를 개최했다. 2001년에는 황금주 할머니, 2003년에는 최갑순 할머니, 2005년에는 강일출 할머니가 미국 증언 투어에 나섰다. 2007년에는 이용수 할머니가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서 교수는 그럴 때마다 할머니들을 집으로 모셔 직접 한국 음식을 해드리며 보살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는 더 바빴다. 책 출간으로 인터뷰가 줄을 이었고, KBS ‘아침마당’ 광복 70주년 특집 편에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지난 7월 21일에는 국회 입법조사처와 길정우 새누리당 의원이 ‘韓日역사 이슈에 대한 미국 정계의 인식과 쟁점’을 주제로 개최한 전문가 간담회에 초청되었다. 그 자리에서도 서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미국 정계의 인식과 동향에 대해 우려의 뜻을 표하는 발언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녀는 “동아시아 이슈에 대해 친일적 보수 세력이 의도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민주당의 경우는 우호적인 시각이 강하다”고 미국 내 분위기를 전하고, “한국을 지지하는 미국 정치인과 한국계 활동 단체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이뤄지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도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극도로 예민해진 반일 감정으로 그들과 맞서 싸우려했지만 그런 방법만으로는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원으로 활약하며 주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주역인 일본계 미국인 혼다 의원을 예로 들었다. 당시 혼다 의원은 미국 사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일본인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미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청문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 힘쓰고 병석에 있는 에번스 의원을 대신해 결의안을 발표한 것도 혼다 의원이었다.

“지금도 일본 본토와 세계 곳곳에는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하고 이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저는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그런 이들과 많은 일을 함께해왔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일본 정부 타도가 아닙니다. 일본이 세계적으로 지지와 존경을 받으려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 다른 화해의 길입니다.”

사진 · 홍중식 기자

디자인 · 최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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