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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차와 음악, 밥 한 끼의 인연

코리안 킨포크

글·김명희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2014. 08. 14

초의스님 제다법의 맥을 잇는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이 좋은 차를 가져온다는 소식에 평소 그의 차를 흠모하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좋은 음식과 음악이 빠질 수 없었다. 더불어 소통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믿는 이들의 즐겁고 따뜻했던 저녁 시간.

차와 음악, 밥 한 끼의 인연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라는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의 구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기분 좋은 설렘을 갖게 한다. 한 주의 딱 한가운데인 수요일 저녁, 저마다 아름다운 삶의 나이테를 그려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중심에는 김행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과 그의 멘토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이 있다. 박 소장이 향기로운 차를 준비한다는 소식에 한복 연구가 이혜순, 파이프오르간 제작 마에스트로 홍성훈·플루티스트 김은경 씨 부부, 홍차 전문가 박정동, 언론인 최영재 씨 등이 달려온 것이다. 자연스레 요즘 트렌드로 떠오른 킨포크 테이블(Kinfolk Table)을 연상케 하는 모임이 됐다. 킨포크 테이블은 서로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모여 저녁을 준비하고 식사를 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아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매거진이다.

18:30 좋은 차에 취하다

차와 음악, 밥 한 끼의 인연

1 이날 모임을 기획한 김행 한국양성평등교육 진흥원장. 2 박동춘 소장은 차는 이를 향유했던 선승이나 문인들이 추구한 정신세계처럼 담박한 맛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박동춘 소장이 전남 순천 대광사지 대나무 숲에서 자란 야생차나무에서 직접 채집, 제다한 동춘차를 개봉하자 깊고 은은한 향이 번졌다. 차인들 사이에서 동춘차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은 그의 차를 기운이 좋고 시원한 향이 난다고 평했고,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소장은 그 평화로운 맛을 높이 샀다. 그가 옥탕관에서 우려낸 차를 따라주며 향이 날아가지 않게 뜨거울 때 마셔보라고 권한다. 약간 쌉싸름한가 싶더니, 곧 맑고 기분 좋은 향이 입안에 번진다. 우리 차의 감상법은 선고후감(先苦後甘), 즉 처음엔 쓰다가 나중엔 단데 그 맛의 변화를 느끼는 게 포인트라고 한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서 유학을 전공한 박 소장은 30여 년 전 이화여대박물관으로부터 지금은 돌아가신 응송 스님의 장서를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해남 대흥사로 갔다가 스님으로부터 초의 선사의 다풍을 전수받았다. 고려시대 왕실과 불교 문화가 빚어낸 음료 문화의 결정체인 차는, 이후 고려의 몰락과 함께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조선 후기 초의 선사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된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이 차를 매개로 그와 교류했으며 특히 추사는 차를 구걸하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로 초의 선사의 차를 사랑했다고 한다.

‘동다송’ ‘다신전’ 등 초의 선사가 차에 관해 집대성한 문헌들을 보면, 옛사람들이 차의 효능을 어떻게 최대한으로 이끌어내 몸을 이롭게 할 것인가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차나무를 어디에서 어떻게 재배하고, 채다는 언제하며 보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어떤 물을 사용하며 온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 깊이를 추구하자면 끝이 없는 것이 차의 세계다. 박 소장은 이 중에서 특히 불의 이치가 차의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는 차를 우릴 때 열탕을 고집한다. 펄펄 끓인 물을 기포가 막 가라앉는 정도에서 뜨거운 채로 붓는 열탕법은 그가 응송 스님에게 전수받은 비법인데, 동춘차의 시원하고 담박한 맛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이날 박 소장이 준비한 찻잔은 고려청자. 묵직한 듯 부드러운 생김새가 녹차 맛과 잘 어우러졌는데, 박 소장은 다구나 다례는 차의 본질이 아니며, 차는 간소하게 다루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차를 주로 향유했던 문인이나 선승들에게, 차는 머리를 맑게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매개였다. 차맛은 그들이 추구하는 문화처럼 담박한 것이 핵심인데, 그 본질은 사라지고 행위만 남은 것 같아 안타깝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차를 한 잔 더 청해 마시니 머리가 가벼워지고 몸이 개운해진다. 좋은 다구에 격식을 차려 마셔야 한다는 편견에서 놓여나니 차와 더욱 가까워진 듯하다. 선승이나 문인들이 이런 경지에서 참선을 하고 담론을 나누지 않았을까. 옛사람들이 차를 사랑하고 즐겨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차와 음악, 밥 한 끼의 인연

3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 씨의 단아한 자태는 한복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4 이날의 셰프 최영재 기자는 맛깔난 음식과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5 홍차 전문가 박정동 씨는 박 소장의 우리 차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6 독일에서 공부한 파이프오르간 제작 마에스트로 홍성훈 씨는 차와 한복 등 우리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19:00 부엌에서는

박동춘 소장이 차를 시연하는 동안 주방은 저녁 준비로 분주했다. 이날의 셰프는 최영재 ‘아시아투데이’ 기자. 김은경 씨와 김행 원장이 보조를 자청했다. 그는 10년 전, 성공한 남자들의 요리 비법을 담은 ‘그래서 그들은 부엌으로 갔다’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으며 중식 조리사 자격증도 갖고 있다. 이 모임에 관한 이야기가 처음 오갈 때부터 요리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던 그가 들어서자 주방이 꽉 찬 느낌이다. 능숙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파, 양파, 브로콜리 같은 채소를 다듬고 씻는 모습이 듬직하다. 메인 요리는 ‘배 프로슈토’와 ‘닭다리 브로콜리 볶음’. 생고기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이탈리아 전통 햄 프로슈토는 원래 멜론과 함께 많이 먹지만, 다소 짠맛 때문에 배와 함께 먹는 것이 우리 입맛에는 더 맞는다는 것이 최 기자의 설명. 닭다리 볶음 역시 원래 레시피는 닭 날개로 하는 것이지만 이날따라 마트에 닭 날개가 똑 떨어진 탓에 닭다리로 대체됐다.

20:00 웃음의 식탁

차와 음악, 밥 한 끼의 인연
모두가 가장 기다렸던 시간이다. 잔칫날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부엌 앞을 서성이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주방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 있던 이들은 테이블 위에 음식이 놓이자 어린아이처럼 두 손을 모았다. 소박한 만찬에 최영재 셰프가 한 가지 찬을 더 보탰다. 종군기자 시절의 무용담이다. 1999년 동티모르 내전 당시 그곳을 취재하러 들어갔던 한국 기자는 5명. 하지만 전세가 급박해져 시가전까지 벌어지자 CNN·AP·로이터 같은 외신 기자들은 물론 한국 기자들이 모두 철수하고, 그와 홍콩·포르투갈에서 온 여기자 등 3명만 호텔에 남았더란다. 이곳에서도 식사 당번은 그였다. 그는 KBS 취재팀이 남기고 간 라면과 감자로 정성껏 식사를 준비한 다음, 테이블에 호텔 비품 창고에서 찾아낸 새하얀 식탁보를 깔고 두 여기자를 불러 의자를 빼주며 식탁 앞에 앉게 했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의 ‘최후의 만찬’이 될지도 모르는 식사에 대한 그 나름의 예의였다. 그렇게 식사를 반 정도 했을 즈음 거짓말처럼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기관단총 총격이 빗발치듯 날아들더란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 공포로 먹은 것들이 밖으로 다 쏟아져 나왔다. 혼비백산해 살 곳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뛴 시간이 3시간 정도 됐다고 느꼈을 때 다시 사위가 잠잠해졌다. 시계를 보니 실제로 흐른 시간은 3분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입담 덕분에 식사 분위기가 한층 흥겹게 무르익는다.

이야기는 이혜순 씨의 단아한 한복으로 옮아갔다. 그는 “계절마다 한복을 입는 것이 매일 존 갈리아노의 의상을 입는 것만큼이나 럭셔리하다”고 말하는 한복 디자이너다.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와 ‘쌍화점’에서의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한복이 그의 손끝에서 비롯됐다. 이날은 소(素)색 저고리에 현(玄)색 치마를 매치했는데, 그에 따르면 서양의 아이보리색인 소색은 한자로는 바탕을 의미하며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색깔이다. 현색은 아침 해가 뜨기 전의 하늘색이라고 한다.

파이프오르간 마에스트로 홍성훈 씨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오래전부터 이혜순 씨의 팬이었노라는 뜻밖의 고백을 했다. 언젠가 화보에서 본 그의 한복에 마음을 빼앗겨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를 찾아 광장시장에 갔다가 이혜순 씨가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말을 듣고 좌절해 돌아선 적도 있다는데, 결국 만날 사람은 이렇게 만나진다.

차와 음악, 밥 한 끼의 인연

1 박동춘 소장이 직접 제다하는 동춘차는 맛이 맑고 개운하다. 2 3 배 프로슈토와 연어 샐러드. 프로슈토는 원래 멜론과 많이 먹지만 달콤한 배와도 맛이 잘 어울린다. 4 홍성훈 씨가 바흐의 미사곡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왼쪽은 아내인 플루티스트 김은경 씨.

21:30 음악은 마음을 싣고

입이 호강을 했으니 이제 귀가 호사를 누릴 차례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게 음악의 힘이지만, 알면 알수록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걸 국내 유일의 파이프오르간 마에스트로 홍성훈 씨의 해설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는 독일의 스승 밑에서 11년 동안 공부하고, 독일 정부가 공인하는 마에스트로 자격증을 딴 장인이다. 독일은 기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도제로 이뤄진다. 도제 기간도 3년 반으로 정해져 있어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올라간다. 어떤 건 석 달만 배워도 될 성 싶은 게 있는가 하면, 어떤 건 3년 반으로는 어림도 없지 싶은 것도 있는데도 그렇단다. 그렇게 처절하게 실력을 닦은 후 일정 경력을 쌓고 나면 마에스트로 자격 시험을 볼 수 있는데, 기회는 단 두 번뿐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가 시험 감독에게 두 번 떨어지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당신 아들이 시험을 볼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단다. 그 사람은 할 수 없지만 가업을 잇고 싶다면 아들이 대신할 수는 있다는 얘기였다고.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에서는 대형 교회나 연주 홀에서만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악기다. 오르간 하나당 제작 기간도 1~5년 정도 걸린다. 홍성훈 씨는 지금껏 17개의 파이프오르간을 만들었는데,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소성당에도 그가 제작한 오르간이 설치돼 있다.

그가 독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뭐든지 합리적이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독일은 소리에서도 그런 특성이 드러난다고 한다. 모든 소리가 날카롭고 명료해서, 그런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지면 귀가 아프다는 것. 그런 이유로 그는 요즘 파이프오르간에 한국적인 소리를 실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데 그런 시도에 대해 악기를 망친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소리가 지저분하다고도 하시고. 거문고가 예쁜 소리만 나나요? 소리가 탁탁 튕기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잖아요. 거기에 청아하고 예쁜 단소가 어우러지면 단소 소리가 날아가면서 아주 기가 막힌 음악이 되는 거죠.”

그가 설명을 이어가는 사이, 오디오에서 바흐의 미사곡이 흘러나왔다. 바흐가 살았던 18세기 독일에선 성당 안에서 음악을 필사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바흐는 매주 주 중에 새로운 곡을 작곡해, 토요일에 성가대에 연습을 시킨 뒤 일요일에 발표했다. 이것이 바흐가 그 어떤 음악가보다 많은 곡을 작곡한 이유다. 눈을 감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자 경건하고 웅장한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유럽으로 날아가 고풍스러운 대성당에 들어간 듯하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모두 그러하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충만함이 마음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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