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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korea #scandal #interview

“늑대 가족이 박 대통령을 데려갔다”

editor 김명희 기자

2016. 11. 24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의 남편 신동욱 공화당 총재가 털어놓은 충격적인 이야기들.

03 대통령의 제부, 신동욱 총재 충격 인터뷰


박근혜 대통령의 여동생인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은 최태민 일가의 민낯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40년간 가까이서 그들의 전횡을 지켜봤고 1990년에는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과 함께 노태우 대통령에게 ‘최태민에게서 언니를 구해달라’는 호소문을 보내기도 했다. 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놓고 박근혜·근령 자매가 한바탕 분쟁을 치른 사건에도 최태민 일가가 깊숙이 관련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근령 전 이사장은 그 일로 완전히 관계가 틀어져 지금까지 남남처럼 지낸다. 2008년 박근령 이사장과 결혼한 신동욱(48) 공화당 총재 역시 최순실의 비선 실세 의혹이 불거지기 전부터 ‘정윤회는 바지이고, 그 뒤에는 최순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해왔다. 11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2차 대국민 담화가 있던 날 만난 신동욱 총재는 최씨 일가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자매가 완전히 갈라섰고, 박근령 전 이사장은 철저하게 사회에서 매장됐다고 주장했다. 이들 부부는 박 전 이사장과 육영재단이 얽힌 몇 건의 송사 등으로 수억원대의 빚을 지고 있고 생계도 어려운 형편이다.

▼ 박근령 전 이사장도 함께 인터뷰를 요청드렸는데.

제 아내는 이제 와서 다시 사건의 중심에 서고 싶지도 않고, 나선들 대통령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착잡하고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침묵을 지키는 것이 가족 된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일고 있는 정치인으로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 박 전 이사장은 최태민의 존재를 언제 처음 알았다고 하던가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최태민 문제가 불거졌는데, 당시 ‘최태민이 육영수 여사 서거 이듬해인 1975년 2월 ‘현몽 편지’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했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제 아내가 “그게 아닌데”라고 하더군요. 육영수 여사가 생존해 계실 때 최태민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 비공식 행사에 여러 번 등장했고, 이 때문에 경호실에서 보고가 들어가자 어머님이 두 자매를 불러놓고 이런 분은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시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났다는 건 최태민이 지어낸 이야기고, 의도적으로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했다고 봅니다.



▼ 그럼 박 전 이사장이 최태민 일가를 처음 만난 건 언제인가요.

박근혜·근령·지만 3남매는 1979년 10·26 사태 이후 청와대를 나와 서울 신당동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제 아내는 그때 어려서 최태민 씨를 기억하지 못했는데, 최근 언론에 의해 새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신당동 시절에도 최태민 씨가 자주 드나든 것으로 보입니다. 아내는 1982년 성북동 시절부터 기억합니다. 그 무렵 남매들은 신군부의 핍박과 가까운 사람들의 배신 등으로 인해 위축돼 있었는데 최태민 일가가 적극적으로 다가와 위로해줬다고 합니다. 아내는 그때까지만 해도 고마운 사람들로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 그때만 해도 남매들이 사이가 좋을 때였죠.

네. 굉장히 우애가 좋았다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을 잘 끓여 다함께 단란하게 식사를 하곤 했답니다. 아내는 언니의 비서, 코디네이터,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항상 같이 다녔고요. 그러다가 아내가 풍산그룹으로 시집을 가게 됐는데 신혼집이 당시 박 대통령의 성북동 사저 바로 옆집이었다고 합니다. 언니가 보고 싶어 친정에 자주 드나드니 시어머니가 담에 작은 쪽문을 내줄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언니를 만나러 갔을 때는 거의 매번 집에 최태민 일가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고 합니다.

▼ 2012년 한 언론이 ‘김종필 전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당시 새누리당 의원)에 대해 “최태민의 자식까지 있는 애가 무슨 정치를 하냐”고 말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이 소문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나요.

그 소문에 대해 안타까워했습니다. “우리 언니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건 내가 보장한다”고 하더군요.

▼ 그럼 김 전 총리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인지.

그건 김종필 전 총리에게 직접 물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이 가장 잘 아시겠죠.(이후 〈시사저널〉 11월 14일자는 ‘김 전총리가 인터뷰에서 “어떤 놈이 박근혜하고 내 사이를 끊어 놓으려고 그런 짓(말)을 한 것 같다. 그런 얘기를 내가 할 턱이 있나. 사실도 아닌데. (중략) 하여튼 (당시 최태민은) 늙어서 애를 못 만들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 다시 성북동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서, 박 전 이사장은 얼마 안 돼 미국으로 떠났죠. 그 틈을 비집고 최태민 일가가 박 대통령과 더욱 가까워졌다고요.

아내가 첫 결혼에서 6개월 만에 이혼을 합니다. 제가 혼인신고를 할 때보니까, 그때까지 법적으로 미혼이더라고요. 첫 결혼은 아예 혼인신고도 안 했던 거죠. 아내 얘기를 들어보니, 시집살이가 좀 힘들었다고 합니다. 청와대에서 곱게 자랐으니 그럴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 당시 친정에서 자주 만나던 최씨 집안사람들이 “왜 그렇게 힘들게 사시느냐”며 자꾸 결혼에 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최씨 일가 사람들이 이혼을 부추긴 것 같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아내는 전 대통령의 딸과 재벌가의 혼사로,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참석할 정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결혼식을 치렀는데 6개월 만에 이혼을 했으니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미국행을 택했어요. 그때 최씨 일가가 아내의 빈자리를 대신해 비서, 집사 노릇을 하며 고립무원의 대통령을 사로잡은 거죠.

▼ 재산 문제와 관련해 박근령 전 이사장은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1년 동안 통장에 생활비가 꼬박꼬박 들어오더니, 그 후엔 들쭉날쭉하더랍니다. 박 대통령은 그 당시 은행 업무나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으니, 아내는 최씨 일가가 돈을 보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더군요. 한 번은 돈이 다 떨어져 패스트푸드점 쓰레기통에서 햄버거를 주워 먹으며 서러움에 북받쳐 울기도 했답니다. 그러다 1985년쯤 비자를 연장하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최씨 일가 중 한 사람이 집을 계약하자며 반포 한신 아파트로 데리고 가더랍니다. 그렇게 해서 제 아내가 아파트 한 채, 박지만 회장이 아파트 한 채를 받았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준 위로금만 해도 6억원이고, 그 돈이면 당시 아파트 20채 값(당시 강남 35평 아파트 매매가는 3천만원 선)인데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저는 그 돈이 모두 최태민, 최순실 일가가 재산을 불리는 데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순실 특별법을 만들어 그들의 재산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면 간단히 답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



▼ 박 전 이사장이 최씨 일가의 실체를 알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1982년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자 최태민이 실질적인 고문으로 따라 들어가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여러 전횡을 저질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해 청와대 경호실 출신 인사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숭모회가 최태민의 퇴진을 요구하며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육영재단 정관에 이사장은 설립자의 특수 관계인에 한한다고 명시돼 있거든요. 이때 아내와 박 대통령 간에 오해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아내와 숭모회는 최태민을 내보내라고 한 건데, 대통령은 ‘나의 측근을 내보내라고 한 것은 곧 나를 나가라고 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답니다.

▼ 당시 대통령과 직접 만나서 오해를 풀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여러 번 만남을 시도했지만 최씨 일가가 언니를 에워싸고 있어서 연락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후 대통령이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동생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선거 유세를 도우러 갔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는 박 대통령과 아내, 박지만 회장이 멀어진 것도 최태민 일가의 공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오롯이 대통령의 손발이 되기 위해선 가장 가까운 피붙이들을 떼어놓아야 했을 테니까요. 실제로 최태민이 박 대통령에게 “여성 대통령이 되려면 형제나 인척들을 절대 만나선 안 된다. 만나면 부정 탄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고 합니다.

▼ 그래서 박근령 전 이사장과 박지만 회장이 1990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최태민에게서 언니를 구해달라’고 탄원서를 쓴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내는 자필로 쓴 그 탄원서를 통해 “유족이 핵심이 된 각종 추모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하고 회계장부를 조작해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죠. 언론에서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요. 그런데 2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모든 것이 하나씩 진실로 밝혀지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최씨 일가의 실체를 파악하고 관계를 끊어낼 기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뭐라고 보나요.

대통령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최씨 일가입니다. 저는 그걸 늑대아이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어린아이가 숲 속에 홀로 남겨져 동사하기 직전인데, 그곳을 지나던 늑대 무리가 그 아이를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곳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그렇게 40년이 흐르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늑대 무리가 가족이고,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겠죠. 또 하나는 최태민 일가와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위해 함께 달려온 정치적 동지입니다. 최태민은 큰 무당, 예언가라고 하죠? 박근혜 대통령은 그 사람이 예언한 대로, 대통령이 돼 아버지의 업적이 왜곡되고 폄훼된 걸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 박근령 전 이사장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생활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알고 계신 대로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옷도 시장에서 사 입고, 신발도 5천원짜리를 신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아내 명의의 반포 한신 아파트는 육영재단 구조조정 과정에서 직원들 퇴직금 등을 지불하기 위해 처분했는데 회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돌려받을 방법도 없습니다. 최근까지는 제가 부산의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잡부로 일해 빚도 갚고 생계를 유지했었는데, 이제는 그 일도 그만두게 돼 새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채널A 재연 배우 모집에 원서를 냈는데 서류 심사에서 탈락했어요.

▼ 총재님 부부와 박지만 회장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아내가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는 건 조심스럽습니다. 저와 박 회장과 사이에 풀어야 할 문제들도 많이 있고요.

▼ 풀어야 할 문제라는 건, 총재님이 “박지만 회장이 2007년 나를 중국으로 납치해 살해하려 했다”는 허위 사실 등을 유포한 혐의로 구속돼 실형을 살았던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시 저를 중국으로 유인했던 사람이 박 대통령의 5촌 조카 박용철(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형 박무희 씨의 장남 박재석 씨의 아들)입니다. 제가 집요하게 설득하자 그 사람이 나중에는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기로 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돼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박용수(박무희 씨의 차남 박재호 씨의 아들)는 자살을 했고요. 하지만 용수는 누굴 죽일 사람이 아닙니다. 용철이가 덩치도 훨씬 크고 힘도 좋고요. 그런데 용철 조카가 생전에 최씨 일가에 대해,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도 저와 박지만 회장을 이간질하기 위한 최씨 일가의 공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사건이 재조사돼야 한다고 봅니다.

▼ 이번에 최씨 일가와 관련된 의혹이 말끔하게 해소되고 나면 박근혜 대통령과 박근령 전 이사장의 관계도 회복될 걸로 보나요.

그에 대한 결정 권한은 저희가 아니라 박 대통령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먼저 손을 내밀면 대중이 과연 “핏줄밖에 없다”고 할까요? 비선 실세를 떨어뜨려놨더니 이번엔 친인척이 나선다며 오히려 역풍이 불 겁니다. 제 아내는 1990년 탄원서 사건 이후 박 대통령과의 관계도 완전히 틀어졌고, 여러 사건 사고에 휘말리면서 국민들에게도 사사건건 언니의 발목을 잡는 이상한 아줌마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이건 박정희 가문의 또 다른 비극입니다. 이번 기회에 국민들이 최씨 일가의 40년 흑역사를 명명백백히 밝혀주신다면, 그들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아내의 삶도 조금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04단독 〈여성동아〉에서 찾은 최순실 게이트의 단서들

최순실이 직접 쓴 아이 버릇 길들이기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씨 일가의 관계는 1987년 육영재단 분규 사태 때 이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육영재단 직원들이 족벌 인사 체제 종식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는데, 그들이 지목한 ‘족벌’이 바로 최태민 씨와 그의 딸 최순실 씨였던 것. 

이에 최순실 씨는 1987년 〈여성동아〉 10월호에 직접 기고한 장문의 수기를 통해 자신은 육영재단 분규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은 10년 전 아버지의 비리를 캐겠다는 악몽 때문에 앞으론 조용히 살자고 약속했다. 절대로 남의 일엔 참견하지 말자고 눈물을 뿌리며 약속했었다’고 밝혔다. 수기에 따르면 최순실 씨가 ‘가족들의 약속’을 깨고 박 대통령과 재회한 건, 1986년 자신이 운영하던 강남의 초이유치원과 어린이회관이 자매결연을 맺으면서부터다.

그때 육영재단은 〈어깨동무〉 〈꿈나라〉 등의 어린이 대상 잡지를 펴내고 있었고, 최순실 씨는 유치원 교육 프로그램과 교재를 연구하는 ‘아동연구소’라는 모임을 운영 중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최순실 씨가 〈꿈나라〉의 편집과 제작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실정에 맞지 않는 아이템을 내놓고 사사건건 간섭했다” “최씨 측에서 채용한 사람들이 (그녀가 운영하는) 연구소에서 지시를 받아왔다”는 것이 당시 기자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최씨는 이를 부인하면서 박근혜 이사장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박근혜 이사장이 연구소의 일에 대해) 무척 바람직한 일이라고 관심을 보였다.… 유아 잡지 〈꿈나라〉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꿈나라〉 편집진과 우리 팀 간의 대화를 주선해주셨다. … 박근혜 이사장의 명을 받은 어린이회관 관장의 청으로 (기사)아이템을 내놓았을 뿐이며 … 편집회의에 들어가 주재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기자들과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외부인들 간 내홍에 시달리던 〈어깨동무〉와 〈꿈나라〉는 1987년 5월 폐간됐다. 기자들이 항의 차원에서 집단 사표를 제출했는데, 박 이사장이 이를 수리한 것이다. 기자들은 박 이사장의 배후에 최태민과 최순실 씨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순실 씨는 잡지 폐간의 원인이 재정 압박 및 경쟁지와 부록 · 광고 싸움에서 진 탓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육영재단은 설립자인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 지원이 줄어 재정 압박을 받았던 것이 사실. 하지만 수익성이 있는 만화잡지 〈보물섬〉을 펴내는 등 나름의 자구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터라 기자들의 상실감이 더욱 컸다.

당시 최순실 씨는 육영재단 분규 사태에 아버지 최태민 씨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에 대해 “자식 된 도리로 마음이 아프다.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는 것이니 더 이상 아버님을 들먹이지 말아달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같은 달 〈어깨동무〉의 한 퇴직 기자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육영재단 문제로) 최씨의 아버지를 두 번 만났다. 그가 만나자고 해서 찾아간 것이다. 재단의 아무런 직위도 없는 그가 만나자고 해서 약속 장소에 나간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진 말아달라. 그 당시 분위기는 약속 장소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묘한 거였다. 그는 내게 일종의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 그리고 육영재단을 위해 힘을 합쳐보자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육영재단 운영에 최씨 일가가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무렵 최순실 씨는 이미 재력가로도 관심을 모았다. 1985년부터 강남 신사동에 어린이 대상 학원을 운영하다 원생이 늘자, 유치원을 짓기 위해 인근에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100여 평의 땅을 매입했고 1988년에는 얼마 전 압수수색을 받았던 신사동 미승빌딩 부지를 매입했다.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이처럼 막대한 재력을 소유한 점도 의혹의 대상이었다. 최순실 씨는 수기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나의 소망인 유치원을 세우기 위해 조그만 소품 가게를 키워 의상 대리점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 의상 대리점에 웬만큼 프리미엄이 붙자 은행 융자, 친척에게 약간씩의 도움을 받아 유치원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연구자정보(KRI,www.kri.go.kr)에 등록된 그녀의 프로필을 보면 1981년부터 87년까지 미국 LA에 있는 퍼시픽 스테이츠 대학에서 유아교육학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KRI는 연구자들이 직접 자신의 정보를 기재하도록 하고 있다. 재산 형성 시기와 대학에 다닌 시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걸 보면 적어도 둘 중 한 가지는 거짓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순실 씨는 1989년 김모 교수와 함께 〈어린이 버릇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라는 책을 출간하고, 그해 〈여성동아〉 8월호와 9월호에 욕하고 깨무는 아이의 행동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어린이 버릇 들이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했다. 

당시 최씨가 사용한 직함은 ‘미국 산타모니카 몬테소리 교육대학 한국교육원장’. 원래 장애인 교육에서 착안한 몬테소리 교육은 아이의 개성을 존중하고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부모와 교사의 권위적인 태도는 몬테소리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다. 그런데 최씨는 아이들을 ‘감시(대부분의 어린이는 깨무는 행위에 대해 어른이 감시를 조금 늦추면 다른 장소까지 따라가서 친구를 깨물려고 할 때가 있다)’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아이가 잘못하면 무언의 엄한 표정으로 응시하라’는 등의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다. 아이의 문제 행동은 잘못된 학습의 결과라는 전제 하에, 부모가 ‘전지적’ 관점에서 아이의 행동을 일일이 관찰하고 거기에 맞춰 반응해가면서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 주장의 핵심인데 몬테소리의 철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 교육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상을 길들이는 극단적인 경우가 식사 종을 치기만 해도 침을 흘리도록 하는 파블로프의 개다. “최태민 씨가 최면술로 사람을 홀리는데 능했다”는 최씨의 조카 최용석 씨의 증언에 비추어보면 최태민과 최순실 씨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길들이고 조정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부전여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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