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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Literature Travel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부와 욕망 좇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 담긴 그곳

글&사진·남기환 여행작가

2014. 07. 02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 바다의 주요 어장마다 ‘파시(波市)’라는 게 있었다. 풍어기에 거래의 편의를 위해 어선과 상선들이 바다에서 만나 열리는 생선 시장이었다. 많게는 수백, 수천 척의 배들이 몰려드는 장관을 연출했다 다시 어종과 수확기를 따라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작가 박경리의 ‘파시’는 이처럼 사람들이 욕망과 사랑, 미래와 부를 좇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50년 전 쓰여진 ‘파시’, 현실의 데자뷔

한반도가 온통 한국전쟁의 비극을 치르는 동안, 1950년에서 1953년 사이의 통영은 그나마 포성과 살육이 비껴간 몇 안 되는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잠시 인민군 점령기를 거치긴 했지만 피비린내 나는 전장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통영으로 몰려들었다. 대표적 피난지인 부산이 있었지만, 멀지 않은 부산이나 마산과는 또 다른 안도감을 주는 곳이었던 듯 부산을 거쳐 혹은 내륙을 따라 전쟁을 피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통영은 부산과는 또 다른 ‘전쟁 특수’가 있었던 것으로도 전해진다.

장편 소설 ‘파시’는 딱 이즈음의 통영을 배경으로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남녀, 그들을 둘러싼 가족과 세대 간의 사랑과 탐욕, 그리고 희망과 도피를 모두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 박경리가 ‘동아일보’에 1964년부터 10개월간 연재한,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 뒤부터 쓰여진 작품인데, 그래서인지 전쟁으로 인해 뒤틀린 인간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때론 마음 저릿하게, 때론 섬뜩하게 가감 없이 그려지고 있다.

독특한 것은 분명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쟁의 직접적인 형체는 소설 전반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통영이 지녔던 특수한 정황과 분위기를 제대로 간파해낸 작가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통영은 작가의 고향이라는 점이 그 연관성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파시’는 포화에 떠밀려 부산까지 내려온 북녘의 처녀 수옥이 때마침 부산에 들른 조만섭의 눈에 띄어 함께 통영으로 가는 배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조만섭은 피난길에 여성으로서 큰 고통을 겪은 수옥이 불쌍해 거두었다가 시집까지 보내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소설에서 탐욕을 상징하는 인물인 밀수업자 서영래의 눈에 수옥이 들어오면서 그는 수옥을 첩으로 들이려는 욕망을 품게 된다. 통영으로 온 수옥은 순탄치 않은 시간을 보낸다. 역시 배금주의의 전형으로 묘사되는 조만섭의 후처 서울댁의 경계가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서영래가 수옥을 탐낸다는 사실을 알고 수옥을 서영래의 밀수품과 맞바꿀 ‘거래’를 도모한다. 욕망을 외면하지 않고, 그 욕망을 거래하면서까지 살아남으려는 이들의 잔인함에 책장을 넘기는 내내 긴 한숨이 이어진다.



‘토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6백여 페이지의 긴 소설에서 인물들은 다각적으로 등장한다. 조만섭의 딸 명화는 조만섭의 전처인 어머니가 정신을 놓은 나머지 죽었다는 사실을 낙인처럼 지니고 살아간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를 사랑하는 응주는 통영의 유지 행세를 하는 병원장 박 의사의 아들이다. 아들을 번듯한 집안의 처자와 연결시키려는 박 의사의 또 다른 욕망은 복잡한 집안 내력은 물론 자신의 집안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명화와 아들 응주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 딸 명화를 응주와 맺어주고 싶은 조만섭의 노력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 반대의 진짜 이유는 소설 후반부에야 드러난다.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그 이유(이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으면서 확인하길 바란다)를 홀로 알게 된 명화는 응주에게 결혼을 약속하는 말만 남긴 채 일본행 밀항선에 오른다.

또 다른 이들의 서사도 존재한다.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전쟁으로 몰락한 사연을 지닌 학수와 학자 남매. “모두 죽어 자빠지는 판국”에 세상에 희망이란 없다는 듯 살던 학수는 서영래의 손아귀에 ‘넘겨진’ 뒤 어느 날 울고 있는 수옥의 모습을 보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개섬이라는 곳으로 도피 행각을 벌인다. 반면 학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닥을 가늠하기 힘든 자기 비하와 원망으로 자신의 가치를 내동댕이치는 선택을 한다. 결국 자신을 구제할 것은 돈밖에 없다는 생각에 술집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사랑이라는 희망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오빠와는 다른 모습으로 삶의 방향타를 돌려버린 셈이다. 사회가 송두리째 혼란에 빠져든 전쟁이라는 상황은 그들의 행태를 ‘적당히’ 이해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 박경리가 지닌 인물에 대한 탁월한 설정과 한 인물이 그 자체로 서사가 되는 이야기 구조는 긴 소설을 읽어나가는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한다.

독특한 점은 작품을 읽어 내려가는 어느 순간부터 이 소설이 한국전쟁의 그 ‘난리통’을 겪고 있는 시점을 담고 있음을 잊은 채 몰입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인물들의 행태와 그들 안에 내재하거나 혹은 사악하게 드러내는 욕망과 애증이 마치 전쟁을 전혀 겪고 있지 않는 듯 이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하게 다가오고 그려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상이야 난리가 나서 뒤엎어지든 말든 스스로의 욕망과 감상에만 지극히 충실한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읽어가면서 섬뜩하고 마음 서늘해지는 경험을 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던 인물들 간의 재회도, 화해도 없이 끝이 난다. 수옥에게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킨 학수는 군인으로 징집돼 떠나고, 명화는 일본 밀항선에 오르며, 그녀를 떠나 보낸 응주도 도망치듯 군에 입대한다. 피난의 목적으로 혹은 부를 찾아 몰려들었던 이들이 상처일 듯 희망일 듯 쉬 단정하기 어려운 관계들을 엮어가던 1950년대 통영은, ‘파시(波市)’가 끝난 뒤 수백 척의 배들이 일시에 빠져나가 텅 빈 바다만 남듯 ‘인간의 떠남과 이별’로 그 북적이던 욕망의 시장을 파시(罷市)하고 있었다.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통영항이 그리는 풍경, 사람이 그린 골목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 가운데 광역시 정도 규모가 아님에도 2박 3일의 시간은 들여야 조금 ‘열심히’ 봤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곳을 들라면 그 으뜸에 통영을 꼽고 싶다. 또한 많은 이들이 여러 차례 찾아도 지루함 없이 머물 수 있다고 말하는 곳도 통영이다. 흥겨운 뭔가가 있는 것도, 세련된 쇼핑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처음 통영을 찾은 이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오히려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곳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통영을 찾을 때마다 눈과 마음이 아늑해지는 기분과 충무김밥을 입에 넣었을 때의 그 중독적인 달큼함도 여전하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통영을 찾아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이왕에 ‘파시’를 들고 다시 통영을 찾았으니, 이 여정은 통영항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겠다. 수옥이 조만섭과 함께 부산에서 배를 타고 들어오며 ‘파시’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니까. 통영항이라 하면 보통 주변 섬 등으로 향하는 배들이 출발하는 통영여객터미널 일대 서호동의 항구와 여기서 동쪽으로 이웃한 중앙동의 항구를 모두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몇 번을 찾아도 여전히 발길이 먼저 향하고 더 오래 머무는 곳은 오가는 여객선의 분주함 없이, 크고 작은 어선들이 도로와 바투 들어앉아 바다와 도시의 경계를 배들이 지어주고 있는 중앙동의 항구다.

이곳은 특별히 ‘강구안’이라고도 불린다. 바다가 육지로 밀치고 들어온 것인지, 육지가 바다에게 덜렁 제 자리 내어준 것인지 항구는 마치 뭔가에 베어 먹힌 듯 바다가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와 있다. 그러다 보니 육지는 더 가깝고 파도도 잔잔해 이만한 항구 명당이 또 없겠다 싶을 정도다.

구름과 하늘색이 고스란히 반사되는 맑은 바다와 그 위에 뜬 배들, 그리고 완만한 언덕을 그려가며 뻗은 사람의 도시가 ‘그림 같다’는 상투적인 수식이 절로 튀어나오게 한다. 왜 이곳을 두고 ‘한국의 나폴리’며, ‘아말피 해안’이며 하는 비유를 아끼지 않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풍경이다.

바다로 향한 풍경을 더 시원하게, 그리고 통영 강구안 일대와의 어우러짐을 볼 수 있는 곳은 동피랑이다. 강구안에서 ‘동쪽 절벽(혹은 언덕)의 마을’이란 뜻을 지닌 동피랑은 원래 통영항 최고의 뷰포인트로 오랜 시간 사랑받아오다 ‘벽화 마을’이 되면서 통영 여행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을 주민보다 골목길을 오가며 벽화에 기대 사진 찍는 여행객 수가 훨씬 더 많아진 지 오래다. 옛 항구 마을의 조악한 길과 소박하다 못해 아슬아슬했던 담벼락이 멋스러운 예술 마을 길로 바뀐 것이다. 이를 딱히 좋다고만 바라볼 수는 없지만, 통영을 젊은 사람들도 즐겨 찾는 ‘여행지’로 대접받게 한 주역이었음은 분명하다.

벽화에 눈길을 주고, 동시에 항구 마을 사람들의 거친 담벼락과 문설주를 쓰다듬어보기도 하며 동피랑의 언덕을 오른다. 저 아래로 강구안의 풍경이 시원하다. 바다도 넓고 멀다. 조밀조밀 어깨 맞닿아 정박한 어선들이 도심의 항구라는 걸 잊게 할 만큼 아늑하고 고요하다. 사람의 손으로 그려낸 벽화로 어우러진 마을도 좋다지만 이 순간 눈앞을 가득 메운 이 풍경에 비할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의 발자국으로 꽉 찬 거리

동피랑을 내려오면 통영 곳곳의 들러볼 만한 곳들을 차례로 짚어가게 된다. 임진왜란 후 한산도에 있던 수군통제영을 옮겨오며 객사 건물을 지은 뒤 ‘은하수를 가져와 피 묻은 병기를 닦는다’는 뜻을 담아 이름 붙인 세병관과 일제가 물자 운반을 위해 만든 해저 터널 등 역사의 현장이 즐비하다.

또한 문화 예술과 전통 공예가 유난히 풍성했던 통영인 만큼 이를 확인할 곳들도 수두룩하다. 통영 출신의 거장 윤이상 선생을 만나는 도천동의 윤이상기념공원(도천테마파크)과 우리나라 나전칠기 공예의 시작과 현재를 살펴볼 통영전통공예관이 있고, 유치환, 유치진, 김상옥, 김춘수, 전혁림 등 통영에서 나고 자란 예술가들이 즐겨 올랐으며 강구안을 바라보는 남망산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됐다. 유치환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청마문학관과 더불어 중앙동 우체국 일대 200m 거리에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 청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청마거리에서 이어진 골목은 초정 김상옥을 기념하는 초정거리로 이름 붙여졌는데, 이 골목에서 만나는 일본식 2층 가옥이 그의 생가다. 그 밖에 이들 예술가들의 생가터가 강구안과 중앙동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통영이 예술의 고장으로 이름난 데는 해방 전후, 그리고 한국전쟁 와중과 그 후 몸을 피해 혹은 영혼의 쉼을 위해 통영을 찾았던 수많은 예술인들의 흔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화가 이중섭이 전쟁 중 통영에 피난 와 살면서 걸작 ‘황소’를 남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의 통영 여행을 이끌고 있는 ‘파시’의 작가이자 ‘토지’ ‘김약국의 딸들’로 더 유명한 박경리 선생의 삶이 처음 열리고 닫힌 곳도 바로 이곳 통영이다. 선생의 생가라고 알려진 곳을 찾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소설가로서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미륵도로 향했다. 섬이지만 통영 내륙과 다리로 연결되고 마치 한 몸인 듯해 처음 오는 이는 바다를 건너는지 섬으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르는 재미있는 곳이다.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충무교 아래에서 본 통영대교의 야경. 어둑해진 하늘과 야경을 피어올린 다리와 바다의 모습은 누구도 담아내지 못할 그림을 이룬다.

미륵도에서 작가와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박경리기념관 내 산책로에 놓인 벤치에 앉으면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인들이 감탄해 마지않던 다도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영 시가를 벗어나 충무교나 통영대교를 건너면 바로 미륵도다. 이 미륵도를 크게 돌아 나오는 길이 산양해안일주도로. 섬을 두르는 방향에 따라 통영 시가와 다도해 일대, 바다가 닿는 곳에 터를 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해안을 두루 둘러볼 수 있어 인기 드라이브 코스가 됐다. 미륵도 한가운데 즈음, 산양읍 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박경리기념관이 있다.

2008년 5월 세상을 떠날 당시 선생이 마지막까지 머문 곳은 원주지만, 통영 출신이자 통영을 사랑했던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공간이다. 너무 거창하지 않으면서 견고한 느낌의 기념관 외관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우리 현대사의 의미 있는 순간을 살아오면서 남편과 자식의 죽음을 견뎌야 했음에도 문학으로 스스로를 일으키고 치유했던 선생의 삶과 상통하는 듯하다. 기념관 내에는 선생의 집필실을 꾸미고 유품과 유고의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일부라고 하는 것은 원주의 박경리문학공원(선생이 살던 집과 더불어 조성된)에 그 상당 부분이 보관,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기념관 뒤편의 언덕배기에 소박한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그 길 끝에 선생의 묘소가 있어 기념관의 의미에 무게를 더한다. 누군가가 가져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생화가 묘소 앞에 놓여 있다. 묘소가 조성된 언덕에는 곳곳에 선생의 작품에 등장한 글귀를 새긴 조형물들이 있고, 그 길 어느 곳에는 벤치도 놓여 있다. 이 벤치에 앉으면 멀리 다도해 풍경이 잡힌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통영 바다.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예술인들이 넋을 놓고 감탄해 마지않는 눈길로 바라봤다는 그 바다가 이곳에서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박경리기념관을 나올 즈음 해가 뉘엿뉘엿하길래 마음이 바빠졌다. 산양일주해안도로를 마저 따라 들어가면 만나는 달아공원에 이르러야 통영 최고의 해넘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이면 달아공원은 차와 사람들로 가장 붐빈다. 일찌감치 온 이들은 해넘이 명당에 카메라를 걸어놓거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통영 여행에서 달아공원 해넘이는 인기 있다. 이제 하루를 달려와 남아 있는 벌건 기운을 사력을 다해 토해내는 해가 저 먼 수평선과 바다 사이로 점점 모습을 감춘다. 꼬리가 길어 유난히 하늘에 붉은 빛 넓게 감돌던 날이었다. 저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없었다면 그저 여느 서남해의 해넘이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홀로 온 시선을 독차지하기보다는 누군가와 어우러져 더 좋은 것 하나를 완성하기. 달아공원에서 바라보는 해넘이가 더 이국적인 까닭이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 다시 바쁜 마음으로 차를 돌려 미륵도를 빠져나오는 충무교로 향했다. 통영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미륵도를 오갈 수 있었던 유일한 다리. 큰 버스나 트럭이 지나가면 다리가 흔들거려 마음 서늘했던 옛 기억이 돋아났다. 다시 충무교를 찾은 이유는 저만치 통영대교와 그 아래 통영 운하가 이루는 야경을 보기에 오히려 이곳, 정확히는 충무교 아래가 최고의 포인트가 되기 때문이다. 배가 지날 때마다 밀려든 파도는 발치에서 찰박대고, 약간은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바다에 반사된 모습이 아름다운 통영대교의 조명이 밝혀진다. 작은 어선이라도 지나면 야경은 더 완전해진다. 어선이 일으킨 파문이 물에 비친 불빛을 더욱 몽환적인 형체로 일그러뜨리는 것이다. 어둑해진 하늘과 야경을 피어 올린 다리와 바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하루를 끝내고 사람의 도시로 찾아 들어가는 어선은 누가 담아도 다 그려내지 못할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에필로그 : 다시 ‘파시’

훌륭한 예술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자연스럽다. 1960년대 중반에 쓰인 ‘파시’를 지금 다시 펼쳐도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한때 이 작품의 단점으로 지적되던 너무 뚜렷한 ‘선악 구조’가 50년이 지나도 여전해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드라마 소재로 쓰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2014년 한국의 드라마 작가들은 이 서사의 구조에 ‘막장’의 처절한 프레임을 씌워 새롭게 짜낼 것이고, 작품은 (요즘 사람들에게는) 그럴 만한 빌미를 충분히 제공한다. 지금 우리가 1950년대 전시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닌데, 평행이론처럼 삶이 닮았기 때문이라면 너무 비관적인 비유일까?

☞ Travel Information

[교통 정보]

찾아가기(서울 기준) 서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대전까지 간 다음 통영-대전 간 고속도로(통영 방향)를 타고 북통영I.C나 통영I.C로 나오면 곧장 도심으로 들어선다. 기차는 없어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나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하며, 소요시간은 4시간 15분 정도다.

시내 교통 통영 시내에서 버스를 이용하려면 노선 등을 통영시 버스 정보 시스템 사이트(bms.tongyeong.go.kr)에서 확인한다. 택시는 같은 통영 시내라도 미륵도 등 일부 지역에 진입하면 20~30% 정도 할증 요금을 적용한다.

[먹거리]

통영을 여행하는 많은 여행자들이 관심 있어 하는, 혹은 통영 여행의 목적이 된 것은 통영의 음식이다. 며칠에 걸쳐 나누어 먹어도 통영의 별미를 다 챙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다.

졸복국 통영은 여느 바다복어보다 작은 졸복으로 끓인 맑은 국을 먹는다. 미나리와 콩나물로 개운함을 더하고, 식초를 살짝 넣어 시원하게 즐긴다. 통영항여객선터미널 근처 서호시장과 중앙시장 등을 중심으로 졸복집들이 모여 있다. 새벽 일찍부터 문을 여는 곳이 많고 찾기도 쉽다.

도다리쑥국 지금은 철이 지났지만 제철은 역시 쑥이 올라오는 이른 봄. 이 계절 기름지게 살 오르는 도다리와 쑥을 넣어 끓여낸다. 바닷바람 맞고 자란 통영 쑥과 바다에서 잡은 봄 도다리의 궁합은 생선국이 이런 맛을 내는구나 싶을 만큼 기가 막히다. 고소하고 개운해 해장국으로 그만이다.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충무김밥 통영을 충무라고 부르던 시절, 여객선 손님이나 선원들을 상대로 판매하던 상하지 않도록 만든 김밥이다. 밥 따로 김에 싸고 오징어볶음(혹은 무침)과 무김치를 곁들여 먹는데, 햄이나 소시지, 단무지 한 톨 없어도 중독성 강한 맛에 통영 대표 음식이 된 지 오래다. 강구안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한 집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원조를 주장하는데, 사실 원조가 누구인지는 설만 분분할 뿐이고 맛도 대동소이하다.

고구마빼떼기 경남에서 예부터 간식으로 즐겨 먹던 이 기묘한 이름의 음식은 찐 고구마를 말린 것. 그냥 말린 채 먹거나 맛탕으로 요리하고, 죽으로 끓여 먹기도 한다. 어떻게 먹으나 고구마의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좋다. 다만 ‘빼떼기죽’은 다른 지방 사람들은 경험하기 쉽지 않은데, 중앙시장통의 일부 분식집에서 팔고 있다. 우짜·죽(055-645-7909), 할매우짜(055-644-9867), 향남우짜(055-646-6547) 등이 그곳이다.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꿀빵 공 모양의 반죽에 단팥 소를 넣고 튀긴 뒤 물엿에 담갔다 깨에 둥글린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입안에서 다디단 침이 고일 법한데, 실제 한 입 먹으면 의외로 달지 않다. 옛날 통영의 대표 간식이던 이 꿀빵이 이 지역 대표 별미가 됐다. 항구 주변을 중심으로 꿀빵집이 많지만 기왕 찾으려면 원조집이 제격이다. 1960년대 통영 여고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유명해진 꿀빵의 원조는 오미사(055-645-3230)다. 하루 정해진 양만 팔고, 떨어지면 오후 1시라도 문을 닫는다. 가게 이름도 없다가 옆 세탁소의 이름(오미사)을 따서 사람들이 불렀던 게 원조 꿀빵집의 이름이 됐다. 바로 먹지 않고 놔두면 물엿이 흘러내려 맛이 밋밋해지니 주의할 것.

다찌 술값은 비싸다. 그런데 술에 딸려 나오는 안주는 ‘거하다’. 통영의 독특한 술 문화인 ‘다찌’는 여전하다. 두 명이 찾아 1인 2만~3만원 상을 주문하면 3병의 소주(혹은 맥주)가 나온다. 그리고 통영에서 잡은 갖은 해산물 요리가 한상 가득 차려진다. 구이, 찜, 회, 숙회 등 기술도 화려하고 갑각류, 활어, 어패류 등 종류도 다양하다. 같은 ‘상값’이라도 동행이 많아지면 가짓수도, 양도 더 푸짐해진다. 항남동 일대에 밀집돼 있으며, 초행이라면 택시 타고 물어보면 된다.

작가 박경리 ‘파시’의 무대, 경남 통영
남기환 여행작가

월간지 ‘Travel&Culture’ ‘CASA Bistro’ 등을 거쳐 여행 전문지 ‘The Beetle Map’ ‘across’ 등에서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편집 디자인 업체 ‘아쉬’의 대표이자 미국계 유통업체 ‘코스트코’가 발행하는 멤버십 매거진 ‘The Costco Connection’ 한국판의 편집인이다. 저서 ‘7일간의 이스탄불 여행’을 발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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